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미륵사 철천리 마애칠불상(보물461호)과 석조여래입상(보물462호)

2023. 8. 27. 13:22국내 명산과 사찰

 

연이은 폭염 속에 맞은 하기휴가다.

날은 덥지만, 그냥 집에서 보내기는 좀 그렇고 해서

섬이나 사찰은 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른 아침에 강진으로 내려갔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불볕더위 속에

도저히 걸어 다니기조차 힘이 들었다.

섬이면 좀 나을까 싶어 강진에서

완도 고금도로 갔지만 마찬가지다.

고금도에서 여장을 풀고 이튿날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

숙소와 가까운 사찰과 충무공 유적지로 알려진

고금도 충무사만 대충 둘러보고 귀경길에 올랐다.

3박 4일의 일정에서 단 하룻밤 숙박만 하고

귀경길에 오르자니

이 먼 곳까지 와서 무익하게 돌아간다는 것이

왠지 허망하기도 했다. 귀경길 경로를 보니 나주와

광주를 거치게 되어 있어 혹시 도로변에 볼거리가 없는가 싶어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보물로 지정된

나주 봉황리에 철천리 마애칠불과 석불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는 차 안에서 고속도로의 이정표를 보니

바로 눈앞에 나주 봉황리로 빠지는 JCT이다.

귀경길을 서둘다 보니 아침도 굶은 상태라

식당에서 요기도 할 겸 마애칠불과

석불을 들려보고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비게이터가 가르쳐 준 곳에 도달했지만,

마애불이나 석불이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미륵사란 절 이정표만 보이지

숲과 덤불뿐이다.

기온도 올라 더위도 심해져 걷는 것도 힘이 든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절 앞 집에서 마을 사람 한 분을 만났다.

석불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절 안에 보이는 첨탑이 보이는 곳에 있다고 일러준다.

나주 미륵사는 나에게는 생소한 사찰이다.

잘 알려진 사찰이 아니라서 그냥 포기할까 하다가

마애칠불과 석불만이라도 보고 가렸고 미륵사로 들어갔다.

묘하게도 이번 여행에서 들리는 사찰은

모두 예정에 없던 사찰들이다.

 

사찰은 대개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가는데

미륵사 일주문 앞은 숲이 너무 우거져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차도가 나있는 도로로 경내로 들어갔다.

경내에는 들어서니 높은 돌계단 위에 용화루가 있고

용화루 뒤쪽에 대웅전이 보이고 그 옆길이

마애칠불로 오르는 길이 나 있었다.

보물 제462호인 석조여래입상은 3층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었다.

옛 장소에 1999년 전각을 지어 보존한 모양이다.

보물 제461호인 마애칠불상은 그 앞 노천에 보존되어 있고

그 앞에 비례석으로 보이는 널따란 바위가 놓여 있다.

미륵사 방문의 목적은 마애칠불과 석불이기에

전각은 내려오면서 참배하기로 하고

바로 마애칠불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나주 미륵사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덕룡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미륵사는 연기조사(緣起祖師)가 544년에

창룡사(蒼龍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문헌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사찰의 창건이나 그 이후의 연역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 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살림집과 법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미륵사는 미륵당이라 불렸고 무속인이 거주하였다.

지금의 미륵사는 1990년대에 원일 스님에 의해 지어졌고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등의 전각과

강당,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 언급된 연기(緣起, 烟氣)조사는 인도의 고승으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때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구례 화엄사의 창건기록에는 백제 성왕 22년(544)

구례 화엄사를 창건한 사람이며, 백제 법왕 (599) 때에

3천여 명의 스님들께 화엄사상을 전하였다고 한다.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내원사가 있는데

이 절 또한 연기(緣起, 烟氣) 조사가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 9년(548년)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기대사의 출생지와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의 사경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5호)>의

발문에 따르면 「연기(緣起, 烟氣)는 황룡사의 승려였으며

경덕왕 13년(754) 8월 1일부터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755) 2월 14일에 완성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연기조사는 진흥왕 대(540-576)의 인물이 아니고

경덕왕 대(742-765)의 실존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미륵사의 마애칠불과 석조 여래의 조성시대가

10세기 내지 12세기인 점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연기조사가 이곳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 거리감이 있다.

 

 

<용화루>

 

마애칠불상은 3층 전각 앞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칠불상 앞에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배례석으로 보인다.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 ( 羅州 鐵川里 磨崖七佛像 )

문화재 지정 : 보물 제461호

지정 연도 : 1968. 06. 10

석상 크기: 높이 95cm, 동면 좌상 높이 90cm,

남면 입상 높이 82cm

조성시대 : 고려시대 후기(12~13세기)

 

석조여래입상 앞에 4각형

원추형(圓錐形) 바위 전면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바위 정상에는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동면에는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坐像) 1구가 있고

북면에도 좌상 1구가 있는데 수인은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남면에는 4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입상(立像)이다.

