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埋香)과 매향비(埋香碑)

2023. 8. 19. 16:17국내 명산과 사찰

 

@ 침향(沈香) -

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山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 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거 넣어 둡니다.

​沈香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 百年은

水底에 가라앉아 있은 것이라야

​香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

千年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沈香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陸水와 조류(潮流)가 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自己들이나 自己들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未來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後代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數百 數千年은

이 沈香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이시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고향 <질마재>를 소재로 노래한 시집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에 실린 시다.

매향(埋香) 의식(儀式)에 대한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전리 해변(갯벌)에 발굴된 침향>

 

침향은 침향나무 Aquilaria agallocha(팥꽃나무과)의

수지(樹脂)가 침착된 수간목을 일컫는다.

향나무를 묻는 것을 매향(埋香)이라고 하고

그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은 비석이나

바위에 암각 한 것을 매향비(埋香碑)라 한다.

향을 묻는 장소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合水)하는 곳

주로 바닷가 갯벌을 이용하였고,

매향비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비문(碑文) 역시 전문가가 아닌

민초들의 투박한 솜씨로 암각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장소를 택해 매향비를 세웠다.

이러한 매향 의식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미륵신앙이란 석가모니불이 수기(授記)한

미래불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소의 경전은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충주 미륵사 석불입상 보물 제96호>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지만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은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이며,

다른 하나는〈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미래에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미륵불에 대한 이런 바램이

매향(埋香)이란 의식(儀式)을 통해

민중들에게 깊이 파급된 것이다.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보물 제45호 백제시대(600) 석불사 소재>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차 늘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한다.

 

미륵신앙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慈悲)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불린다.

 

<김제 금산사 미륵삼존불>

 

≪佛說彌勒古佛尊經≫의 <誕生의 緣起>에 의하면

「미륵존불은 인수백세시(人壽百歲時) 석가세존 당시에

인도 남천축 바라내국(波羅捺國) 대바라문가에 탄생하셨다.

바라내를 번역하면 강요성(江澆城)이니

그 나라는 강물이 둘러 있다는 뜻이다.

부친은 당시 바라내국의 총리대신이었으며

당시의 국왕은 바라마달(波羅摩達) 왕이었다.

미륵이 태어나자 부친이 관상가를 불러 관상을 보게 하니

32상과 80종호를 갖추고 있어

대성인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왕은 장차 그가 성장하면

자신의 왕위가 찬탈되지 않을까 걱정하자

부친은 이를 미리 알고 비밀리에

겁바리촌 바바리(劫波利村 波婆里) 라는 곳에

데려다 양육하였다.

겁바리촌을 번역하면 착촉누귀(捉觸髏鬼)이며,

바바리는 대호(大護)이니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송장을 갖다 버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미륵은

성은 자씨(慈氏)이며 또 본구덕상(本具德相) 이라 자씨라 하였다.

바수밀경에는 아리미륵이라고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慈氏라는 말이 되고,

아라(阿羅)만을 따로 해석하면

곧 아일다(阿逸多)라고 하였으며

아일다는 이름이요 미륵은 성이라고 하였다.

범어 매달리아(眛怛利耶)는 보살의 성이니 번역하면 慈氏요,

이름은 아일다라 하고 아일다는 무능승(無能勝)이니

후일 성인이 되어 왕을 용서하고 교화하였다고 한다.」

 

<익산 미륵사지 9층탑. 국보제11호>

우리나라에서의 미륵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 초창기에 관한 문헌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으나,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순도(順道)를 파견하였던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

간절한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구해 왔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이미 민중들에게 전개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본다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최초의 불상은 미륵불이 된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미륵사·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절이 세워졌고,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造像)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미륵불광사는 그 사적의 문맥으로 보아

성왕 때의 중요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552년(성왕 30)에는 왕이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보내 주었는데,

이때 전해준 불상은 석가불과 미륵석불(彌勒石佛)이었다.

그러나 매향 의식은 이미 마한 백제 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제199호>

 

또한 미륵선화설화(彌勒仙花說話)에 의하면,

위덕왕 때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화신(彌勒化身)을

친견하고자 웅진(熊津)의 수원사(水源寺)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이 공주지방에 전래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유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634년(무왕 35) 낙성된 미륵사는 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경영함에 따라

세운 삼국 제일의 규모를 가진 대가람이었다.

 

<동해시 두타산 미륵불상)

신라 사회에 미륵신앙이 넓게 퍼져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사와

불상 등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興輪寺)의 주불은 미륵불이었다.

진평왕 때의 흥륜사 승려 진자는 항상 미륵상 앞에서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해 줄 것’을 발원하였다.

