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829호 대전 계족산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022. 3. 17. 06:42문화재

 

 

옥천 석장산 구절사 탐방을 하고 귀경길에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대전 비래사를 들렸다.

구절사는 행정상으로는 옥천군에 속하지만,

탐방로의 들머리를 대전광역시 세천생태공원을 택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부터 비래사까지는 네비로

소요시간을 검색해보니 20여 분 거리다.

비래사에 관심을 가진 주된 이유는

조선 시대에 조성된 보물 제1829호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대개 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시대 내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이 많지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은 드물어서 호기심이 났다.

 

비래사(飛來寺)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계족산(鷄足山)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 말사에 속한다.

계족산(鷄足山)은 해발 423.6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지닌 산이다.

 

대전에는 옛날부터 대전 8경(大田八景)이 있었는데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 따르면 대전팔경 제1경에

계족소우(鷄足疎雨·계족산에 성근 비)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제1경이 바로 계족산이다.

계족산의 옛 이름은 봉황산(鳳凰山)이었다 한다.

그런데 중요하거나 귀한 이름은 감춰 부른다는 뜻에서

조선 시대 송씨 문중에서 보배로운 이름은 감추어야 한다며

스스로 계족산이라 바꿔 부르도록 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또는 봉황산 아래에 정착한 송씨 가문에서

벼슬에 오른 인재들이 많이 나와 크게 이름을 떨치자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송씨 가문에 훼방을 놓기 위해

봉황산을 격하시켜 계족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고,

송촌(지금의 회덕 일원)에 지네가 들끓어 닭을 상징화함으로써

지네를 없애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에서 산의 형세가 닭의 다리와 흡사하다 해서

붙인 이름으로 이는 이미 <고려사> 회덕군편과

<세종실록지리지> 회덕현조에

계족산이라는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이 산은 옛날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하여

‘비수리’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계족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내용은

실록 회덕현조에

‘향운천한차산명즉필우(鄕云天旱此山鳴則必雨)’

라는 기록으로 전해진다.

 

이 산에는 고찰이 비래사 한 곳뿐이다.

절 입구에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인 옥류각(玉溜閣)이 있다.

비래사는 고승(高僧)이 세운 정통 고찰(古刹)이 아니라

원래 계족산 계곡에 비래암(飛來庵)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는 은진 송씨 문중에서 후손들이

강학소의 목적으로 새운 서당으로

후일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찰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1647년 인조 17년에 중수되었고,

2017년 1월 19일 전통사찰 보존법에 의거

대전광역시장이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있다.

 

계족산은 산책할 수 있는 등산로와 오솔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은 즐겨 찾는 곳이기는 하지만

비래사로 오르는 도로는 포장은 되어 있지만,

폭이 좁은 외길이라 승용차로 접근하기로는 주차장 등 어려움이 많다.

 

 

 

 

옥류각(玉溜閣)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선생을 기리기 위해

1693년(숙종19)에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1630~1709)이

세운 누각(樓閣)이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년 ~ 1672년) 선생은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유학자, 성리학자, 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송준길은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는데,

특히 같은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당대의 많은 비갈문(碑碣文)을 짓고 썼다.

그는 이이(李珥) 이후 김장생·김집 등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초년에는 율곡계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를 익혔고,

뒤에는 영남학파 학자였던 장인 정경세를 통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뿐 아니라 글씨까지 수용하였다.

그의 서첩(書帖) 「송준길 행초 동춘당필적(宋浚吉 行草 同春堂筆跡)」은

보물 제167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준길 선생의 옥류각 관련 시

좋은 벗 인연 따라 찾아 왔기에

지팡이 짚고 함께 대에 오르니

층암에는 옥 같은 맑은 물 흘러내리고

장맛비는 푸른 이끼 씻어 내었네

부드러운 담론 속에 정 더욱 깊어지고

소리 높여서 시 읊으니 기상 우레와 같네

하늘의 운행에는 돌아옴이 있느니

칠일에 다시 벗이 찾아오리라

(「동춘당집」 권24, 시, 비래암시에 차운)

 

良友隨緣至(양유수연지) 扶笻共上臺(부공공상대)

層巖飛玉留(층암비옥류) 積雨洗蒼苔(적우세창태)

語軟情如漆(어연정여칠) 吟高氣若雷(음고기약래)

天行元有復(천행원유복) 七日更朋來(칠일갱붕래)

(「同春堂集」 卷24 次金沃川 壽昌飛來岩韻)

 

 

 

대적광전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수미단에는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범어로

마하바이로짜나(Mahāvairocana)이다.