조각 수법이 모두 비슷하다. 또 서면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광부(鑛夫)들이 떼어냈다고 전한다.

동자상까지 포함하면 7불이지만

없어진 서면 불상까지 합하면 9불(佛)이 된다.

 

동자상이 사라진 것을 추측해 보면

옛날에는 불상의 동자상을 돌려서 잘 돌아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고 또 석불에서 떼어낸 돌가루를

갈아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여인이 이곳에 치성을 드렸다고 전하는 이야기 있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혹자는 석조여래입상을 치성광여래로 보고

이 칠 불을 치성광여래의 칠원성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고증된 바는 없다.

이들 불상은 모두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가 명확하며

얼굴의 세부(細部)는 뚜렷하지는 않으나

윤곽이 분명하고 우아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는 빈약하고 굴곡도 표현되지 않았으며

신체의 구분, 옷 무의 등 선(線) 처리에도 너무나 도식적이다.

 

 

 

 

좌상과 입상이 모두 비슷한 크기이며

발아래에는 1단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자연 대좌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마모가 심해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마애불상군이나 사면불을 보면

자연석의 큰 바위의 표면에 조각되어 있는데

미륵사의 마애칠불은 원추형 4면석에

다수의 불상이 비스듬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이런 형태는 극히 드물며 또한 이렇게 4면 불을

한 면에 조성한 예 역시

우리나라의 귀중한 불상의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은 일부에서 전형적 양식의 퇴화가 엿보이며

기법의 둔화, 의문(衣紋)의 도식적(圖式的) 처리 등으로 보아

12~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 ( 羅州 鐵川里 石造如來立像 )

문화재 지정 : 보물 제462호

지정연도 : 1968. 06. 10

석상 크기: 높이 5.38m, 너비 2.2m

조성시대 : 고려 후기 (10세기 후반)

주소 : 전남 나주시 봉황면 세남로 408-64

 

1999년 나주 미륵사가 조성한 3층 전각에 보존된 이 불상은

너비 2.2m 전체 높이가 5.38m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불신(佛身)과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광배 형태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을 취하고 있다.

 

민머리에 육계(肉髻)가 큼직하고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양감이 뚜렷하다.

눈은 길고 코는 크며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불상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귀는 긴 편은 아니며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신체는 괴량감이 충만하고 당당하나

어깨는 부자연스러우며 굴곡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 右手),

여원인(與願印, 左手)인데 어색하다.

원래는 불상 아래 기단이 이중대좌였다고 전한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見)이며 의문(衣紋)은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U자형 의습이다.

이런 의습은 우전왕상식불상양식(憂塡王像式佛像樣式)

이라 부르는데 다만 Y자형을

선명하게 취하고 있지 않은 점은 차이가 있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이며

2조의 신광과 두광으로 구별되고 있다.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를 연화문을 돌리고

그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였고 신광 사이에는

구름무늬(雲紋)을 새겼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

또는 괴체화(塊體化) 되어가는 신체적 조형 및

형식적인 의문등이 보이나 상호에서 보여주는

강한 인상 촘촘하게 주름진 활달한 의습,

아직도 전대에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한 어깨 등은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작품으로

살찐 얼굴이라든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신체의 모습,

그리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유행하던

거불 양식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성연대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원래 나주 봉황면 철천리의

나지막한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봉황면 지역은 백제 때는 실어산현(實於山縣)

통일신라 이후 조선초까지 철야현(鐵冶縣)이 있었던 지역이다.

 

 

 

삼성각

 

대웅전

대웅전 법당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대웅전은 1990년대 조성되었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관음불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 양쪽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수인과 양협시로만 보면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닌 아미타불로 보이는데

석가모니불로 명기되어 있다.

 

 

지장탱

 

신중탱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면 중앙에 삼층석탑이 보이고

좌측에 심우당, 우측에 공양간으로 이용되는 향적전이 있다.

삼층 석탑 뒤편의 건물은 용화루다.

 

 

 심우당

 

향적전

 

 

사천왕문에서 바라 본 일주문

 

일주문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일주문 위에 사천왕문이 있는데 사천왕은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 뒤편 모습

 

<덕룡산 미륵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앞은 숲이 너무 우거져 진입하기가 곤란하여

역으로 사천왕문에서 내려오면서 일주문을 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