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월명암(月明庵)
2022. 9. 4. 12:49ㆍ국내 명산과 사찰
변산 월명암은 한국 거사 불교의 효시로 일컫는
부설거사(浮雪居士)가 통일신라 시대
신문왕 11년(691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쌍선봉 아래에 창건한 암자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 소속이다.
월명암 사적기에 의하면 부설거사는 삼국시대
김제에서 활동한 승려로 성은 진(陳)씨, 속명(俗名)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이다. 부설(浮雪)은 그의 법명이다.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세계불교 3대 거사로서 그 欽慕와 尊崇을 함빡 받아오는
在家出家人으로서 본래 경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국사의 圓淨스님에게서 得度를 하고
靈熙, 靈照 두 道伴과 더불어 각처를 행각하며 도를 닦다가
이곳 변산에서 십 년 동안 수도하고 오대산을 찾아가던 도중
만경현(萬頃縣) 백운지(白雲池)(김제시 성덕리 고현리)
청신도 구무원(仇無冤) 씨 집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의 여장을 풀었는데 仇씨의 무남독녀 妙華는
방년 18세의 벙어리였으나 부설거사를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려 스님과 三生緣分이 있다 하여
죽기를 한하고 부부의 結緣을 원함으로
부설스님은 생명을 중히 여겨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登雲과 月明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시 이곳 변산을 찾아와
각기 한 칸의 토굴을 짓고 도를 닦아 모두 成道하였고
부설거사는 열반 뒤에 많은 사리가 나와
여기에 사리 부도를 안치하고
묘화부인은 110세를 살며 갖은 異蹟의 도를 발휘하였으며
登雲은 계룡산으로 가서 연천봉 아래 등운암을 짓고
선풍을 드날렸고,
月明은 이 자리에서 肉身登空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곳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성취한 자리이고
그 후에 많은 스님이 도를 깨치었다 하여
회자하게 된 암자이다
현재 주요 당우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조성되어 있고
선방으로 사성선원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1992년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된
월명암의 초창자인 부설거사(浮雪居士) 일가의
성도담(成道譚)을
승전형식(僧傳形式)으로 소설화한 부설전(浮雪傳)이 있다.
월명암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지만,
최첨단거리는 남여치 주자창에서 오르는 길이다.
거리는 1.9km로 짧지만, 월명암까지 계속되는
된비알이라 조금 힘든 산행이다.
월명암 사력(寺歷)은 월명암(月明庵) 사적기(事績記)로 대신한다.
계속된 된비알 언덕길을 오르면 중간 지점에 쉼터가 있다.
이 곳이 남여치와 월명암까지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쉼터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이런 안내판이 보인다.
법구경을 인용한 글인데 힘든 고갯길
잠시 눈팔매짓이나 하고 가라는 의미인가.
월명암 가는 길은 볼만한 뷰가 없어 지루한 것은 사실이다.
다시 지루한 고갯길이 이어진다.
불갑사나 두륜산 대흥사에서 붉은 상사화를 여러 번 보았지만,
노랑 상사화는 여기서 처음 본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는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는 꽃이다.
상사화는 꽃을 피우지만, 열매는 맺지 못한다.
제주도 남쪽을 물론 이곳 변산반도 둘레길에는
흰상사화도 있다는데,
글쎄. 꽃말은 묘하게도 기대, 순수한 사랑이다.
@월명암 事績記
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산96-1
본 명월암은 변산산맥의 서단
변산반도 능가산 法王峰에 자리 잡은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암자로 신라 神文王 11년에
부설거사께서 창건한바 그 후 많은 세월의 風磨雨洗(풍마우세)로
수차의 重修를 거처 현금 제6創에 이르러 이어오고 있다.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세계불교 3대 거사로서 그 欽慕와 尊崇을 함빡 받아오는
在家出家人으로서 본래 경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국사의 圓淨스님에게서 得度를 하고
靈熙, 靈照 두 道伴과 더불어 각처를 행각하며 도를 닦다가
이곳 변산에서 십 년 동안 수도하고 오대산을 찾아가던 도중
만경현(萬頃縣) 백운지(白雲池)(김제군 성덕리 고현리)
청신도 구무원(仇無冤) 씨 집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의 여장을 풀었는데 仇씨의 무남독녀 妙華는
방년 18세의 벙어리였으나 부설거사를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려 스님과 三生緣分이 있다 하여
죽기를 한하고 부부의 結緣을 원함으로
부설스님은 생명을 중히 여겨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登雲과 月明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시 이곳 변산을 찾아와
각기 한 칸의 토굴을 짓고 도를 닦아 모두 成道하였고
부설거사는 열반 뒤에 많은 사리가 나와
여기에 사리 부도를 안치하고
묘화부인은 110세를 살며 갖은 異蹟의 도를 발휘하였으며
登雲은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렸고,
月明은 이 자리에서 肉身登空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이곳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성취한 자리이고
그 후에 많은 스님이 도를 깨치었다 하여
전국에서 제일가는 수도도량으로 그 이름이 사해에 떨치고 있다.
