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459호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과 장락사

2021. 9. 29. 23:05문화재

 

고찰이든 신흥사찰이든 사찰에서

불전(佛殿) 다음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불탑이다. 탑의 기원은 붓다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서

입멸한 후 시신(屍身)은 다비(茶毘, 화장)했고,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되었는데

이 부족들은 각각 탑(塔)을 만들어 그곳에 유골을 안치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 근본 8 탑(根本八塔)이라 한다.

유골을 분배받지 못한 부족은 유골을 담았던 병을 가지고 가서

병탑(甁塔)을 세웠고,

어떤 부족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웠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도 초기의 탑은 흙이나 벽돌로 만들어져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기원전 3~1세기에 건립된 중인도의 산치대탑(Sanchi大塔)이며,

인도에서 시작하여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 전해져

조성된 최초의 전탑은 정광(正光) 4년(523)의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숭악사(嵩岳寺) 12각 15층 탑을 최고(最古)로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석탑은

634년(선덕여왕 3년)에 건조된 경주 분황사 탑인데

이것은 전탑(塼塔)이 아니라 검은 회색을 띠는 안산암(安山巖)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지금은 탑의 분류를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돌로 만든 석탑(石塔)으로 분류하는데,

중국은 주로 전탑을 많이 건립했고, 한반도에서는 석탑,

일본은 목탑을 많이 건립했다. 그래서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탑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모전탑(模塼塔)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탑이라 할 수 있다.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전탑은 통일신라 시대 안동, 의성 제천 등에서 주로 조성되었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역시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조성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을 모본으로

장락사에 법당 앞에 1000년의 세월을 올연히 불심의 향기를 이어가고 있다.

 

장락사의 우측 넓은 벌판은 옛날 통일신라 시대 선덕여왕이 세웠다는

창락사(昌樂寺)가 있었던 곳으로, 옛 문헌에 보이는 정거랭이 벌판으로

정거랭이 사방 오리가 옛날 창락사가 있었던 절터라고 한다.

이 절들의 규모가 얼마가 컸던지 오보마다 석등이요,

십보마다 불상이고, 백보마다 가람이었다고 하니,

이 탑 역시 정거랭이에 있었던 이름 모를 가람의 탑이었는지 모른다.

현재 그 유구가 정확히 발견되진 않았지만,

본당에서 절골까지 5리 사이엔 회랑이 연하여

승려들이 눈비를 안 맞고도 수도했다 하며,

사월초파일과 칠월 칠석날이면

3,000여 명의 승려가 목탁과 바라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했다고 하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지만 장락동 칠층모전석탑과

그 주변에서 금동불상, 금동편, 그리고 백자편이 발견되어

그 심증을 확인해 주고 있지만. 모전석탑이 세워졌던 절이나

모전석탑 자체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하는 바가 없어

장락사라는 사찰이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堤川長樂洞七層模塼石塔)

시대:고대/남북국/ 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459호

건립 시기: 10세기

크기: 탑 높이 9.1m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 65-2

 

제천 시내에서 동쪽으로 영월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약 2㎞쯤 가면,

낮은 구릉을 등지고 있는 넓은 대지가 나온다.

이곳은 창락사(蒼樂寺) 터라고 불린다.

절터(長樂寺址)는 현재 발굴 중이며,

구릉 서쪽의 논밭에 9.1m의 이 석탑이 서 있어 탑내동이라고 부른다.

 

석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들었는데,

이 돌은 절터에서 약 8㎞쯤 떨어져 있는

용두산(龍頭山)에서 캐온 것으로 보인다.

 

받침돌은 단층으로, 여러 장의 자연석으로 구성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7층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모전(模塼) 석재는 크기가 같지 않은데,

길이와 너비는 대략 28∼52㎝ 정도이고 두께는 4∼7㎝이다.

 

1층 몸돌의 남쪽 면과 동쪽면, 2층 지붕돌은 석재 일부가 떨어져 없어졌다.

1층 몸돌은 높이가 네 귀퉁이에 있는 화강암 기둥과 같고 너비는 2.8m이다.

네 귀퉁이에는 높이 1.37m, 너비 21㎝ 크기의 단면이

네모난 화강암 기둥이 서 있는데,

이것은 여느 전탑(塼塔)이나 모전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북쪽 면 감실

 

남쪽 면 감실

또한, 남쪽 면과 북쪽 면에는 화강암으로 문기둥 2개를 세우고

이맛돌을 얹은 높이 1.37m, 너비 1.08m 크기의 네모난 문이 있는데,

문비(門扉)가 달려 있지만, 남쪽 면의 것은 없어졌다.

동쪽과 서쪽의 면석은 전체를 모전 석재로 쌓았던 데 반해,

남쪽과 북쪽의 면석은 화강암 기둥과 네모난 문 사이에만 쌓았다.

