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0호)

2021. 11. 3. 21:51문화재

 

영주시의 역사를 보면 삼한 시대에 날이국이었던 이 지역을

신라의 5대 왕인 파사왕(婆娑王: 재위 80~112년))이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함으로써 일찍이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던 지역이다.

통일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는 내령군 지명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탓인지 경주와 멀리 떨어진 영주시 일대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영주 영주동석조여래입상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을 쉽게 찾아가는 길은 영주 세무서를 찾아가면

바로 옆에 공원이 있고 그 공원 안에 이름 모를 석탑과

1910년 일제 강점기 때의 항일운동을 한 선열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긴 민족역사가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씨의

추모비와 함께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榮州榮州洞石造如來立像)

일명: 영주리 석불입상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60호

건립 시기 : 9세기

크기: 높이 239cm, 불상 높이 188cm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중앙로 7(지번: 가흥동 2-68)

 

 

 

보물 제60호. 높이 2.39m에 달하는 대형 불상이다.

1매의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광배와 상이 하나의 돌에 조각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보살상으로, 얕은 대좌를 조각했으며,

눈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원래는 영주 남산들 제방 공사 중에 출토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불상은 길쭉한 배 모양의 광배(光背: 擧身光)를 등에 지고

당당하게 서 있는 보살상(菩薩像)으로 투박하면서도 박력이 있다.

약 4.5등신에 불과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비례를 지닌

체구와 높은 부조로 조각된 머리가 강조되어 있다.

세부 조각선(彫刻線)이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

 

보물 지정 명칭은 석조여래이지만,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이라고 판단된다.

보관은 얇은 띠 위로 3개의 꽃송이가 위로 솟은 삼면보관(三面寶冠)이며,

보관과 이마 사이에는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린 모습이 보인다.

 

 

 

 

양감이 풍부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통통하게 묘사됐으나,

후대에 눈동자를 쪼아내어 본 모습을 잃었다.

굵고 짧은 목에 흐릿하게 삼도(三道)의 흔적이 있으며

넓고 둥근 어깨는 당당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경향은 두툼한 팔, 다리와 손발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나

전체적으로 무겁고 둔탁하면서도 박력 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신체는 양감이 없이 평면적으로 표현되었고,

넓적다리 윗부분을 제외하면 신체의 굴곡이나 입체감이 전혀 없다.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 특히 두꺼운 입술의 표현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등과 유사한 것으로

지역적인 공통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

 

@영주 석교리 석불여래입상 (보물 제116호)

일반적인 보살상은 가사 안에 승각기를 입고

가슴은 드러나는 형식을 취하거나

목걸이와 영락 장식을 가득 걸치는 데에 비해

이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은 불상처럼 대의를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왼쪽 겨드랑이로 내려뜨린 띠 매듭 표현은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제328호) 등

신라 중대의 불상 조각에서 간혹 나타난다.

이는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이 불상의 대의를 입은 보살상으로

불(佛)과 보살의 외적 특징이 혼동된 채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

 

@금동약사여래불입상 보물 제32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배는 거신광(擧身光)과 두광(頭光)을 구분해 주는 곡선이 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거신광은 불상의 신체를 따라 양각으로 띠를 돌리고

그 위에 작은 꽃무늬를 새겼으며 둘레에는 위로 치솟는 불꽃무늬로

세심하게 장식을 했다. 광배의 형태와 그 위에 새겨진 문양 구성은

신라 하대인 9세기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조각 수법은 투박하지만, 건장한 체구와

당당한 힘이 있는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과

소박하게 장식된 광배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또한, 양감에 충실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등과 유사성이 있어서

지역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호각 안에 있는 연화문이 조각된 팔각원형의

이 초석(礎石: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돌)은 이곳으로 옮기기 전

석불이 원래 있던 곳에서 출토된 것이라면

석불이 있었던 곳에 누각의 초석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5층석탑

보호각 옆에 조성된 이 5층 석탑은 조성 연대가 불명하다.

기단부는 원래의 돌이 아닌 새로 보안 조성된 것이며,

옥개석의 끝은 파손된 부분이 많고

 

옥개석의 층받침은 마모가 되어 있지만 3까지는 5단으로 보이며,

4,5층은 3단으로줄여져 있다.

 

옥개석은 두툼하며 빗물이 떨어지는 경사면(낙수면)은 완만하다.

상륜부는 멸실되고 노반부만 남아 있다.

탑신석은 마모가 되어 흐릿하지만 우주가 양 끝에 조각된 것으로 보이며,

 

옥개석과 탑신석(몸돌)은 한 돌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시대의 조성된 홍성 고산사의 3층 석탑을 많이 닮은 것으로 보인다.

 

 

@용처(用處)를 알 수 없는 석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