신라 때 의상대사께서 주석하시었으며,
이조 宣祖 때 震黙大師(진묵대사)께서 17년 동안이나 修禪하시었고,
哲宗 때 性庵조사께서 三創을 하여 팔부대중을 堤接하시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行菴스님, 鶴鳴스님, 龍城스님, 西翁스님,
古巖스님, 海眼스님, 呑虛스님, 香峰스님, 月印스님 등
많은 高僧大德이 출현하시어 住錫堤接하신 곳이다.
그러나 비극적인 625동란으로 인하여
본 월명사찰은 전소되고
호남 제일 성지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월인스님이 수년간
苦心慘憺(고심참단)의 원력으로 인하여
전후의 혼란과 기근 속에서
근근이 본당과 요사채 일동을 修築하였는데
三十餘星霜의 노후로 도괴 직전의 형편에 놓여
누구 하나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을
현주지 宗興스님의 연비소신의 대원력으로
본당 건물은 물론 요사채도 다시 늘려 증축하였고,
이어 四聖禪院, 妙寂庵, 雲海堂, 東淨, 西淨우물,
기타 부속건물을 修築하여 놓으니 자연히 면목이 일신하였다.
그리고 또 이곳 월명암은 그 풍광으로도
천하제일의 둥두렸한 月出과 茫茫한 七仙바다의 찬란한 日沒과
무릉도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아침의 雲海, 水太極, 山太極의 玉筍(옥순)과 같은
群峯(군봉)들이 과연 해동 제일의 선경 강산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부설거사의 예언으로
이곳 월명암에서 四聖은 부설거사의 가족으로 나타났고,
八賢 중 성암, 행암, 학명스님의 삼현 이미 나오셨고
앞으로 五賢과 12法師가 나오실 것이라 한다.
연혁표:
불기 1035년 제1創主 浮雪거사
불기1396년 제2창주 震黙대사
불기 2207년 제3창주 性庵대사
불기 2259년 제4창주 鶴鳴선사
불기 2299년 제5창주 月印선사
불기 2325년 제6창주 宗興화상
대웅전은 관음전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대웅전은 월명암의 본당이다.
수미단에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가부좌한 석가모니불 협시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벽에는 칠성탱, 산신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문수화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칠성탱
산신탱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
대웅전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변산에서는 회자하는 가람이지만
오르기가 힘든 코스인데도 많은 등산객들이 삼삼오오로 올라온다.
주로 등산객이라 법당에 참배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관음전은 대웅전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대개 부드럽고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는데
월명암의 관음보살은 방원형의 얼굴에
근엄한 모습을 띤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진목대사의 영정과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고,
부설거사의 열반송이 일원상과 함께 걸려 있다.
진묵대사의 영정
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黙)으로,
만경(萬頃)의 불거촌(佛居村) 사람이다.
불거촌은 요즘의 전북 김제시 만경면 대진리(大津里)이다.
어머니는 조의(調意)씨라 하니, 이는 아마 성(姓)이 아니고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진묵[1562~1633]은 조선 인조 때의 승려로
72세의 나이로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범어사 승보박물관에 3폭을 연결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제작한 액자 형식의
「월파당 진묵 대사 영정(月波堂震默大師影幀)」 이 있는데
월명암의 이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화면 중앙에 좌측을 향하여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에는 염주를, 왼손에는 주장자를 쥐고 있는데
완주 봉서사 등 사찰에 봉안된 영장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목각에 금니를 입힌 신중탱이다.
부설거사의 열반송을 적어놓고 중앙에 일원상을 그려 놓았다.
심신명의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란 글귀가 연상된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건물인데 편액이 걸려있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대둔사 태고사와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상무쟁처로 알려진 월명암은
이름 그대로 적정처로서는 일품이다.
사성선원은 부설거사의 가족 모두가 득도한 것을 기리는 선방인 모양이다.
사성선원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관음전의 뒤 모습이다.
<ㄱ>모양의 이 건물은 월상전이다.
뒤편 봉우리가 법왕봉인 모양이다. 아래로 내려가 본다.
월상원(越像園) 은 <ㄱ>자 건물로 입구에는 지고 있는 배롱나무와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동백나무가 보인다.
마당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화사하다.
꽃에 대해서는 무뢰한이라 검색해 보았더니
현호색꽃이라고 하는데 다시 검색해 보니 많이 다르다.
월상전 앞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만개해 있고
좌측에는 아직 지지 않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부설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월명은 오빠 등운과 함께 발심하여 수도하고 있을 때
월명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불목한이
월명에게 정을 품고 접근하였다.
불목한은 절에서 밥 짓고 땔나무하고
물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월명은 그 불목한의 간절한 요구를 물리쳐야 할 것인가 말 가를
오빠 등운과 의논하였다. 등운은 부목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이라면
수행하는 자로서 한 번쯤 허락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오빠의 말대로 한번 그의 수락을 들어주자 연이어 요청했다.
더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여긴 월명은
오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등운은 월명에게 너의 기분은 어떤 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월명은 처음에는 허공에 대고 장대를 휘두르는 것 같았고,
두 번째는 진흙탕에서 장대를 휘젓는 것 같았고
세 번째는 굳은 땅에 장대가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둥운은 더 놓아둘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다음날 월명은 불목한에게 아궁이에 깊숙이 불을 지피라고 주문하자
불목한은 허리를 구부려 아궁이 속으로 깊이 장작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던 월명은 구부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불목한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버렸다. 불목한은 아궁이 불길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생화장 되었다.