그는 미륵불을 친견하기 위해

웅진 수원사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다시 경주로 돌아온 그가 미시(未尸)라는

아름다운 소년을 만나 7년 동안이나

국선(國仙)으로 받들었다는 미륵선화설화는

화랑도와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는 곧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 사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화 시키고자 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진평왕 때 화랑으로 활동하던 김유신(金庾信)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龍華樹)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신앙과 관련이 있다.

화랑 출신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는

죽지(竹旨)의 탄생 설화에도 미륵신앙의 영향이 보인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국보 제308호>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 전반적인 불교학의 발달과 함께

미륵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리체계를 세우게 된다.

원효(元曉)는 ≪미륵상생경≫에 대한

종요(宗要) 및 소(疏)를,

원측(圓測)은 ≪미륵상생경약찬 彌勒上生經略贊≫을,

의적(義寂)은 ≪미륵상생경요간 彌勒上生經料簡≫을

각각 저술하였고, 특히 태현(太賢)은 미륵삼부경에 대한

고적기(古迹記) 각 1권씩을 저술하였다.

 

경흥(憬興)은 ≪미륵상생경소 彌勒上生經疏≫

·≪미륵하생경소 彌勒下生經疏≫·

≪미륵경수의술문 彌勒經遂義述文≫·

≪미륵경술찬 彌勒經述贊≫ 등의

많은 저서를 짓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의

백월산이성설화(白月山二聖說話)에서 볼 수 있듯이

≪미륵하생경≫에 나타나는 미륵 부모의 이름이

신라인의 이름에까지 쓰이고, 수행을 통하여

미륵불로 현신성도(現身成道)했다는 것은

미륵신앙 관계 경전의 폭넓은 유통을 토대로

미륵하생성불사상이

신라적으로 변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덕왕 때의 승려이자 낭도였던

월명(月明)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꽃을 통해서

미륵을 친히 모셔 줄 것을 기원함으로써

미륵왕생의 이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경덕왕 때의 충담(忠談)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상에게

차 공양을 올렸다.

이 삼화령의 미륵불상은 일찍이 선덕왕 때의 승려

생의(生義)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모셔 둔 것이었고,

현재까지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특히, 경덕왕 때의 진표(眞表)는 참회의 행법(行法)을 통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고,

미륵보살로부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상징하는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와 수기를 받은 뒤,

망신참(亡身懺)과 점찰법(占察法)을 통하여

독특한 미륵신앙을 확립시킨 대종주(大宗主)이다.

그는 미륵과 지장을 연결하고 참회와 깨달음을 통하여

새로운 정토를 여는 근본 도량으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대불 보물 제1200호 고려시대>

이 밖에도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는

미륵불상에 얽힌 설화들은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719년(성덕왕 18)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석 미륵상을 봉안하였다.

764년(경덕왕 23) 왕이 백월산에 남사(南寺)를 세운 뒤

금당에 미륵상을 모시고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고 액호하였는데,

이것은 달달박박(怛怛朴朴)과

노힐부득(努肸夫得)이 현신성도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경덕왕 때의 고승 태현은

항상 용장사(茸長寺)의 미륵장륙석상을 돌았는데,

그 미륵상이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는 설화,

그리고 죽은 아이를 묻었던 땅에서 미륵석상이 나왔다는

조신(調信)의 꿈 이야기 등, 미륵신앙과 관련된 설화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서 유포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사회에 미륵신앙이 그만큼 널리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자칭 미륵불은

후고구려의 왕 궁예(弓裔)이다.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은 궁예는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여 협시보살로 삼았으며,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는 등

허무맹랑한 소리로 무고한 대중을 괴롭혔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제323호)>

 

신라 이후 올바른 미륵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미타신앙·관음신앙과 함께 하나의 전통으로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 살아남아 있다.

다만, 고려 초기 이후 특별히 미륵신앙에 관심을 가진

승려가 많지 않았고,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의 세력에 밀려났으므로

신라시대와 같이 열렬함과 독특함을 함께 갖춘

미륵신앙은 다시 꽃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 미륵신앙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사원으로는 금산사나

현화사 외도 관촉사(灌燭寺)·금장사(金藏寺)·

도솔사(兜率寺) 등이 있었다.

광종 때 혜명(慧明)에 의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의 관촉사에는

1006년(목종 9)에 완성된 미륵 석불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미륵불상에 얽힌 영험 설화는

당시 사회에 미륵신앙이 폭넓게 유포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992년(성종 11) 현탄(玄旦)이 창건한

용두산(龍頭山) 금장사 금당의 주불은 미륵삼존이었는데,

1310년(충선왕 2) 당시의 왕사 진감(眞鑑)과

제자 굉지(宏之)가 이 미륵삼존에 금을 다시 입히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 南行月日記>에 의하면,

옥구에서 장사(長沙)로 가는 길가에 도솔사가 있었고,

그곳에 미륵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 논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7호. 고려 시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하던 고려 후기의 민간에는

미륵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는데

미륵불이 하생하여 교화하는 용화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는

의식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이다.

