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향수를 느끼며 순례하는 진천 영수사(靈水寺)

2021. 12. 19. 08:14문화재

 

10월 마지막 날 저물어 가는 늦가을

붉은 단풍의 정취가 그리워 영수사(靈水寺)을 찾았다.

영수사(靈水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로

해발 1357m인 충북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두타산(頭陀山) 중턱에 있는 가람이다.

가람의 입구에는 가는 세월이 아쉬운 듯

마지막 남은 단풍들도 여린 햇살을 받으며

바랜 붉은 빛으로 길손을 맞아 주는 듯 했다.

 

영수사 창건에 대해서는 1871년 작성된 ‘호서읍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된다고 하였으나

절에서 전해오는 중수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왕자 증통대사(證通大師)가 창건하였고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80년에 혜철 스님이

대웅전, 극락전, 선방을 새로이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영수사(靈水寺)라는 이름은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절 뒤편에 있는 영천(靈泉)이 있으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영천(靈泉)은 만병통치약으로 유명하였고 한여름에도 얼음보다 차가웠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551호 지정된 영산회괘불탱이 있고,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7호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관음보전, 삼성각, 요사채 1동이 있다.

 

일주문

1992년에는 지어졌다. <두타산 영수사>란 편액이 붙어 있다.

조성된 시대가 그리 멀지도 않은데 빛바랜 고풍을 풍기고 있다.

두타산의 영기(靈氣) 탓인가.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1980년 혜철 스님이 조성하였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시고 있고,

탱화로는 지장탱과 신중도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좌후 협시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지장탱

대웅전에 봉안된 이 신중도는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와는 다르다.

원본은 따로 보관된 모양이다. 아래 신중도는 인터넷에서 펌했다.

 

 

@진천 영수사 신중도(鎭川 靈水寺 神衆圖) 진천 영수사 신중탱

시대: 조선 후기

저작자: 상월(尙月), 천여(天如), 학능(學能), 재근(在根), 체훈(體訓)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7호

창작/발표 시기: 1870년(고종 7)

크기: 세로121.1㎝, 가로 96.5㎝

재질: 비단

 

구성 및 형식

세로 121.1㎝, 가로 96.5㎝ 크기의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불보살을 외호하는 신중들의 모임을 그렸다.

20011년 2월 1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화면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가운데 두고 성군(星君)과

천동이 천(天)들과 같은 크기로 자리하였다.

범천과 제석천은 같은 얼굴인데, 범천 이마에는 눈이 하나 더 있다.

천녀들이 없어서 천동들이 번과 보개를 들었고,

가운데 천동은 과일이 담긴 쟁반을 들었다. 양쪽 성군은 홀을 들고 있다.

 

아래 두 줄은 위태천과 여덟 신중들이 자리하였다.

위태천은 삼지창을 두 팔로 안고 투구를 쓴 전형의 모습이다.

특이한 점은 의자 같기도 하고 광배 같기도 한 배경을 표현한 것이다.

주위 신중들은 대부분 칼을 든 장수인데,

연꽃 부채를 든 선인과 용왕의 모습도 보인다.

위태천과 신중들의 크기 또한 차이가 없다.

이렇듯 신중도의 주존인 범천, 제석천,

위태천의 크기가 다른 성중들과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영수사 신중도의 특징이다.

붉은색과 녹색이 기본인데, 청색의 사용이 늘어난 것은

19세기 후반 불화의 색 경향이기도 하다.

영수사 신중도는 조선 시대 신중도 흐름에서 범천과 제석천보다

위태천의 비중이 더 커져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층 석탑

1978년 조성된 것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대웅전과 관음보전 사이 현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다.

 

몸돌은 우주로 동일하게 조성되고 탱주는 없고,

아래 상대석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고,

옥개석 받침은 3단으로 각단이 동일하다.

상륜부는 계란형의 보주를 올려 놓았다.

 

 

 

관음보전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관음보전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보살 좌상은 높이 90cm로 조선 중기의 작품이다.

 

높은 보관을 쓰고 있고, 보관에는 관음불의 상징인 정병과 아미타상이 보이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조화롭고 양어깨로 머리카락이 흘러 내리고 있고

이마에는 백호와 목에는 삼도가 있다.

가사는 통견으로 안에는 승각기를 입고 있다 

조선시대 작품이라서 고려시대의 화려한 영락은 보이지 않는다.

 

주수완 동산문화재분과 문화재전문위원은

“진천 영수사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조성된 양식의 것으로 추정된다.

무릎, 소매 등의 새겨진 무늬가 매우 섬세하다.

의관이 띠로 둘린 채로 갖춰진 모습으로 보아

보통 삼존불로 모셔지는 관음보살 좌상과는 달리

단독으로 모셔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고 설명하였다.

참고로 단독으로 모셔진 관음불을 보면,

순천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60호)과

안성 청룡사 관음전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다.

 

 

또 이르기를 “다만, 복장유물이 모두 소실된 상황이라

정확한 시기와 가치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아쉬운 상황이다.