살생은 승단에서는 최고의 법인 바라이법이 적용된다.
승단에서 축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생의 업보는 무간지옥이다.
그것도 중생이 아니 수행자가 살생했으니
더 심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수행자인 등운과 월명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해탈뿐이다.
득도해야만 생사의 과보를 벗어날 수가 있다.
등운과 월명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하는 심정으로
오로지 수도에 몰입했다. 그 결과 마침내 득도했다.
한편 생화장 당해 저승으로 떨어진 불목한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염라대왕에게 하소연했다.
염라대왕은 등운과 월명을 잡아 오라고 저승사자를 내려보냈다.
저승사자를 맞은 월명은
“나를 잡으려면 모래로 밧줄을 꼬아서 해를 묶어오라.
그럴 재주가 없다면 나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 소리를 들은 염라대왕은 이미 등운과 월명이 득도하여
해탈의 경지에 들었음을 알고 돌아섰다고 한다.
@위에 인용된 부설전(浮雪傳)은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책. 한문필사본으로 변산 월명암(月明庵) 소장본이
현재로서는 유일본이다. 월명암의 초창자인
부설거사(浮雪居士) 일가의 성도담(成道譚)을
승전형식(僧傳形式)으로 소설화한 것이다.
내용
신라 진덕여왕 즉위 초 왕도(王都) 때
진광세(陳光世)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영리하고 비범하였다. 다섯 살에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의 제자가 되어
일곱 살에 이미 법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법명을 부설, 자를 의상(宜祥)이라 하였다.
구도 생활에 전념한 끝에 능가(楞迦 : 지금의 변산) 법왕봉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영조(靈照)·영희(靈熙) 등과
함께 수도에 힘썼다.
그런 뒤 세 사람은 문수도량인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도중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怨)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법문을 가르쳤다. 주인에게 묘화(妙花)라는 딸이 있었는데,
부설의 설법을 듣고는 죽기를 한하고 그와 평생을 같이 하려 하였다.
출가한 몸인 부설로서는 애욕에 미혹될 처지는 아니었으나,
자비 보살의 정신으로 묘화와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되었다.
두 벗은 부설을 남겨두고 오대산으로 떠났다.
세속에 머물러 수도하는 15년 동안 부설은
등운(登雲)·월명(月明) 남매를 두었다.
두 자녀를 부인에게 맡기고 자기를 병부(病夫)라 일컫고는
수도에 전념하여 5년 만에 크게 깨쳤다.
옛 벗 영조·영희가 오랜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아왔다.
세 사람은 서로 공부의 성숙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물병 세 개를 달아놓고 각자 하나씩 쳤다.
두 벗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흘러내렸으나
부설의 병은 깨졌는지만 물은 그대로 공중에 달려 있었다.
속세에 머물러 수도한 부설의 깨달음이
출가수도한 두 벗을 앞질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부설은 선악(仙樂)이 울리는 가운데 입적하였다.
두 자녀도 수도하여 열반하였고,
아내 묘화는 110세를 누렸다.
산문의 석덕(碩德 : 덕이 높은 중)들은 두 자녀의 이름으로
암자를 지었고, 지금까지 등운암과 월명암으로 불려온다.
「부설전」은 단순한 재가성도담(在家成道譚)이 아니라
대승적 보살사상의 구현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불교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롱나무는 다른 말로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꽃이 100일 동안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줄기를 만지면 모든 가지가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린다.
남부지역에서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묘소 주변에 흔히 심는다.
월명암에는 유달리 배롱나무가 많다.
조금 철이 지났지만 붉은 꽃이 매혹적이다.
꽃말은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배롱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으면 3년 동안
하얀 꽃이 핀다는 속설도 있어 그리움이라고도 한다.
흰 꽃이 피는 흰배롱나무도 있다고 하며
배롱나무는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며, 빨리 성장하고
가지를 많이 만들어 쉽게 키울 수 있지만,
내한성이 약해 주로 충청남도 이남에서 자란다고 한다.
변산의 힘찬 봉우리들이 배롱꽃 넘어 아련히 보인다.
좌측은 기상봉, 그 옆봉은 쇠뿔바위봉이라고 하던가..
월명암이란 편액이 붙어 있고
옆쪽에는 만선각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이 건물은
요사채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건물 앞에는 열정각이란 수각이 있지만 말라 있었다.
요사채 옆에 면선각이란 편액이 붙여 있다.
열정각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이 건물은 수각인 모양이다.
기상대가 있어 기상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다. 그 옆 봉우리는 소뿔바위봉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있다. 줌으로 당겨 본다.
기상봉 아래의 암장 모습
우측 맨끝에 보이은 봉우리가 쇠뿔바위라 불리는 봉우리다.
줌으로 댕겨보니 멋지다.
다시 한번 절입구의 배롱나무의 꽃을 눈팔매짓 하며
남여치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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