매향의식이란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는 풍속인데

이는 곧 미륵하생신앙의 유행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륵하생신앙은

고성삼일포매향비(高城三日浦埋香碑) 및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1387년(우왕 13)에 세워진 사천매향비에 의하면

1,000인이 결계(結契)하여 발원하였고,

1309년에 세워진 삼일포 매향비에 의하면

지방관 10여 명을 비롯한 존비(尊卑)가 함께 발원하고 있다.

특히, 1309년에 있었던 매향은

동해안의 9곳에 향목 1,500조를 묻었던 것이다.

 

<사천흥사리매향비(泗川興士里埋香碑) 보물 제614호>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였지만

민간에서는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는 바램이 끊어지지 않았고

이에 호응하였던 많은 사람은

주로 하층민과 노비층에서 매향 의식이 행해졌다.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에서 흉년과 질병 등으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미륵하생신앙은 그들의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Daum 백과)

 

<영암 엄길리 매향비 보불 제1309호>

현재까지 기록상으로는 18여 기의 매향비가 발견되었지만

남아 있는 매향비를 통해 볼 때 매향 주도 집단으로서

매향 발원자들을 결속시킨 조직체로는

보(寶) · 결계(結契) · 향도(香徒) 등이 있고,

이들은 승려보다는 일반 민중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향지의 민중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했던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들 매향비가 모두 14, 1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왜구의 침략이 많았던 해변 지역의 불안과

민심을 매향을 통하여 치유하려 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수효사의 침향은

비록 매향비는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발굴된 침향의 방사선 측정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 이전부터

매향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매향(埋香)은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을 만드는 것이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보다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게 되기 때문에

침향(沈香)이라고 하며, 오래된 것일수록 향이 짙다.

56억년 후 하생할 미륵신앙과도 일치한다.

침향은 불교 육공양물 중에서도 으뜸가는 향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매향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한

신앙 형태로,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즉,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그 나라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의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을 담고 있으며,

이와 같은 소원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이다.

 

발견된 매향비는 모두 바닷물이 유입하는 내만(內灣)이나

첩입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불가(佛家)에 전하고 있는 매향의 최적지가

산곡수(山谷水)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보물 제100호>

@침향(枕香)은 사향(麝香), 용현향(龍涎香)과 함께

'세계 3대향'으로 불리며, 이 중에서도

침향(枕香)은 최고로 여겨졌으며 또한 귀한 약재로도 이용되었다.

용연향(龍涎香)은 향유 수컷 고래가 대왕오징어 등을 먹고

소화하지 못해 토한 토사물이 원료이고,

사향(麝香)은 사향노루 수컷의 향낭에서

채취한 분비물을 건조한 것이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물 제93호 고려초기(11세기)>

매향의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처 가장 활발하게 성행되었다.

각처의 해안에 향나무를 묻고 비를 세웠다.

1662년 삼척 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에도

1309년 동해안의 지방관들이 이상사회를

미륵 부처님께 서원하며 2,500그루의 향나무를 동해안에 묻고

고성 사선봉에 매향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침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처럼 매향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침향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침향은

진도군 군내면 녹전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침향은 현재 완도 수효사 극락보전에

삼존불로 빚어 봉안되어 있다.

 

<완도군 고금도 수효사 극락보전 완도군 유형문화재 제22호>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埋香碑) 중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사천 매향비 비문

『우리는 그동안 미륵여래님이 이 세상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이루신다는 용화법회를

세 번이나 개최하였고, 지금 그러한 세계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이 향을 묻어 미륵여래님에게 봉헌하여 공양하고자 합니다.

미륵여래님의 청정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이 인생의 인고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아무도 이 땅에서 물러서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나갈 것임을 모든 사람들이 뜻을 합하여

대동발원(大同發源)합니다.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목숨을 다하여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며,

이 땅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당신께서 보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나시어서

이 약회(禴會) 위에 계시면서 당신의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르게 깨닫도록 하고 계십니다.

무궁하도록 임금님의 만세와 나라의 태평성대,

그리고 백성의 편안함을 비옵니다.

고려 우왕 13년(1387년) 정묘 8월 28일에 묻다.』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

2)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 (唐津 安國寺地 埋香岩刻)

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각문 크기는 높이 2.93m, 길이 13.35m, 폭 2.5m이다.

매향(埋香)이란 미래에 하생할 미륵불의 용화회에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는 신앙 활동이다.

연해의 지방민들이 매향을 행하고

이를 바위나 비석에 기록한 것이

매향 암각(岩刻)과 매향비(埋香碑)다.

당진의 안국사지 석조삼존불입상(보물 제100호) 뒤편에

배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다.

