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소달산 흥왕사(驪州 蘇達山 興旺寺)

2021. 10. 23. 15:15문화재

 

원주 흥법사지를 탐방하고 비가 올것 같아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가

다행히 비가 그치는 사이에 지나는 길이라 여주 흥왕사를 들렸다.

날은 여전히 흐렸지만, 여주 흥왕사를 들리게 된 것은

일전에 고달사지를 탐방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흥왕사(興旺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흥왕사의 옛 이름은 상왕사(霜旺寺)로 알려져 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소달화상(蘇達和尙)의 창건하였다는 설과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소달(蘇達)화상이 상왕사(霜旺寺)라 사명을 정한 것은

절터를 찾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 5월 어느 날

서리가 내릴 철이 아닌데도 주변이 서리가 하얗게 낀 것을 보고

이곳이 부처님이 점지해 주신 절터임을 알고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서리가 내린 절이라 하여 상왕사(霜旺寺)라 하였다고 한다.

상왕사는 일명 상사(霜寺)라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후일에

소달화상의 이름을 따 산 이름도 소달산(蘇達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고달과 소달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일찍이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각각 절을 지었는데

형인 고달은 국익을 높이하고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고자 절을 짓고,

동생 소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오로지 법등(法燈)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절을 지었는데, 형이 지은 고달사는 고려 초기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 가운데 하나로

왕실의 보호를 받은 거대한 사찰로 성장했지만,

조선 초기에 폐사되었는 데 비해,

동생 소달이 지은 상왕사는 사세는 빈약했지만

법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종교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본방 ‘여주 혜목산 고달사지’참조)

 

 

흥왕사는 후기에 창건된 사찰로

1893년(고종 30)까지는 상왕사(霜旺寺)라 하였으나

그 뒤 흥왕사로 편액을 바꾸었으며,

그 뒤 주지 돈묵(頓默)이 10여 년 동안

법당이 퇴락된 채 방치된 것을 보다 못하여

탁발(托鉢)하여 1905년에 중건하였고,

그 후 중개축을 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현재 주요 당우로는 극락전, 삼성각, 범종각, 대방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요사채

@극락전

흥왕사의 본당으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그 옆에 시대가 불명한 석조여래입상과 금동관음불좌상 1기와

아미타래영도와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 아미타불을 중앙에 관음보살을 좌협시로, 지장보살을 우협시로 두었다.

극락전에는 대개 지장보살보다는 대세지보살을 봉안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아미타래영도

 

 

 

 

@금동관음보살좌상

보관에 아미타형상이 있어 관음불로 여겨지는 이 금동불좌상은

조성 시기가 불명하다. 보관형태가 너무 단순하여

고려 전기나 후기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고,

법의는 통견으로 두 손 팔꿈치 이하는 걷어 올린 형태는

조선 초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법의 안에 승각기를 입고 있고

끈매듭이 보이는 것은 고려 후기의 모습이다.

머리카락이 양쪽으로 흘러내리는 이런 형태의 관음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안성 청룡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를 닮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석불

보관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살이 아닌 여래상이다.

백호가 있고 마모가 되었지만, 육계가 부조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부조되어 있다. 가사 형태는 통견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둥근 얼굴에 유난히 큰 코, 양손은 가슴 위로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 있는 형상이나 마모가 심해 알 수 없다.

좌대는 새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중탱

삼성각

범종각

 

 

 

 

@삼층석탑

흥왕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인데 본래 이 절에 있던 것이 아니고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마모가 심한 편이다.

지붕돌은 1층과 2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고,

3층은 2단의 받침을 두었다.

중앙의 기둥이 있는 상대면석은 원래 돌이 아니다.

1층 몸돌은 따로 만든 것 같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과 노반은 한 돌로 만들어져 있다.

각층 몸돌에는 흐릿하지만 모서리 기둥이 보인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