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스러운 사찰 수원 봉녕사

2021. 12. 30. 00:30문화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도량인 수원 봉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정갈스러운 사찰이다. 1208년(희종 4)에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고

창성사(彰聖寺)라 하였다.

 

그 뒤 1400년대 초기에 봉덕사(奉德寺)라 개칭하였으며,

1469년(예종 1)에 혜각(慧覺)이 중수하고 봉녕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71년에는 비구니 묘전(妙典)이 좁은 도량을 확장하여

별당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선원(禪院)을 개원하였으며,

절 앞쪽으로 불량답(佛糧畓) 2,000여 평을 구입하였다.

 

1979년에는 묘엄(妙嚴)이 주지로 부임하여 승가학원(僧伽學院)을 열었고,

종각의 신축과 함께 대종(大鐘)을 주조하였으며,

2층의 대강당을 신축하여 현재까지 도제 양성의 중심도량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藥師殿), 선원, 강당, 종각, 용화각, 종무소(宗務所)·요사채 3동 등이 있다.

 

 

三日修心千載寶(삼일수심천재보)

百年貪物一朝塵(백년탐물일조진)

 

@삼일동안 마음을 깨끗이 닦은 공덕은 천년의 보배가 되지만

백 년 동안 물질을 탐내는 것은 하루아침의 티끌과도 같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 입구에 세워진 이 법어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서 인용된 것으로,

고려 후기 승려 원효·지눌·야운 등이 출가한 승려를 위하여 간행한 불교경전으로

현존본은 원효의『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지눌의『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야운의『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한 것이다.

 

 

 

 

 

연기탑

암반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 이런 유형은

지리산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과

 천태산 영국사 망봉탑(보물 제533호)을 으뜸으로 여긴다.

 

@지리산 법계사 삼층석탑 보물 제473호

@천태산 영국사 망봉탑 보물 제533호

 

(사진) 중앙에 우화궁, 좌측에 교회용상 우측에 금강계단이라는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3층 석탑 앞에 보살이 합장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같은 형식으로는

월정사 팔각구층탑과 보살(국보 제48호)과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석조보살(보물 제84호)이 있다.

탑의 형식으로는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을 모방한 것 같고,

보살은 월정사 팔각구층탑 앞의 보살과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보물 제84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월정사 팔각구층탑과 보살 국보 제48호 고려 중기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87호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 보물 제84호

 

불국사의 다보탑을 모방한 봉녕사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

향하당(세부묘엄박물관)

대적광전

대적광전 옆의 건물이 용화각이다.

 

용화각

사찰에서의 예불용 전각은 모시는 부처님에 따라 전각명이 결정된다.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은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하며

미륵불을 모신 전각은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殿) 등으로 부르지만

용화각(龍華閣)이란 전각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봉녕사를 독특하게도 용화전이 아닌 용화각이라는 전각명을 사용하고 있다.

 

전각(殿閣)이란 전당합각(殿堂闔閣)의 줄임말로

주로 한국의 전통 건축물을 지칭한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 전통 건축물은 위로부터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루(樓)-정(亭)의 8 품계로 나뉘었는데

사찰의 전각 또한 이 분류를 준용하고 있다. 그 사용 용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전(殿)은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집무실이나 부처님이나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근정전, 강령전, 교태전, 대웅전, 대성전이다.

2)당(堂)은 왕의 자녀 큰스님, 유생들의 공부방으로 자선당, 명륜당이 있다.

3)합(閤)은 왕족 중 서열이 높은 사람 또는 전,당의 부속건물을 말하며

4)각(閣)은 왕실 가족,정승,판서 집무실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까지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5)제(齊)는 고급관리,

6)헌(軒)은 공무용 건물,

7)루(樓)는 휴식용 2층 건물,

8)정(亭)은 휴식용 1층 건물에 붙인 이름이다.

 

@수원 봉녕사 석조삼존불(水原奉寧寺石造三尊佛)

시대: 고려 후기

문화재 지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불상 크기: 본존불(중앙) 높이 145cm, 우협시 높이 133cm, 좌협시 높이 137cm

재질: 화강암

 

수원 봉녕사의 용화각 내에 봉안된 석조삼존불의 본존불은

광배는 없고 대좌는 하대·중대·상대석을 갖추고 있다.