이 바위 전면의 양 측면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매향 사실이 음각되어 있다.

배바위 오른쪽에는

‘경술십월일 염솔서촌출포 □목향매치

(庚戌十月日 鹽率西村出浦 □木香埋置)’라는 명문이 있다.

 

배바위 왼쪽에는

‘경오이월일 여미북천구 포동제매향 일구 화주각선 결원향도

(庚午二月日 余美北天口 浦東際埋香 一丘 化主覺先 結願香徒)’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매향 암각문 중 경오년의 연대에 대해서는

고려 전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후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 전기로 보는 견해는 경오년을 970년(광종 21)

혹은 1030년(현종 21)으로 추정한다.

이에 반해 고려 후기로 보는 견해는

경오년을 1270년(원종 11), 1330(충혜왕 1),

1390년(공양왕 2) 중 하나로 상정하고 있다.

 

3)충남 당진리 신평면 군정리(지금은 간척지)에

바다를 바라보면 서 매향비와 돌 미륵이 서 있다.(세종10년. 1428년)

 

4)예산 효교리 매향비(충남 기념물 제155호)

일명 마되바위로 불림

고려 1043~1403경에 조성된 이 매향비는

자연석 큰돌에 구멍을 뚫어

매향을 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금은 간척지이지만

예적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다고 한다.

 

5)경남 삼천포 매향암각비 보물 제614호

고려 우왕13년(1387년)

승려 중심으로 불교신자 4,100명 향기를 맺고

나라의 평안함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매향의식을 하였다는 기록되어 있다.

비문<...千人과 한 마음으로 발원하여 沈香木을 묻고

미륵불이 下生한 수 베풀어지는

龍華三會에 침향으로 봉헌 공양하기를 원하오며....>

 

6)영암 엄길리 암각 매향비 보물 제1309호

고려 충목왕 원년(1344년) 조성

<古乙未(고을미) 북촌ㅇ을포(北村O 乙浦)에

彌陀契에서 龍華會에 공양할 침향을 묻었다>

 

7)해남 맹지리암각매향비

비문< 죽산현(竹山縣) 東村 좌구포(座具浦)에 향을 묻어 두었다.

彌陀香徒(미타향도) 上堂과 일백천인이 함께 발원하여

비문을 永樂4년(1406년 태종6년) 병술년 3월 23일에 비를 세운다>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보물 제406호 고려시대>

@<현재까지 알려진 전국 매향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성 삼일포 매향비 409년 비석.

(북한)강원도 고성군 삼일포, 현존하지 않음. 탁본만 남아 있음.

2. 영암정원명석비(靈巖貞元銘石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786년 비석. 전남 영암군 군서면

3. 팔금도 매향비 1002년 비석. 전남 신안군 팔금도. 실록에만 전함

4. 의주 야일포 매향비 1290~1350년 암각. 평북 의주 야일포. 현존하지 않음

5. 정주 매향비 1335년 비석. 평북 정주시 침향리. 현존하지 않음

6 영암엄길리암각매향명(靈巖奄吉里岩刻埋香銘) 보물 제1309호

1344년 암각. 전남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7. 영광법성 입암리매향비(靈光法聖笠巖里埋香碑)

시도기념물 제224호 1371년(홍무명) 비석, 전남 영광군 법성면 입암리

8. 사천흥사리매향비(泗川興士里埋香碑) 보물 제614호

1397년 비석.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9. 예산효교리매향비(禮山孝橋里埋香碑)

시도기념물 제155호 1403년 암각. 충남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

10. 당진안국사지매향암각(唐津安國寺地埋香岩刻) 시도기념물 제163호970년. 경술명/경오면 암각.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11.신안암태도송곡리매향비(新安巖泰島松谷里埋香碑)

시도기념물 제223호 1405년 비석. 전남 신안군 암태면 송곡리

12. 해남맹진리암각매향비(海南孟津里巖刻埋香碑)

시도기념물 제137호 1406년 암각. 전남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13. 삼천포매향암각(三千浦埋香岩刻)

시도유형문화재 제288호. 1418년 암각. 경남 사천시 향촌동(사천 향촌동 암각매향비)

14. 홍성 어서리 매향비. 1418년. 충남 홍성군 서부면 어서리[인천시립박물관 수장 중]

15. 영암채 지리매향비(靈岩採芝里埋香碑)

문화재자료 제189호 1430년 비석. 전남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16. 장흥 덕암리암각매향명(長興德巖里巖刻埋香銘)

문화재자료 제252호. 1436년 암각. 전남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

17. 신안 고란리 매향비 1457년 비석. 전남 신안군 도초면 고란리

18. 무안 남촌매향비 1584년

전남 무안군 일로읍 남촌(혹은 무안읍 성남리)[경상북도 성주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