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986호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

2022. 5. 2. 21:52문화재

 

충남 청양군 남양면 온암리 111-1에 있는

청양 운장암은 얕은 산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전각이라야 관음전과 요사채가 전부인 작은 규모의 사찰인데

이 사찰을 방문하게 된 것은  관음전에 봉안된

보물 제986호인 금동관음보살이 상투를 튼 모습을 보고자함이다.

 

보물 제986호로 지정된 청양 운장암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지정 당시는 철불로 알려 철조관음보살로 지정되었으나

근래의 조사에 의하여 철제가 아닌 금동제로 밝혀져

운장암 금동관음보살좌상으로 지정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이 보살상이 안치된 운장암에 대해서는

창건 연대는 물론 사력도 알 수 없고

이 금동보살상이 언제 조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동국여지승람』 「청양」 불우조에

운곡사(雲谷寺)라는 기록이 있어 이 운곡사(雲谷寺)와

운장암과 같은 절이 아닐까 추정할 수는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사찰의 주지 스님의 이야기로도 청양 운장암은

신라말 도선국사(827~898)가 이 절에서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나

고려 시대 말까지 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문헌이나 기록이 없으며

임진왜란(1592~1598)과 정유재란(1597~1598) 양란으로

전각과 요사채가 소실되어 그나마 남아 있을 법한

모든 기록조차 사라져 청양 운장암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운장암의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금동관음보살상의 복장품 중

관음중수발원문(觀音重修發願文)에 의하여

당시의 운장암의 상황과 관음보살상 조성의 한 단면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발원문에 의하면 앞의 두 전란이 일어난 후 방치되어 훼손된 것을

광해군 즉위 후 1년인 1609년 9월에 보수에 들어가

1610년 2월에 보수를 끝마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로써 유추한다면 운장암은 임란과 정유대란 이전에

이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靑陽雲藏庵金銅菩薩坐像)

건립 시기: 고려 후반기 14세기경

문화재 지정: 보물 제986호

 

운장암의 금동보살좌상은 원래 암자 앞 골짜기의 길가에 있던 것을

1900년경 암자를 중수하면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운장암 금동관음보살상은 결가부좌로 앉아

아미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手印) 짓고 있다.

 

 

머리는 머리칼을 감아 높이 올려 상투를 틀었는데

중간을 묶고 끝을 갈래지어 뒤로 약간 휘어지게 했다.

필자가 방문 시에 운장암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다른 자료들을 보면

화염무늬(불꽃무늬)의 보관을 쓰고 백색 가사를 입고 있다.

아마도  보관은 중수할 때의 올린 것으로 인다.

 

 

 

 운장암의 금동관음보살은

보수 전후 시점에 따라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재 봉안된 불상은 최근에 보수를 마친 것이고,

그 전의 사진(문화재청)은 보수 전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점은 상투의 관대와 보관과 백색으로 도색된 가사다.   

 

 

(사진출처: 문화재정)

 

(사진출처: 문화재청)
(펌)
(사진출처: 문화재청)

 

(사진출처: 운장암 금동관음보살상연구/문명대/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사진출처: 문화재청)
(사진출처: 문화재청)

 

(사진출처:운장암금동보살상 연구/문명대/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관음보살이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문제가 거론되기도 하는데

「법화경」, 「대아미타경」에서는 남성명사로 표현되어 있어

남성임은 분명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이론도 많이 있다.

티베트나 몽골 등에서는 관음보살의 배우자로 타라 여신 숭배 사상이 있어

관음보살이 남성임은 자명하지만,

 

 

중국에서는 불교의 관음보살이 중국의 민속신앙으로 추앙받는

모성신 낭낭(娘娘) 이란 여신과 동일시되어 여신으로 받들고 있고,

또 일본의 불교학자 이와모또(岩本裕) 씨의 학설에 따르면

이란의 水神인 인 동시에 풍요의 여신인 아니히타가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아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여신으로 집착되어 있었으므로

관음보살이 이 여신으로 불교화되었다고 주장 한다.

사실 관음보살상을 보면 대개 보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름다운 여성상으로 탱화나 불상으로 조성된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상투를 한 운장암의 이 금동관음보살상은

이런 불신을 소멸하는 데 큰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상의 도상을 보면 둥글고 단정한 얼굴에

눈·코·입이 단아하게 표현되어

고려 말기의 금동보살상들의 얼굴과 비슷한 편이다.

상체도 단정하고 자연스럽게 조성되었고

하체도 안정감을 주는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였다.

다소 두께를 느끼게 하는 대의를 입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자연스러운 양감을 느끼게 하며,

좀 더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살의 옷은 천의(天衣) 대신 당시에 유행하던

불상의 대의식(大衣式) 옷을 입었다.

일정한 두께 및 왼팔의 주름과 함께

고려 말부터 유행된 보살의(菩薩衣)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가슴과 하체 등에 장식한

무거운 영락(瓔珞) 장식, 군의의 띠 매듭,

왼쪽 가슴의 옷 매듭 장식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고려 후반기 14세기의 불보살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명대 박사의 <운장암 금동관음보살상 연구>*에 의하면

고려 후반기 14세기의 불상의 특징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운장암의 이  금동보살상이 대표적인 불상의 하나라고 한다.

 

 

첫째, 왼쪽 팔굽위의 Ω 형 주름이 선명하면서 크고

둘째, 승각기를 묶은 띠의 삼각형 금구(金具) 치레 장식이 있고

셋째, 군의(裙衣) 띠 매듭이 표현되었고,

넷째 왼쪽 무릎 아래로 내려와 삼각형 옷자락을 나타낸 점

다섯째, 화려한 목걸이 영락 장식과 무릎 등

전신 영락 장식이 표현된 점 등이다.

 

* <운장암 금동관음보살상 연구>

(문명대/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운장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펌)

이 보살상의 특징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상이나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790호)

영덕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3호) 등

14세기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양식의 보살상들과 친연성이 강하다.

특히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1호)이나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좌상 등과 비슷한

이른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보살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인용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문화재청)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