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榮州石橋里石造如來立像)

2021. 11. 6. 20:47문화재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은 인적이 드문 

사유지인 과수원 안에 위치하여 이곳이 초행이라면

찾아가는 길이 혼란스러워 참고로 소개한다.

<영주시 이산면 석폴 산200(지번)>이라는 내비게이터 주소를 따라가면

사과밭이 나오고 거기서 20m 정도 앞으로 나아가면

사진과 같은 갈림길이 나온다. 사진에서 좌측 길을 택해 가면

사유지인 봉숭아밭이 있고, 위 사진에서 보는 그 봉숭아밭

가운데 길을 가면 바로 석불을 안치한 보호각이 나온다.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榮州石橋里石造如來立像)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116호

크기: 높이 2m

 

일명 영주 석교리석불상으로 불리는 이 석불은 대형 석재를 깎아 만든 입상이며,

팔과 다리의 입체성이 반영되지 않은 투박한 조각으로 광배는 없다.

입체를 다루는 솜씨가 아직 발달하기 전의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

이는 신라하대에 불교의 대중화로 지방에서 일어난

새로운 조상(造像)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주동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0호)과 흡사한 석불로,

2m에 이르는 규모와 불상의 양식적 특징 등으로 미루어

영주동 석조여래입상과 같은 신라하대인 9세기에 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이 불상은 발견 당시 목에는 금이 가고,

왼팔이 잘려나갔으며 발목 아래는 땅에 묻혀 불완전한 상태였고

광배는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보수를 통해

다리 아래와 발의 세부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체구보다 머리가 커서 균형이 맞지 않으며,

목이 가늘어서 더욱 불안정하게 보인다.

경직되어 보이지만 길이가 적당한 다리에 비교해

상체는 빈약하고 사실성이 떨어진다.

 

 

 

상투 같은 정수리[육계(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는 머리에는

작은 소라처럼 돌돌 말린 머리카락[나발(螺髮)]이 굵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고졸하게 묘사되어 삼국시대의 석불을 연상시킨다.

보수 흔적이 남아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명확하다.

 

 

 

몸에 꼭 붙어있는 오른팔이나 처진 어깨 등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신체는 상반신과 하반신의 차이가 크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에서 인체의 굴곡을 강조하려 했지만,

가슴과 배의 양감이 별로 없어서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타원형의 옷 주름으로 인해 양감이 강조된 넓적다리가 현실적으로 보인다.

 

양어깨에서 흘러내린 통견(通肩)의 법의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옷깃은 굵은 선으로 둥글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손목 위 팔꿈치에서 흘러내린 법의는

신라 중대의 불상 조각에서 나타나는 형식을 보이며,

영주동 석조여래입상과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을 많이 닮았다.

 

특히 양다리에서는 각각 동심 타원형의 주름을 표현하고 있는데,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는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이처럼 다리에서 갈라지는 옷 주름 처리법을

우전왕상식(憂塡王像式) 불상 양식이라고 부른다.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에 2m 규모로 세워진 석불입상은

신라하대 불교가 지방으로 보급된 결과이다.

새로운 신앙 층이 대두함에 따라 불상 조성의 필요성이 생겼으나

석조 제작기술이 아직 미숙했던 지역의 조각으로 주목된다.

균형이 맞지 않는 머리와 신체, 양감이 없이 경직된 상반신,

미숙한 옷 주름 처리가 이를 말해준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