그 의미는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라는 의미다.

 

불교의 불신설 중 삼신(三身) 교리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불신관(佛身觀)인데,

일반적인 대승불교에서는 법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

공덕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이나 약사불,

현세에 실체로 나타난 것인 응신불(應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본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삼세(과거, 현재, 미래, 또는 전세ㆍ현세ㆍ내세)에 걸쳐서

항상 설법하고 있다고도 말하며,

또한 비로자나 부처님은 형상 또한 없으며

일체중생을 감싸 보호하시는 청정법신(淸靜法身)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화엄경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大田飛來寺木造毘盧遮那佛坐像)

시대: 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1829호

크기: 높이 83㎝, 무릎 폭 59㎝

제작 시기: 1650년

소장/전승: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골길 47-74, 비래사

 

비래사의 비로자나불좌상 바닥 면에 적힌 묵서(墨書)에

조성 사찰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650년(효종 1) 8월에 조각승 무염(無染), 성수(性修) 등이 제작한 후,

1861년 개금·중수기에 전라북도 완주 대둔산

안심사(安心寺) 심검당에 봉안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전라북도 지역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언제 안심사에서 대전 비래사로 이운(移運)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가 83㎝인 중형으로,

최근에 만든 대좌 위에 놓여 있다.

불상은 상체를 곧게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있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가 있고,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와 정수리에 윗부분이 둥글고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고,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목에는 완만한 곡선의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은 목에서 수직으로 내려와서

가슴에서 팔꿈치 방향으로 거의 90도로 꺾여 늘어지고,

나머지 대의 자락이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하반신에 늘어진 대의 자락은 배에서 오른쪽으로 몇 가닥이

완만하게 펼쳐지고, 가장 안쪽 옷단이 반원형을 이루면 짧게 늘어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 소매 자락은 연판형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을 수평으로 마무리하고

대각선으로 접혀 있다. 불상 뒷면의 대의(大衣) 처리는

목둘레에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검지를 치켜세우고,

오른손 검지를 왼손 검지가 지그시 누르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지권인을 좌권인(左拳印)이라고 하는 데

그 반대는 우권인이라 한다.

 

지권인(智拳印)이 상징하는 의미는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으로

보리인(菩提印), 각승인(覺勝印)이라고도 한다.

이 수인은 금강정경(金剛頂經)에 기초를 둔 것으로

주로 밀교계의 대일여래가 취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둘째손가락 윗부분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와 반대로 비래사의 목조비로자나불은 취하고 있다.

화엄의 교리에 따르면 바로 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결인은 중생과 부처님이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의 정통 수인은

우권인이 합당하지만, 좌권인을 한 비로자나불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조 비로자나불인

국보 제233-1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권인을 하고 있다.

 

#산청 내원사 소재 국보 제233-1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시대 766년 (혜공왕2년)에 조성.

 

불상의 조성 시기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바닥에는

묵서(墨書)로 1650년 8월에 화원(畵員) 무염(無染),

양사(養師) 성수(性修), 덕명(德明), 천유(天游), 수화(首畵) 경성(敬聖),

설엄(雪嚴) 등이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수화승으로 참여한 무염은 17세기 중반에 전국을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한 조각승으로, 해심(海心)과 도우(道祐) 등으로

이어지는 조각승 계보를 형성하였다.

 

(신중탱)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제작 시기, 조성자 등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조각승 무염이 만든 기년명 불상 중에 가장 미적 완성도가 높아

조선 후기 불교 조각사에서 기준작이 되는 작품이다.

특히 비로자나불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 많이 제작되지 않아

비로자나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성각

대적광적 좌측에 있는 삼성각 안에는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약사전

비래사의 약사전은 자그마한 자연 석굴 안에

석조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석굴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계족산 등로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최근에 조성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