(완도기행4) 고금도 충무사와 옥천사

2023. 8. 24. 21:12명승지

 

<고금도(古今島)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고금도는 왜란 당시에는 강진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의 행정구역은 완도군 고금면에 속해 있다.

명랑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를 거처

1598년 2월 17일 (선조 31) 완도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완도는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이면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방어하기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고금도는 형세가 견고한 요충지이며

섬 안에는 기름진 농토가 많아 군량미 확보가 용이하였고,

또 군선을 제작하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따라서 완도 고금도는 7월16일 조선과

진린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연합전선을 형성한 곳이면서

11월19일 노량해전을 통해 일본과의

임진. 정유재란 전쟁을 마루리 지었다는 뜻 깊은 전적지이다.

 

삼도수영통제영을 설치한 그해 3월에

전라남도 장흥에 있는 일본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와 살육 약탈을 자행하자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치종(宋治棕)에게 정예군을 주어

그들을 추적하도록 했다. 적들이 놀라

순천 방면으로 도망치자 겸조방장(兼助防將)

순천부사 김언공(金彦恭)이 전라병사 이광악에게

급보로 알려 소탕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함선 16척을 격침시키고

적의 머리를 베었다.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이곳 고금진 근처에는 범접하지 못했다.

 

고금도해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1657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1년)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적병을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에서

크게 격파했다. 순신이 진린(陳璘)과 더불어 연회하려고 하는데,

적이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돈해 대기하게 하였다.

얼마 후 적선(賊船)이 크게 이르자

순신은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적중으로 돌격해 들어가면서

화포(火砲)를 쏘아 50여 척을 불사르니,

적이 마침내 도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묘당도와 이순신>

고금도에 부속된 작은 섬 묘당도는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마지막 본영이 있던 곳이다.

묘당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왼쪽으로는 마량, 오른쪽으로는 약산의 좁은 수로를 두고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을 거쳐야 완도, 강진, 해남,

진도 등지로 진입하기가 수월해진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명나라장수

진린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일본군을 물리친 장소이다.

이곳은 충무공의 마지막 본영이 있었고,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했던 곳이다.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고하도(高下島, 현재의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8천여 명의 수군을 인솔해 와

이곳 고금도 묘당도에 진영을 설치했다.

진영을 설치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수군 재건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수군을 조련(調練)하는 한편에서 전선을 건조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정비하여 수군의 역량을 확장했다.

 

조선 수군이 이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몇 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서울 한강 일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명나라 수군 진린 함대가

이곳에 도착했다.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이보다 3개월 앞선 4월, 수군 5천 명, 전선 5백 척, 보병과

기타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2개월간 서울에서 지내다가 6월 동작나루에서

선조 임금의 전송을 받은 진린은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7월 16일 당시 전라도 수군 본영이 있는

고금도 덕동리(古今島德洞里)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다.

 

이때부터 묘당도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그해 11월 노량해전에서 진린 도독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임시로 봉안했다가

나중에 충청남도 아산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안장하여 모셨다.

 

충무공을 제향하는 충무사를 중심으로 하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월송대-이충무공 가묘 유허(幽墟)>

충무사 홍살문 맞은 편 작은 언덕이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무덤이 있던 월송대이다.

월송대는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에 머물 당시

군사들의 훈련과 장비 등을 점검하는 장소였다.

 

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던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으나

일본군이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들에 대해 추격 태세를 갖추었다.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에 출몰한 일본군을 소탕했고,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 순천왜성(외교성)전투에 참가했다.

순천왜성 공격 당시 수군은 이곳에서 발진했다.

10월 9일에는 고금도 덕동포구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했다.

11월 19일 연합함대가 노량을 향해 출진했고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이날 아침, 5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경상남도 남해군 관음포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본영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83일간을 모셨다.

이듬해인 1599년에 충청남도 아산(현재의 현충사 부근)으로 옮겼다.

 

 

<하마비>

충무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에서 조금 걸어들어 가면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충무사가 있다. 이는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란 뜻이다.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관리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기념비

충무사 홍살문 아래 해남도가 보이는 바닷가에

관리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기념비와 함께 있다.

 

 

 

 

 

해남도(海南島)

관리사와 기념비가 있는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섬이 해남도인데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 섬에 많은 허수아비와 횃불,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가루를 이용하여

수많은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던 섬이다.

지금은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되어 있다.

 

 

 

 

<홍살문>

충무사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이란 능·원·묘·궁전 또는 관아, 향교 등에서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문인데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일주문과 다른 것은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능묘의 경우 홍살문의 옛 이름은 신문(神門)으로

신문은 글자 그대로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구별한

임금의 신령이 들어가는 문을 의미한다.

 

홍살문을 붉게 칠한 것은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충무가 경내로 들어가면

솟을 대문격인 외삼문이 세워져 있고

외삼문을 들어가면 3개의 비가 조성되어 있다.

 

@관찰사이공규현영세불망비/묘당도이충무공유적비

 

내삼문 왼쪽 건물이 동재이고 맞은 편이 서재이다.

