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내원암

2022. 8. 31. 21:25국내 명산과 사찰

 

수락산 내원암(內院庵)은 경기도 남양주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 소속이다.

〈봉선사본말사지〉에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창건주는 알려지지 않고 또한 창건 이후 기록도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사세가 번창한 절로 알려져 있다.

남양주에는 조선조의 왕릉이나 비빈(妃嬪)이나

고관대작의 제사를 지내는 원찰로 지정된 사찰이 많은데

내원암 역시 그중 하나에 속한다.

 

내원암은 1693년 숙종이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 스님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게 한 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태어났는데

영조를 얻은 이후로 조선왕실의 원당으로 기도처가 되었다고 한다.

내원암은 특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와의 인연이 깊은데

설화에 의하면 영조가 일찍 서거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왕손을 얻고자

대구 파계사에서 수도하던

용파화상(龍波和尙: 용파는 현응스님의 법명이며,

숙종은 현응이란 시호를 부여했다)을 내원암으로 불러드리고,

삼각산 금선사 농산화상(聾山和尙)과 함께

정조의 원자 잉태를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드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에 의하면 100일 기도가 끝나는 무렵

농산화상이 입적하여 원자로 환생하니 이 분이 순조임금이라는 것이다.

 

한국동란으로 소실되었지만 1790년(정조 14)에

드디어 네 번째 간택 후궁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자,

정조는 1794년 후사를 잇게 해준 내원암에 칠성각을 지어주고

광응전(光膺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정조 때 강원도 건봉사의 스님이 묘향산에 있던

십육 나한을 옮겨 내원암에 봉안하여 ‘성사(聖寺)’라고도 불렸는데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순조 31년(1831년)에는 왕명으로 중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내원암은 한국전쟁 때는 전소되었는데

1955년 칠성각을 시작으로 1968년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고

그 후 영산각과 미륵전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수락산은 인접한 불암산과 마찬가지로 바위가 많은 산이다.

내원암은 수락산 정상에서 하산길에 들리는 가람이지만

오르는 길은 수락산 공영주차장에서

청학동계곡을 따라 올라가게 되는데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돌계단이 많다.

청학동 계곡은 여름철에는 물놀이하는 피서객이 많아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주차공간을 찾기가 다소 힘들지만

조금 가파르지만 위로 올라가면

굽이마다 2~3대씩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조망해 본 은류폭포다.

비가 내린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폭포는 수량이 빈약하다.

수락산에는 옥류폭포, 금류폭포, 은류폭포가 유명하다.

 

(금류폭포 하류)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내원암 위쪽에 있는 금류폭포의 꼭대기 바위에는

‘金流洞天’이라는 큰 글씨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공조좌랑을 지낸 이하조의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에는

금류동천이라는 작명(作名)을 한 사람이 김시습으로 기록돼있다.

그러나 향토사가들은 남양주 유생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한다.

 

 

 

내원암을 오르는 길은 우회하는 길과

가파른 자연석으로 된 228개의 돌계단이 있다.

오를 때는 돌계단을 이용하고 하산할 때는 우회하는 길이 편하다.

 

 

 

 

 

내원암 경내는 옥개석만 남은 3층 석탑과

수령 200년가량 된 전나무 한 그루가 있고.

절 마당에는 높이 4m, 폭 8m가량의 큰 바위가 이끼에 덮여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향나무가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 요사채가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석조 미륵불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은 현재 보수 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내원암의 삼성보전은 대웅보전에서 5~6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3층석탑

탑신은 없고 옥개석만 남은 3층 석탑이다.

2층 옥개석 받침이 경미하게 보이나 마모가 심하다.

상륜부의 노반(?) 역시 마모가 심하다.

조성연대는 조선 후기로 추측된다.

 

대웅보전

전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이 건물은 내원암의 본당으로 1950년 한국동란으로 전소되었던 것을

1968년에 재건한 것이다. 법당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다.

초파일에는 괘불을 거는 모양인데 볼 수 없었다.

 

 

 

 

 

 

감로탱

 

 

미륵전

내원암의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는 미륵마애불은

한 돌에 거신광(擧身光)과 두광(頭光)을 조각한 입상(立像)이다.

 

문양은 마모가 심해 알 수 없고,

좌대 또한 멸실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갸름한 얼굴과 오뚝한 코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작은 입을 가지고 있다.

양쪽 귀는 보수된 것 같고, 코는 마모가 되어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부처의 코를 떼어 빻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코를 훼손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미륵마애불은 수락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조선 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할 때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 세웠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정확지 않은데

표현 형식으로 보아 조선조 초기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한다.

 

미륵전 앞에 조성된 향나무

 

 

 

 

삼성보전

대웅보전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법당에는 칠성과 독성, 산신을 봉안하고 있다.

칠성군을 좌우에 봉안해 놓은 것이 특이하다.

 

 

1794년 농산화상과 용파스님의 기도로 순조가 태어나자

이에 후사를 이어준 대가로 정조가 내원암에 칠성각을 지어주고

광응전(光膺殿)이라는 글을 하서(下書)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1851(철종 2년) 용암(庸庵)이

광응전(光膺殿)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소실된 전각의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

지금의 삼성보전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독성

산신

광응전은 칠성각을 의미하는 데 정릉 봉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 봉국사는 광응전에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함께

후토성모를 모시고 있다.

후토성모는 대지를 상징하는 토속여신인 지모신을 일컫는다.

 

내원암을 들리고 정상으로 올라가 본다.

 

수락산 약수터

수락산장은 정상 바로 아래 쪽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상은 변함이 없는데 

산을 오르는  나그네는 세월의 무게에 중압감이 더해짐을 느껴진다.

 

 

언제 보아도 정감이 가는 멋진 솔 이다.

 

두 마리 하마는 여전히 위세를 뽐내고 있다.

 

 

정상 아래 전망대쪽에서 바라 본 수락산 정상

참선하기 딱 좋은 바위다.

 

 

하산길은 내원암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내원암 오르는 돌계단을 다시 담아 본다.

 

 

무궁화도 피어있고..

 

계곡 틈 사이에 걸린 나무 구룻터기가 마치 돼지형상을 하고 있다.

수락산 돌다리는 보고 또 보아도 정감이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