몸돌의 모든 면에는 회(灰)를 덧칠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 석탑이 상주 석심회피탑(石心灰皮塔)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석탑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붕돌은 위아래에 모두 층단을 갖춘 전형적인 전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추녀는 짧고 좁은 편인데, 수평으로 평박(平薄)하고,

각 귀퉁이에는 위아래로 풍령(風鈴)을 달았던 구멍이 있으며,

아직도 일부에는 풍령을 달았던 철로 만든 고리가 남아 있다.

지붕돌 밑면 받침은 9∼7단이며, 윗면의 층단도 이와 거의 비슷하여,

지붕돌 전체는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다만 7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한 변이 70㎝ 정도인

낮은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고,

그 중심에 지름 17㎝의 둥근 구멍이 있는데,

구멍 주변에는 연꽃이 조각되었다.

이 구멍은 6층 몸돌까지 뚫려 있으며,

찰주(擦柱)를 꽂았던 구멍으로 보인다.

또한, 7층 지붕돌 윗면에서는 꽃무늬가

뚫새김 된 청동 조각이 발견되었으므로,

원래 정상부에 청동으로 만든 상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1967년에 해체 수리되었는데,

당시 5층 몸돌에서 길이 50∼54㎝,

높이 31㎝ 크기의 각 변이 일정하지 않으면서

네모난 화강암 석재가 발견되었다.

 

석재의 중심에는 한 변이 13.5㎝이고 깊이가 4.5∼5.5㎝인

네모난 사리(舍利) 구멍이 있었지만,

그 안에 내용물은 없었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는 조성 방법이나

부재의 가공 수법 등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장락사지 출토유물

 장락사(長樂寺) 극락전

 

베일속에 있던 장락사의 실체가 발굴 조사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7층모전석탑이 있는 장락사지에 대한 발굴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2007년 12월 충청대학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연화문 수막새,

‘長’ㆍ‘六月大吉’ㆍ‘卍’자명 명문기와를 비롯한 기와류와

삼국∼조선 시대의 토기류, 고려∼조선 시대의 자기류,

금속재류, 석재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장락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앞선 지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발굴에 나섰던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장락사가 3차례에 걸쳐 중창했고,

조선 시대 초기까지 법등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정확한 장락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 6년(1424) 기존 7개의 불교 종단을 선·교종으로 통폐합하는

불교개혁에 포함되지 못할 시점까지 최소 600여 년간 이상

천태종의 대가람으로 번창했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에 조선 초 태종이 숭유억불 정책을 단행하면서

11개 불교 종단을 7개 종단으로 축소하면서

이에 포함되지 못해 인위적으로 폐사된 사찰은

자복사로 대신토록 했다”라고 밝혔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1407년(태종 7)에

선종과 교종의 11개 종파를 다시 7개 종파로 축소하였고,

그와 더불어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다.

천태종의 경우에는 43개 공인 사찰 중 17개 사찰로 정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제주(堤州) 장락사(長樂寺)란 이름이 있다.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장락사는 당시 천태종단의 대가람으로 자복사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태종(재위:1400~1418) 시대까지는 법등이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는 기록이다.

 

(제주(堤州)는 고려 시대 제천의 옛 이름이다.

제천시는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내토군으로 불렸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으로 개칭했으며,

고려 초에 제주(堤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제천현으로 조선 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관음보살)

 

자복사는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사찰을 말한다.

태종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 사찰 가운데 명찰을 선정,

자복사로 지정하고 각종 지원을 했지만,

이에 들지 못한 사찰은 자연 폐사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후 세종 조에 들어 또다시 자복사에 대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장락사는 탈락, 폐사됐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이는 1431년에 <太宗實錄>에 堤州 장락사가 자복사로 지정된 기록이 있으나

1530년에 제작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이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장락사는 신라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법맥을 이어오다가

세종(재위:1418~1450년) 조에 이르러 폐사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극락전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을 좌협시,

지장보살을 우협시로 봉안했다.

 

극락전의 신중탱

 

 

극락전의 원이삼점(圓伊三點)

관음보살상

 

현재의 장락사는 제천 송학산 강천사에서 수도하던 수도승

법해(法海) 스님이 1964년부터 상주하면서

불사를 일으켜 창건한 것으로,

탑 뒤에 초막을 짓고 주석한 후인 7년 후에 법당을 신축하여

지금의 장락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법해 스님은 탑 주변을 정비하고 꾸준히 불사하였으나

노쇠하여 1973년 2월 9일에 열반하자,

그해에 성원(聖元) 스님이 주석하면서 관음전(현 극락전)을 신축하고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봉안하여 지금의 가람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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