좌우 두 협시불은 하대만 있는 대좌 위에 입상(立像)하고 있다.

석조삼존불상은 1970년에 약사보전의 불단 아래에서 파불된 형태로 수습되었는데

1998년 용화각을 신축한 후 법당에 봉안하였다.

 

석조삼존불상 중 본존불은 방형(方形)의 상호로

나발이 표현된 매우 낮은 육계를 갖고 있다.

본존불의 이목구비는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있어

선명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불두는 방형(方形)으로

목은 짧고 삼도는 마모되어 알 수 없다.

희미하지만 양미간에 백호(白毫)의 흔적이 보이고

입은 코에 비례하여 작고, 긴 귀를 하고 있다.

목은 가슴 중앙에 남아있는 ‘V’자 형태의 조각을 통해 볼 때

통견의 법의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법(坐法)은 길상좌 형태로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손은 복부 위에,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다리와 신체의 폭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입체감은 떨어지는 편이다.

 

얼굴과 신체 등 조화롭지 못한 것은 고려 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좌대는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추고 있으며

상대는 하트모양의 앙련이, 중대는 무늬 없이 8각 원통형으로 가운데

기둥(탱주)이 조각되어 있고, 하대는 큰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좌협시 )

좌·우 협시불의 조각 수법은 본존불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본래부터 삼존불상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 협시불의 얼굴은 방형이며 정수리 부근이 인위적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본래는 보개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협시)

 

(우협시)

(우협시)

가사는 V자형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흐리지만 내려뜨리고 있다.

가사의 형태는 다리와 신체의 비례가 조화롭지 못하고

불균형이며 우전왕식 양식을 취하고 있다.
좌대는 우협시는 하대에 복련이 새겨져 있는데

좌협시는 마모가 심하여 알 수 없다.

 

봉녕사 석조삼존불상의 구체적인 조성 시기는

다른 불상과의 비교를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우선 석조삼존불상의 특징 중 하나는 양 협시불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즉 시각적으로는 불상인지 여래상인지 또는 제자상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방형의 얼굴상을 한 불상은 주로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충남 홍성 상하리미륵불(충남유형문화재 제87호)

@충북 증평 남하리 석조보살입상(충북유형문화재 제208호)

@경기 쌍미륵사 안성가솔리석불입상(경기유형문화재 제36호)

@파주 용암사 용미리마애이불병상(보물 제93호)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런 표현들은 고려 시대 지방화된 불상 양식에서 보이는 석조보살상들의 특징이다.

 

한편 본존불의 대좌를 통해서도 봉녕사 석조삼존불상의 조성 시기를 살필 수 있다.

본존불의 대좌는 조각 수법과 연화문의 배치, 앙련과 복련의 기울기 등에서

1355년(공민왕 4)경에 조성된 불갑사 각진국사 자운탑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봉녕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불교 조각의 전통은 몽골 침략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단절되고 쇠퇴하였다. 이러한 시대상이 반영된 듯,

고려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봉녕사 석조삼존불상의 조각 솜씨는

미숙하고 어색한 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석불의 조각 경향은

이후 조선 시대의 석조불상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 좌측 전각이 약사보전이다

 

 

<약사보전>

 

수원 봉녕사 불화(신중탱화·현왕탱화)(奉寧寺 佛畵(神衆幀畵·現王幀畵))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불화이다.

1994년 10월 29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신중탱

1891년 작. 2폭(신중탱화 1폭과 현왕탱화 1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신중탱화(神衆幀畫)는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제석과 범천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식이다.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아래쪽에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는데,

각 상들의 배열과 채색이 우수한 조화를 이룬다.

