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망해사
2022. 9. 13. 20:46ㆍ국내 명산과 사찰
변산 월명암을 탐방하고 김제 망해사로 향했다.
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 27km 지점에 있으며
새만금 동서도로를 따라 2~30여 분 달리다 보면
심포 어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 따라 올라가 고개 너머 왼쪽으로
큰길에서 약 500m 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서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보이는 곳에 있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고 한다.
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창건 내력은 이설이 있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1년 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그 후 중국 당(唐)나라 승 중도가 중창(重創)했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겨졌다고 한다.
다른 기록으로는 백제 의자왕 2년 642에 부설거사가 창건하고
경덕왕 13년 754년에 당(唐)나라 스님인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는 부설거사의 생몰(生沒)연대가 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뒤 1073년(문종 27) 심월(心月)스님이,
1371년(공민왕 20) 지각(智覺)스님이 중창한 이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 선조 22년 1589년에
진묵조사가 낙서전을 짓고 불당을 모셨다고 하며
1624년(인조 2) 다시 낙서전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보아 1589년 이전에 망해사는 폐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624년(인조 2) 조사 진묵(震默)이 중창한 후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
그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그 뒤 승려 관준(寬俊, 1850∼1919)이 다시 중창하고 수도하였으며,
1915년 계산(桂山)이 중창하였다.
1933년 주지 김정희(金整禧)가 본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 등을 신축하였다.
1977년 남파(南坡)가 요사와 망해대(望海臺)를 새로 짓고
보광명전·낙서전·칠성각 등을 복원 중수하였다.
1984년에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대웅전(현 극락전)을 새로 지었다.
1986년에는 낙서전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는 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1년에는 대웅전(현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1989년에는 요사인 청조헌(聽潮軒)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이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배롱나무까지 심어 경관을 더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채로 사용되는 청조헌(聽潮軒), 낙서전(樂西殿)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4기의 석비가 있다.
(자료출처: 다음 백과)
<부설거사>
거사불교(居士佛敎)의 효시(嚆矢)를 말한다면
인도의 유마거사가 단연 으뜸이고, 중국의 방거사도 널리 회자하는 거사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필거사와 부설거사를 꼽지만,
윤필거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와 함께
관악산 삼막사에서 함께 수행한 분으로
야사에만 전할 뿐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부설거사는 삼국시대 김제에서 활동한 승려로
성은 진(陳)씨, 속명(俗名)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이다.
부설(浮雪)은 그의 법명이다.
부설은 그 후 도반인 영희(靈熙)·영조(靈照)와 함께 지리산과
천관산(天冠山)·능가산(楞伽山) 두류산 등에서 10여 년을 수행한 후에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순례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중,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 이르러 구무원(仇無寃)이라는
불교신자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구무원에게는
나이 20세의 묘화(妙花)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말을 못 하는 벙어리였다.
이러한 묘화가 부설을 보더니 갑자기 말문이 터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묘화부인과 부부의 인연을 짓게 되었다고 전한다.
(본방 변산 월명암 참조)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5년을 단란하게 살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부인에게 맡기고
초심으로 돌아가 백강 변에 초가를 짓고 참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망해사(望海寺)이다.
이 망해사를 비롯하여 부설거사가 지었다는 4개의 사찰이 있다.
딸 월명(月明)의 이름을 딴 변산 월명암,
아들 등운(登雲)의 이름을 딴 계룡산 등운암,
그리고 문경 사불산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妙寂庵)이 있다.
위 4개의 사찰 모두 근세에 중건된 것으로
세계불교 3대 거사로 칭송되는 부설거사의 본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니
그의 시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부설거사에 관련한 본방 계룡산 등운암, 한국거사불교의 효시 부설거사 이야기 참조)
@부설거사 사허부구게(浮雪居士 四虛浮漚偈)
妻子眷屬森加竹 거느린 처자권속 삼대 밭 같고
金銀玉帛積似耶 쌓여진 금은옥백 산더미 같아도
臨終獨自孤魂逝 임종에 당하여 외로운 혼만 떠나가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朝朝役役紅廛路 날마다 힘들여서 살아온 세상 길에
爵位纔高已白頭 벼슬길 올랐어도 머리는 백발이라
閻王不怕佩金魚 염왕은 벼슬과 영화를 두려워 않거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錦心繡口風雷舌 재주가 뛰어나서 말로는 요설변재
千首詩輕萬戶候 천 글귀 시를 지어 만호후를 경멸해도
增長多生人我本 다생겁의 아만의 근본만 늘게 하나니
思量也是處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요,
假使說法如雲雨 설령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 하여
感得天花石點頭 하늘 꽃 감동하고 돌멩이 끄덕여도
乾慧未能免生死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思量也是虛浮漚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로다.
