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보물 제680호)

2021. 10. 30. 17:59문화재

 

석조 문화가 발달 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많은 석불과 석탑이 조성되고

마애불도 조성되어 많은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중 사면불의 형태로 지금까지 출토된 것은 몇 기에 지니지 않는다.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은 현재 그 몇 안 되는 그 사면불 중 하나에 속한다.

 

사면불의 경우 중국에서는 6세기 초 북위부터 수 대에 크게 유행하여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문헌에 나타난 언급으로는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四佛山條)의 기록에 따라

587년(신라 진평왕 9) 문경의 대승사(大乘寺)에 사불산에 있는

사면불을 들 수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로 가장 오랜 것은

6세기 중엽에 조성된 예산 화전리 사면 석불(보물 제794호)을 친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6~7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마모가 심하여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 외에 온전한 것으로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경주 굴불사지사면석불상(보물 제121호)과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국보 제312호) 등이 유명하다.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榮州新岩里磨崖如來三尊像)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680호

크기: 여래상 높이 140㎝, 보살상 높이 1120㎝, 108cm

제작 시기: 7세기

소장/전승: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로 165 (신암리)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내성천에 접한

미륵당들의 북서편 가장자리에 있다.

원래는 4면에 모두 불상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마멸되어 마애여래삼존상 외에는

남면의 마애불은 그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우협시
좌협시

(설상가상으로 마모도 마모지만 때를 잘못 맞추어

아침 햇살이 보호각을 바로 비추어 보호각의 나무 창살과

가로대의 그림자로 인해 하부형상을 제대로 담을 수 없어

부득이 위 3편의 사진은 문화재청의 사진을 펌했다)

 

본존불

 

 

 

좌협시
우협시

이 마애삼존불은 결가부좌한 본존불과 좌·우에 합장 시립 한 보살상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은 화소문을 새긴 원형두광이고

소발의 머리가 상호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갸름한 얼굴, 당당한 어깨, 큼직한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手印)이

통일신라 시대의 지역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는 배에서부터 다리 위로

굵고 부드러운 곡선의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져 있다.

 

좌협시

좌우의 협시보살상 역시 화염문이 새겨진 원형의 두광(頭光)을 지닌 입상인데,

상호는 본존과 같은 갸름하면서도

팽팽한 양감이 두드러지고 머리에는 보관이 확인된다.

 

 

바위의 남면에도 삼존상과 같은 양식으로 보이는 좌상이 외곽만 확인된다.

이 삼존은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양감을 지니고 있어

영주 가흥동의 마애삼존불좌상(보물 제221호)이나

봉화 북지리의 마애불좌상(국보 제201호)과 이어지는 양식적 특성을 살필 수 있다.

통일신라 초 영주지역에서 특히 유행한 지역적인 불상 양식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영주 가흥동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국보 제2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