제석과 범천은 석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

위태천은 남쪽을 지키는 여덟 장군 중 하나로 역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으로 보아,

조선 고종 28년(1891) 화사 광조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단에는 제석과 범천이 연꽃 가지를 든 좌우가 바뀐 쌍둥이와 같은 모습으로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그 좌우로 공양물을 든 2천녀와 부채를 든 4 동자들이

귀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해와 달이 각각 표시된 원유관(遠遊冠)에 홀을 든 일궁천자와 월궁천자,

좌우 상단 끝편에 해와 달이 함께 표시된 원유관을 쓴

또 다른 천자가 배치되어 있다. 한 단에는 날개가 달린 투구를 쓴 위태천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 좌우로 무기를 들거나 합장을 하고 갑옷을 입은 6인의 신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은 제석·범천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V자형 구도를 이루며

그 좌우를 여러 신장이 에워싸고 있다.

 

제석과 범천의 얼굴 표정은 이목구비가 작고 얌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신장들의 표정은 웃음을 머금은 해학적이다.

채색은 군청색의 남용을 볼 수 있으며,

적색과 녹색은 두텁고 명도가 낮아 어두워 보인다.

군데군데 금색의 사용으로 어두운 화면을 더욱 화려하게 해 준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왕탱화(現王幀畫)

현왕(現王)이란 죽은 지 3일 만에 죽은 자를 심판하는 왕으로,

『석문의범(釋門儀範)』현왕청(現王請)에 의하면

현왕(現王)은 명부회주(冥府會主)인 보현왕여래(普現王如來)로서,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천왕(帝釋天王)⋅대륜성왕(大輪聖王)⋅전륜성왕(轉輪聖王)⋅사천왕(四天王)⋅선악동자(善惡童子)⋅ 판관(判官)⋅녹사(錄事)⋅감재직부사자(監齋直符使者) 등을

권속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또한『권공제반문(勸功諸般文)』등 의식집에는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사후 3일 만에 지내는

천도재(薦度齋)인 현왕제(現王齋)의 주존으로 등장한다.

 

현왕도(現王圖)의 일반적인 도상은 보통 일월관(日月冠)

또는 금강경(金剛經) 등 경책(經冊)이 얹힌 관을 쓴 현왕(現王)이

판관, 사자, 동자 등에 둘러싸여 심판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렸는데,

언뜻 보면 시왕도와 유사하지만 시왕도와 달리 지옥 장면이 묘사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봉녕사의 현왕도를 보면 경책(經冊)을 관(棺) 위가 아닌 판관이 들고 있다.

 

@사람이 죽은 후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을 중심으로

판관 및 지옥사자, 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구도는 현왕을 중심으로 좌우로 권속들이 에워싸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배경에 병풍이 보이나 여기에는 보이지 않고,

의자도 보이지 않고 책상만 보인다.

 

하단 책상 앞으로 두루마리를 펼치고 등을 지고 선 관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의 관리가 두루마리에 붓을 든 채 시립하고 있다.

상단 현왕의 좌우로는 각기 지물을 든 동자와 지옥사자가 있고,

홀을 든 판관이 시립하고 있다.

 

비교적 간단한 구성으로 현왕은 크게 묘사하고

기타 권속들은 작게 묘사하여 현왕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원유관 위에 얻은 서책으로 보아 염라대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사자도를 봉안하여 사후 세계를 심판한다.

대웅전과 같은 주 법당에는 지옥 장면을 표현되지 않은 현왕도가 봉안된다.

 

말하자면 지장보살과 시왕 대신에 사후 세계를 심판하는

염라대왕이 단독으로 봉안되어 그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봉녕사에서는 약사전이 주불전이므로 이곳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의 특징인 복잡하고 국산의 원색적인 군청색의 남용을 보여 주는 신중화는

화기에 의하면, ‘1881년(光緖 17, 辛卯年) 2월일

수원부(水原府) 광교산 봉녕사에 신중탱 일점을 봉안한다’라고 하며,

금어 비구 현조(現照)·수조(須照)가 그린 것이다

 

현왕탱화는 가로 131㎝, 세로 104㎝의 크기로, 역시 비단에 채색하였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재판을 하는 현왕과 그 무리들이 묘사되며,

시왕도(十王圖)와 거의 비슷한 배열을 하면서 지옥 장면만 생략한다.

이 그림 역시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판관·녹사 등을 배치하였는데,

약사전에 함께 걸려 있는 다른 탱화들과는 구도나 채색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화폭 아래쪽의 기록을 통해

고종 15년(1878) 화사 완선이 제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