입구 좌측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좌측으로부터 만화당(萬花堂: 1850~1910), 심월당(心月堂),
청심당(淸心堂), 덕유당(德有堂)의 부도라 하는데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고 다만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때로 추측된다.
요사채
망해사의 요사채인 이 건물은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나는 파도 소리를 듣는 정자라는 뜻으로 <청조헌(聽潮軒)>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가람이라는 뜻으로 <망해사(望海寺)>이다.
수각 위에 삼성각이 조성되어 있는데
삼성각은 문이 닫혀 있어 법당을 참배할 수가 없었다.
삼성각에서 바라 본 극락전과 범음각
극락전
1991년 중수된 이 건물은 극락전으로 전면3칸, 측면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보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고 있고
법당 우측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좌측에는 진묵대사의 영정과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삼존불은 옛 낙서전에 봉안되었던 것을
중수하면서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망해사의 요청으로 법당 내 사진은 연꽃으로 대신 했다.)
진묵(震黙,1562~1633) 조사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黙)이다.
조선 중기 명종 17년(1562)에 태어나
인조 11년(1633)에 입적한 고승으로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 나옹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불 후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조선시대의 고승이다.
대사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佛居村)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 동안 시들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들
“세상에 드문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수군댔다고 하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마늘 등의 훈채(葷菜)와
비린 음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천성적으로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워(性慧心慈)
주위에서는 “불거촌에서 부처님이 나셨다”라고
말들을 하였다고 전한다.
대사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에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西方山)에 있는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한 후
주로 완주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선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불경을 연구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그의 법통을 이은 종통(宗統)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의 신비스러운 기행은 1850년 초의선사가 짓고
전주 봉서사에서 간행한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考)」에
18편이 전해지고 있다. 진묵조사는 불교 관계의 학문뿐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72세의 나이로 입적한 진묵대사의 영정은
월명암 관음전과 부산 범어사 승보박물관에도 있다.
범어사의 보관된 영정은 3폭을 연결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제작한
액자 형식인데 「월파당 진묵 대사 영정(月波堂震默大師影幀)」으로
화기에 명기되어 있다. 3기의 영정을 비교해 보면
조성한 시대가 달라서인지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진묵대사는 언젠가 이런 게송(偈頌)을 읊은 적이 있다.
하늘 덮고 산을 베고 땅 위에 누웠다가
구름 병풍에 달빛 등불 삼아 바닷술을 마신다
맘 끝 취하여 비틀비틀 춤추려다
어허! 소매가 길어 곤륜산에 걸리겠네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掛袖掛崑崙
극락전 아래에 낙서전이고 낙서전 마당에는
두 그루의 팽나무가 조성되어 있다.
낙서전(樂西殿)
부처님을 모시고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즐거워한다는
김제 망해사 낙서전(金堤 望海寺 樂西殿)은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선조 22년(1589)에 진묵스님이 처음 지은 것으로,
1933년과 1977년에 고쳐 지었다.
망해사는 만경강 진봉산 기슭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부설거사가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의 절은 땅이 무너져 바다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이 낙서전은 평면이 〈ᄀ〉 자형으로,
건물 한쪽에는 마루를 놓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을 걸었다.
다른 칸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건물이 법당 겸 스님의 거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양이 불규칙한 나무로 기둥으로 세워 자연미를 짙게 풍긴다.
낙서전 뜨락에는 진묵대사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있다.
팽나무
낙서전 전면에 서 있는 두 그루의 팽나무는
선조 22년(1589년)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구전된다.