내삼문 안쪽 좌측의 건물이 동무이고

맞은 편이 서무이며 사당은 그 중앙에 있다.

충무사(忠武祠)

선조 31년(1598)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진린(陳璘) 도독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

진린은 그의 꿈에 나타난 관운장(關運將)을 제향하여

휘하 장병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

<관왕묘(關王廟)>이다.

 

1666년(현종 7) 동무(東廡)를 지어

진린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배향했다.

1713년(숙종 31) 관왕묘비를 세웠다.

이후 서무(西廡)를 신축하여 이순신 장군을 단독 배향했다.

그 후 현종 7년(1666년) 수군절도사 유비연(柳斐然)이 중수하여

동무(東廡)에는 진린(陣璘),

서무(西廡)에는 1683년 충무공을 모셨다.

1781년( 정조 5, 신축년) 임금이

<탄보묘(誕報廟)> 편액을 하사하여 사액 묘우가 되었다.

1792년(정조 16) 등자룡(鄧子龍)이 동무에 추배되었다.

1795년(정조 19) 임금이 『이충무공전서』를 하사하였다.

1940년쯤 일제강점기에 관우상과 위패 등

유물이 훼손되고 제향이 중단되었다.

이후 1953년 관왕묘(탄보묘)의 옛 자리인

고금도 덕동포구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면서

명칭을 <충무사(忠武祠)>로 개칭하였다.

 

(동재)

현재 충무사는 정전(사당.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동무(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서무(정면 3칸, 측면 1칸만, 맞배지붕),

동재(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서재(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관왕묘비각(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

내삼문, 중상문, 외삼문,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9년 동무에 이순신 장군의 보좌관 격인 조방장을 지내고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운 가리포진 첨사였던

이영남(李英男)을 추배하였고,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1년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매년 4월 28일(양력) 탄신기념제와

11월 19일(음력) 순국제를 봉행하고 있다.

 

<서재>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당문이 채워져 있어 참배하지 못했다.

<동무>

 

<서무>

 

<서재 뒤편에  관왐묘비가 있다.>

 

 

관왕묘비(關王廟碑)

충무공의 유해가 일시 모셔졌던 이곳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

관왕묘비는 1713년(숙종 39)에 세웠다.

이이명(李頤命)이 비문을 짓고, 이우항(李宇恒)이 글씨를 썼다.

관왕묘 창건 전후의 경위를 기록한 묘비에는

명나라군 수군 장수가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253센티미터, 폭 93센티미터,

두께 20센티미터이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집이다.

 

 

 

 

 

묘당도 덕동마을과 덕동항

1598년 2월17일 이순신이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고,

진린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또한 1681년(숙종 7) 고금도진을 설치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폐진 되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묘당도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육지와 잇닿아 있는데,

원래는 관왕묘(關王廟)가 있던 섬이라 하여

묘당도(廟堂島)로 부르다가 1971년 덕동리에 분리되면서

충무사(忠武祠)의 이름을 따서 충무리(忠武里)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고금도 충무사(忠武祠)는

1842년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이주해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이 활동했던 당시에는

무인도(無人島)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옥천사(玉泉寺)

새로 지은 이순신 장군 기념관에서 왼쪽 마을 길 사이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대숲이 우거진 언덕을 오르면 옥천사가 있다.

옥천사(玉泉寺)는

관왕묘 충무사의 수호 사찰 성격을 띠고 건립된 것이다.

1666년 전라 우수사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 중수를 위해

자재를 모아 승려 천휘(天輝)가 건물을 보수케 하는 한편

그 곁에 암자 하나를 지어 묘(廟)를 지키고 제사를 맡도록 했다.

1684년(숙종 10) 전라도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이

관왕묘를 중수한 뒤 사액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후

1710년(숙종 36) 판부사(判府使) 이이명의 주청에 의해

조정으로부터 제관을 보내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뒤 1791년 정조 임금이

‘탄보묘(誕報廟)’라는 사액을 내리고

1792년(정조 16) 임금의 명으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군 부총관 등자룡을 함께 배양하도록 했다.

 1792년(정조 16) 8월 17일 부총병 등자룡을

강진 탄보묘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 지냈다.

1832년(순조 32) 3월 14일 호남의 탄묘보와

영남의 관왕묘에 의대와 포진을 갖추도록 명하다.

1801년(순조 1)에는

수호 암자의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고쳤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제사는 중단되고

그때까지 보존되었던 관왕상(關王像)과

위패 및 각종 유물이 바닷물에 던져졌다.

단지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白雲寺)에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전한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이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충무사(옛 관왕묘) 경내에 있던 암자 옥천사는

충무사에서 분리되었다.

옥천사는 현재 충무사 입구 주차장에서

마을회관 건물 왼쪽으로 1백여 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불볕더위 속에 옥천사를 찾아갔지만,

지금의 옥천사는 참배객이 없는지

관리도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마치 폐사된 절과 같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민족의 영웅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