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고산사 석조나한상군

2021. 11. 15. 22:27문화재

 

고산사는 제천 덕산리 신현리1653에 있는 절이다.

찿아 가는 길은 덕산리의 와룡산성이 있는 고갯길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지만

도로 폭이 넓어 조금 가파르지만 승용차로 쉽게 오를 수 있다.

사찰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못 가운데 관음상을 조성해 놓았다.

제천 고산사를 찾는 것은 석조나한상군(石造羅漢像群)을 보기 위함이다.

이 석조 나한상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1998년 12월 3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 후불탱화(後佛幀畫)도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1980년대 후반에 없어졌다.

 

 

 

 

 

 

 

 

 

제천 고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로

1920년에 쓰여진 『고산사중수기(高山寺重修記)』에 의하면

고산사는 통일신라 말 879년(헌강왕 5)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절터에서 수습되는 기와나 토기, 자기편들은

모두 조선 시대의 것들이기 때문에 조성연대는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며,

다만 고려 초에 대경 국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 준 후

이곳에 8년간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고산사 경내 좌측은 요사채가 있고

우측 돌계단을 오르면 응진전과 삼성각이 있다.

계단 입구에 석조물이 하나 보이는데 석등의 주춧돌로 보인다.

 

 

 

고산사의 응진전은 한국전쟁으로 효실 된 것을 삼성각과 함께 1998년에 복원한 것이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하는 전각을 이름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提和竭羅)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산사 응진전에는 일반적인 격식과는 달리

관세음보살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좌우에 3구씩의 나한상(羅漢像)을 안치하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인 말로, 산스크리트어 아라핫(Arhat)의 음역이다.

일체의 번뇌(煩惱)를 끊고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聖者)로서, 응공(應供), 무학(無學),

응진(應眞), 살적(殺賊), 불생(不生), 이악(離惡) 등으로도 번역된다.

나한은 소승의 법을 수행하는 성문사과(聲聞四果) 중에서

가장 높은 과위(果位)를 이룬 존재이다.

난제밀다라(難提蜜多羅, 慶友)가 저술하고

현장(玄奘)이 당의 654년에 번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

(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이하 『법주기』)에서는

십육나한(十六羅漢)이 석가모니불의 부탁을 받아

미륵불이 도래할 때까지 정법(正法)을 지키고

중생을 도와주는 보살로 기록하고 있다.

소승(小乘)적인 성격이 강한 나한은

『법주기』가 번역되면서 대승(大乘)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나한의 역사를 보면 나한상은 나한재(羅漢齋)와

오백나한재, 반승(飯僧) 등의 나한 신앙의 유행과 더불어 조성되었다.

나한상은 16나한상, 18 나한상, 500 나한상으로 분류된다.

16나한상은 『법주기』에 근거하며,

여기에 2존의 나한상이 더해져서 18 나한상이 조성된다.

한편 500 나한상은 십육나한 중의 한 분이 권속으로

오백나한을 거느린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들 나한상은 나한전, 응진전(應眞殿),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영산전(靈山殿) 등에 봉안된다.

 

제천 고산사 석조관음보살좌상(堤川高山寺石造觀音菩薩坐像)

응진전의 본존불로 모신 보살상은 관음보살로 석불의 높이는 60㎝이다.

전면에 호분(胡粉)을 두텁게 발라 세부 표현을 자세히 알아볼 수 없다.

머리는 묶어 올린 보발이 관 위로 솟아 있으며,

몇 가닥은 흘러내려 어깨를 덮고 있다.

2중으로 된 산 모양의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표면에는 구름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살이 오른 동그란 얼굴과 단정한 상호 표현으로 친근감이 드는 인상이다.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신체에 두 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중앙에 놓아 포개어 모으고 있다.

통견의 천의를 입고 있으며,

속에 승각기를 입고 있는데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옷 주름도 형식적으로 몇 개의 선으로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양어깨가 위축되고 턱이 크게 숙어지는 등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불상 양식을 지닌 탓이다.

석조보살좌상은 세부 형식이나 양식을 고려할 때

삼존상 중의 1구이고, 조성 시기는 조선 시대로 판단된다.

이 석조보살은 관음보살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증명할만한 도상의 표현은 확인할 수 없다.

 

 

 

@응진전에 봉안된 소형석조 나한상은 높이 44.5-52㎝의 중형으로,

주존(主尊)인 석조보살좌상의 좌우 옆으로 3구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더 많은 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6구만 남아 있다.

보살좌상과 마찬가지로 표면에 매우 두껍게 호분(胡粉))이 입혀져서

세부 표현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머리를 전체를 덮은 두건을 쓰고 있어

머리카락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눈썹과 수염은 흰색이나 녹색 선으로 그려져 있다.

두 손은 배 부분으로 모아서 지물을 들고 있는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석조 나한상들은 석조보살좌상과 동시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조성 시기는 조선 시대로 추정된다.

 

 

고산사의 이 석조 나한상은 인접한 영월의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발견된

오백나한과 그 유형이 비슷하고

또 석재가 채석된 곳이 제천과 인접하고 있어

그 조성 시기를 고려말 조선 초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월 창녕사지에 출토된 500 석조 나한상은 재질은 화강암으로

채석된 산지는 바로 제천 송학산(819m) 인근 산으로 알려져 있다.

 

나한상은 불상이나 보살상과 달리 불교 경전의 도상에 얽매이지 않아

여러 모습의 자세와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극도로 생략된 모습이 있는가 하면, 움직임이 크고 해학적인 모습도 있다.

나한상의 지물(持物)로는 염주(念珠), 발(鉢), 동물, 경전,

금강저(金剛杵), 과일 등이 있다.

그러나 고산사의 이 나한상들은 일체 지물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응진전의 지장탱

 

응진전의 아미타내영도

응진전의 신중탱

 

 

삼성각

응진전과 함께 1998년 복원된 삼성각은

치성광, 독성, 산신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삼성각 뒤편에 별도 누각처럼 작은 전각을 만들어 약사전을 조성했다.

약사전에는 약사여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