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사곡리마애여래입상(鎭川沙谷里磨崖如來立像)

2021. 12. 12. 12:45문화재

 

사곡리마애여래입상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여래입상을 이은 고려 초기 대형 마애불이다.

우리나라의 대형 마애불은 주로 고려 시대에 조성되었는데

사곡리마애여래입상 또한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사곡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옛 김덕숭의 효자각과 더불어

그를 기리는 옛 백원서원 자리에 백원재가 자리하고 있다.

마애불 가는 길은 백원재 좌측 언덕길 따라 오른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찾아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이곳 출신인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이

화랑 시절에 칼로 잘라내었다는 斷石이 있고,

조금 더 오르면 김유신 장군이 수련했다는

장수굴 좌측 바위에 마애불이 부조되어 있다

 

 

 

저멀리 효자각이 보이고 마애불 가는 길은 이정표가 보이는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단석이 나온다.

단석은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했다는 단석(斷石)이다. 이런 단석은 경주 단석산도 있는데 내용은 동일하다.

 

 

 

 

 

장수굴

진천 사곡리마애여래입상(鎭川沙谷里磨崖如來立像)

시대 고대/남북국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4호

건립 시기: 9세기(고려 전기)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산68-1

크기: 불상 높이 7.5m

 

높이 7.5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자연 석굴 입구의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거신광(擧身光)을 표현한 뒤

대형의 여래입상을 양각하였다.

 

전면에 뚫려 있는 가구공(架構孔)으로 보아

원래는 목조 전실(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만형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되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두 귀는 길어서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신체는 부분적으로 마멸되어 세부표현이 불분명한데,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의 법의는 U자형으로 흘러내리며,

왼팔 등에도 옷 주름선이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다.

건강한 상체에 통견으로 입혀진 법의 자락은

몸 앞으로 타원형을 그리면서 양손을 감싸고 늘어져 있다.

 

두 손은 몸 앞에서 들어 인지와 중지를 맞댄 채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연상하게 한다.

 

 

특징적인 광배 모양과 함께 도식적인 옷 주름의 표현은

전면적으로 형식화가 진행되는 고려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불상은 신라말의 마애불상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시대에 성행한 거군(巨群)의 마애불상 중의 하나로 높이 평가된다.

 

거대한 규모에 비교하여 조각기법이 뒤떨어지는 작품으로서

비만하여진 얼굴과 탄력성을 잃은 체구 등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은 신라말의 마애불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시대에 성행한 거군의 마애불로

암석의 종류는 흑운모 화강암이다.

 

이 마애불은 2007년도에 세정을 통하여 생물학적 손상에 대해 보존처리를 했으나,

마애불 전면에 걸쳐 크고 작은 불연속면이 발달하고 있어

구조적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다.

 

또한, 암반 상부에 일조량을 방해하는 수목으로 인하여

습도가 높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마애불이 조각된 암반의 구조적 안정성을 검토한 결과,

마애불의 두상과 수인, 법의 부분에서 쐐기 파괴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었다.

마애불에 발달한 불연속면의 보존처리는

먼저 절리면을 세정하고 에폭시수지(L-50)를 주입하여

내부를 완전히 충전하였다. 또한, 티타늄 봉의 삽입과 쇠밧줄을 설치하고

동종성분과 활석, 무기안료를 혼합한 에폭시수지(L-30)로 표면을 처리하여

이질감을 최소화하였다. 이 마애불의 균열 및 절리 부위에는

균열측정기가 설치되어 모니터링과 함께 지속적인 보존관리가 수행되고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백원재(百源齋)

申磼(신잡)이 百行之源(백행지원)을 기리는 백원서원을 세우고

김덕숭을 배향하였던 곳이다.

백원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현재의 백원재는 옛 백원서원 자리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김덕숭 효자각(金德崇 孝子閣門)

충북 기념물 제143호로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김덕숭은 공민왕 22년(1371)∼세종 30(144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강릉 김씨.

자는 子修(자수), 호는 慕庵(모암)이다.

松都(송도)에서 출생한 그는 判尹(판윤) 金天益(김천익)의 아들로,

牧隱(목은) 李穡(이색)과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글이

나오면 몇 번이든지 되풀이하여 읽었으며, 특히 효경을 좋아하였다.

공양왕 4년(1392)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 김천익은

松都判尹(송도판윤)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栢谷面(백곡면) 石峴里(석현리) 楸子(추자) 마을로 낙향하였다.

김덕숭은 21세에 추천되어 進善(진선)에 제수되었고

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을 비롯하여 司憲府執義(사헌부 집의),

溫陽郡守(온양군수)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세종 8년(1426)

韓山郡守(한산군수)에 제수되었지만 부모 봉양하는 일이 오랫동안 소홀해짐을

염려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부모 봉양에 힘썼다.

 

평소 아버지는 꿩고기를 어머니는 물고기를 좋아하셨는데,

한겨울 몸져누우신 어머니로부터 잉어가 먹고 싶다는 말씀을 듣고

엄동설한에 잉어를 구하기 위해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며칠을 기도하니

무릎이 닿았던 자리가 녹아 그 구멍으로 잉어 두 마리가 튀어 올랐다 한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놓아주고, 한 마리만 가져와

모친이 먹게 하였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낳았다 한다.

그의 나이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조석으로 부친께 드리는 문안인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여묘를 살던 첫날밤에 범 두 마리가 와서 여막의 좌우에 앉아 지켜 주었는데,

낮에는 다른 곳으로 가고, 밤에는 와서 여막의 근방을 두루 살피었다.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지금의 椒井(초정)에 거동했을 때

그의 효행을 전해 듣고 酒肉(주육)과 백미 10가마를 하사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 산소에 합장한 뒤에 여막을 짓고 여묘를 살았다.

74세에 3년간 여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종 30년(1448) 노환으로 세상을 뜨자, 吏曹參議(이조참의)를 증직

천하대효라 칭송하고 御製詩(어제시) 3수를 내리어 亭閣(정각)을 건립하게

하였으며, 三綱行實圖(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旌閭(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세종 31년(1449) 6월에는 그의 두 아들

金貴識(김귀식)과 金貴試(김귀시)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 후 仁祖(인조) 11년(1631)에 효자문을 세우게 되었다.

 

#신 묘비 뒷면에 새긴 세종대왕 어제시]

‘부모 봉양에 마음을 두었기에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에 평생을 바치었도다

어머니 산소 옆에서 여묘를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나면 아버지께 와서 문안을 드리었도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