망해사의 이 팽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 추정되며,
2001년 12월 27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범음각
망해사의 범종각의 편액은 범음각(梵音閣)이다.
우리나라 4대 관음도량인 동해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 남해 금산 보리암이 모두 바다에 있다.
법화경이나 능엄경에는 소리로 관하는 4가지 관음 수행방법이 있다.
범음(梵音), 묘음(妙音), 관음(觀音), 해조음(海潮音)이다.
망해사의 범종각을 범음각이라 명명한 것은
관행 수행법의 하나인 해조음을 들으라는 의미가 아닐까?
망해사의 낙서전, 범음각, 석탑
그리고 바다와 배롱나무가 어우러져 묘한 절경을 이룬다.
범음각과 마당의 노거수 사이에 배롱나무와
오층석탑이 조성되어 있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오층석탑 옆 한 그루의 배롱나무,
조금 철이 지났지만 붉게 핀 배롱나무꽃이 망해사의 운치를 더한다.
배롱나무꽃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서원의 뜨락에 많이 심는다.
사찰에 심는 이유는 배롱나무가 껍질을 벗고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출가한 스님들은 속세의 욕망과
번뇌라는 묵은 습(習)의 때를 벗어 버리고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라는 뜻이며,
서원에 심은 이유는 배롱나무를
꼿꼿한 선비의 지조와 강직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뜨락의 백일홍을 바라보면서
‘떠나간 벗을 그리워한다’라는 꽃말과 같이
정다웠던 옛벗과 추억을 되새긴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배롱나무는 남부지역에서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묘소 주변에 흔히 심기도 하지만.
배롱나무는 봄이 되면 허물 같은 투박한 껍질을 스스로 벗겨내고
원숭이가 미끄러질 만큼 깨끗한 나무껍질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선홍색 선명한 꽃을 피운다.
배롱나무의 특성은 불성( 佛性)을 깨우쳐
일절 세속의 번뇌를 벗겨내고 선정(禪定)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
스님들에게도 딱 맞는 수양의 방편이었기에
우리나라 대부분 유서 깊은 사찰에서는
배롱나무를 심어논 것이다.
배롱나무는 꽃 하나하나가 이어달리기로 피기 때문에
100일 동안 피는 꽃이라 하여 백일홍이라 불리기도 한다.
배롱나무꽃은 아래서부터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꽃이 피어 올라간다.
대부분 꽃은 꽃대마다 거의 동시에 피는 경향이 있으나
배롱나무꽃은 아래서부터 위까지 꽃이 피는 데 몇 달이 걸린다.
그래서 백일홍이란 이름도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연속된 과정이 스님들이 끊임없이 낮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수행 정진하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꽃잎은 6~7장이고 모두 오글쪼글 주름이 잡혀 있다.
주름 꽃잎은 배롱나무만의 특징이다.
이는 시절 인연을 만나 한 소식했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진묵(震黙)대사는 술을 무척 좋아하였으나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酒)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는데“그대가 거르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묵은 아무 말 않고 물러갔다가 다시 가서 같은 질문을 했으나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진묵은 열쩍어 되돌아갔다가 또 가서 물었으나
그가 끝내 “술을 거른다”라는 대답을 되풀이하자
드디어 실망하고 돌아가 버렸다.
잠시 뒤 금강역사(金鋼力士)가 나타나
술 거르던 스님을 혼줄냈다고 한다.
망해사는 여느 사찰과 다르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찰이다.
새만금공사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서해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였다.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붉디 붉은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진 이런 풍광이라면
어찌 아둔한 과객인들 곡차 한잔 생각나지 않겠는가?
옛적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이 배롱나무꽃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우며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서로 백일 동안 바라보니
對爾好衡盃(대이호형배) 너와 마주하여 즐거이 술잔 기울이노라.
요사채 앞 마당의 이 노거수는 낙서전 앞의 팽나무보다 더 우람하고,
수령 또한 더 오래된 것 같다.
전망대 가는 길
망해사를 나와 입구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풍광을 즐겨본다.
저 멀리 심포항과 묘한 구조물이 보이고
새만금사업으로 일구어진 아름다운 들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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