불상의 표현력과 섬세함은 조선 시대 목조불상 중에서도 상당히 우수하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쥐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쓰고 있는 관에도 장식이 있었던 흔적이 보여 좀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섬세한 면에서는 상기 송광사의 목조관음불과

안성 청룡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비교해서 많이 떨어지지만,

양어깨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같다.

정병 유무를 비교하면 송광사 목조관음불은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지만,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불과 진천 영수사의 관음불 역시 정병이 없고

보관에 아미타 상이 없다는 점은 동일하다.

다만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쓴 점과 화려하고

섬세한 점에서는 많은 차이가 보인다.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660호

오른손에는 위쪽으로 하여 정병을 들고 보관에는 아미타 상이 없다.

양어깨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다.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0호,

고려 후기. 오른손 위로 중지와 엄지를 모으고 있고,

정병이 없고, 보관에 아미타 상이 없다.

검은 머리카락이 양어‘깨로 흘러내리고 있다.

 

삼성각

삼성각 안에는 칠성, 산신, 독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 앞에는 괘불대가 세워져 있다.

 

 

치성광여래
산신
독성

괘불대가 있다는 것은 이 절에 괘불이 있다는 의미다.

괘불은 대개 초파일에만 게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천 영수사도 그런 모양이다.

아래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펌했다.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鎭川靈水寺靈山會掛佛幀 영수사영산회상도

시대: 조선

저작자 :명옥(明玉), 소읍(小揖), 현욱(玄旭), 법능(法能)

문화재 지정: 보물 제1551호

창작/발표 시기 :1653년(효종 4)

크기 :세로 8.50m, 가로 5.50m

재질 :삼베

 

가뭄이 심한 해에는 이 괘불을 높이 걸고

수행 중인 승려들이 기우 기도를 드리면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는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은 보물 제1551호로 1653년(효종 4)에 제작되었다.

삼베 바탕에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8.50m. 가로 5.50m이며

화가는 명옥(明玉), 소읍(小揖), 현욱(玄旭), 법능(法能) 등

4명의 화원 비구(比丘)들이 그렸다.

 

명옥과 법능은 1658년 작인 경기도 안성의 청룡사

영산회괘불탱(靑龍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57호)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법능은 청룡사에서 1682년(숙종 8년) 작 감로탱화(甘露幀畫)를 조성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불화 작가들은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이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수사 괘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석가불 좌상을 중심으로

수많은 청문중(聽聞衆)이 에워싼 영산회괘불탱이다.

키 모양의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를 지닌 석가불좌상과 마주 보면서

무릎을 꿇고 등을 보인 사리불(舍利弗)이 법을 청하는 장면은

청룡사 영산회괘불탱과 비슷하다.

 

(안성 청룡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257호)

석가불이 영축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법회 모임인

영산회의 청중인 보살·제자·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사천왕(四天王)·

신장(神將)·천중(天衆)·비천(飛天) 등이 조그맣게 그려져 화면을

채운 군도(群圖)식 배치 구도이다.

 

구름으로 구획된 하단부는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왕비, 관모를 쓴 사대부와 귀부인,

조롱박을 차고 엎드려 비는 인물 등 다양한 계층 외에도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중(奏樂天衆)이 등장한 것으로,

법회를 찬탄하는 이 청중들은 1628년(인조 6년) 작인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 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 국보 제296호)의

하단부와 유사하다.

 

(안성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제296호)

높은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에

초승달 모양의 중앙 계주와 둥근 정상 계주가 장식된 머리 모양을 한

석가불은 좁은 어깨와 무릎 폭 그리고 불신(佛身)에 비해 큰 얼굴은 갸름하다.

그리고 눈썹이 내려왔지만 눈이 올라갔으며 인중(人中)은 짧고 입은 작다.

석가불의 대좌(臺座) 앞에는 화려한 꽃문양의 천이 덮인

불단(佛壇) 위에 향로·촛대·공양물이 놓여 있다.

 

사리불존자의 주변에 충분한 여백을 두어 석가불 앞에 무릎 꿇고 법을 청해 듣는

청법 장면이 한층 돋보인다. 전면적으로 호분(湖粉: 흰 가루)이 섞인

중간 색조를 사용한 채색법은 옅은 갈색의 배경색 위로 주홍색과

연두색이 주조색이다. 하늘색·흰색 등의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는 차분하며

화사한 느낌을 준다.

 

왕·왕비·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한 이 괘불탱의 제작 비용 분담을 위하여

시주한 물품 목록이 자세한 화기(畫記)는 당시의 사원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다.

 

즉, 그림의 바탕이 되는 삼베를 시주한 바탕 시주와

후배지(後排紙) 시주, 황금·주홍·청색인 이청(二靑)·대청(大靑)의 안료 시주,

꿀인 청밀 시주, 소금인 식염 시주, 장을 의미하는

말장 등의 음식물을 공양한 시주자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괘불탱의 상단부를 장엄하는 원경(圓鏡)·영락(瓔珞)·복장(腹藏)·

등촉(燈燭) 등 의식용 물건을 댄 수많은 시주자 명단에서

불교의 대중화를 확인할 수 있다.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은 197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보물 제155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륵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