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399호 홍성 청룡산 고산사 대웅전

2021. 9. 26. 18:17문화재

 

고산사(高山寺)는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492 청룡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 말사 소속이다.

고산사가 있는 무량리 마음 이름은 무량광불 즉 아미타불에서 유래한 것으로

백제 시대 이곳에 무량사라는 절이 있이 이를 딴 것이라 한다.

청룡산의 옛 이름인 高山에서 유래한 모양이다.

 

고산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나 사적기(事蹟記) 등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결성현조에

‘高山寺在靑龍山’이라 하는 기록만이 있다. 현 청룡산의 옛 이름은 高山이었다.

1974년 문화재연구담당관실(文化財硏究擔當官室)에서 학술조사 때

현 대웅전(大雄殿: 대광보전) 현판(懸板) 배면(背面)에

<종남산녹유페사재기명당선보(終南山麓有廢寺在基名當仙寶)>라 새겨진

<仙鶴寺營建記>가 발견되어 페사된 이 절과 고산사가

어떤 연관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학사에서 사용하던 현판을

이곳에 옮겨다 사용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사찰 안에 남아 있는 3층 석탑과

석조여래입상 등을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웅전은 건축수법을 볼 때 조선 초기의 건물로 판단되나

창건과 이후의 변화 또한 알기 어렵다.

다만 지붕 암막새에 기록된 글씨를 통해

조선의 제16대인 인조대왕 4년(1626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太古寺寺法>에 마곡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도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수덕사의 말사에 속한다.

 

좌로부터 산신각, 요사채, 대웅전

주요전각은 대광명전과 삼성각과 종무소와 요사채가 있고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99호인 대웅전(편액 대광명전)과

아미타불좌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88호),

삼층석탑( 충남 유형문화재 제419호),

석조여래입상(충남 유형문화재 제221호)이 있다.

 

 

 

홍성 고산사 삼층석탑(洪城 高山寺 三層石塔)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419호(2014년 4월 10일 지정)

조성: 고려 시대

 

고산사 삼층석탑은 사각형으로 마련된 낮은 석축 위에 건립되어 있으며

원래는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석탑 기초에는 현재 1매로 치석된 하층 기단이 마련되어 있는데,

상하부에 낮게 돌출된 받침형 단이 마련되어 있고,

그 사이에 각 면 2구씩 안상을 조각하였다.

 

 

하층 기단은 한 돌로 치석 하였으며 상층기단 면석부에 우주가 표현하였고,

갑석 상면에 탑신괴임이 있다. 또한, 갑석 하부에 부연을 표현하지 않아

형식화의 경향이 진전된 시기에 석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1층부터 3층까지 비교적 안정된 비율로

좌우 너비와 상하 높이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들고 있으며,

각층마다 탑신석과 옥개석을 별석(別石)으로 치석 결구하였다.

각 층 탑신석에 우주가 표현되었으며,

옥개석은 하부에 3단의 옥개받침을 마련하고,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석탑의 규모가 작지만 각 부재를 별도로 마련했으며,

평박한 인상의 옥개석은 석탑의 건립 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근거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상륜부는 결실된 부재가 많은데,

현재는 복발과 보륜석으로 보이는 부재들이 올려져 있다.

 

고산사 삼층석탑은 전체적인 외관이나 양식이

통일신라 시대나 고려 초기처럼 깔끔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은 보이지 않지만,

전대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석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탑신석과

옥개석을 동일석으로 마련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산사 삼층석탑은 규모가 작음에도

탑신석과 옥개석을 별석으로 마련하였다.

고산사 삼층석탑은 현재 석탑의 조성 시기,

규모, 치석과 장식 수법 등 시대적·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명: 홍성고산사 대웅전 (편액은 대광보전)

문화재지정: 보물 제399호

조선 시대: 조선 전기

 

대웅전은 고산사의 주불전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주심포계 팔작집으로 편액은 대광보전으로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고 불상 상부에는

2층 구조의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불단을 달리하여 좌협시로 관음보살을,

우협시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봉안하여 아미타 삼존불을 갖추고 있다.

 

대웅전이라면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인데

편액은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는 ‘대광보전(大光寶殿)’이지만,

실제 봉안된 본존불은 아미타불이다. 불상과 불전의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후대에 주불이 아미타불로 바뀌면서도 편액은 그대로

대광보전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대웅전은 건축수법을 볼 때 조선 초기의 건물로 판단되나

창건과 이후의 변화를 알기 어렵다.

다만 지붕 암막새에 기록된 글씨를 통해 1626년(인조 4)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973년에 해체 보수되었다.

1990년에는 계단과 석축을 보수하고 기와를 교체하였고

2000년에는 기와를 다시 교체하는 등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고산사 대광명전은 우리나라 주심포 건축물로는 보기 드문 팔작집이다.

공포의 구성과 건축수법은 전체적으로 주심포집의 건축수법을 따르고 있지만,

창방(昌枋) 위에 평방(平枋)을 놓고 공포를 짜올린 것과

우물반자를 설치한 것 등은 다포집의 건축수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 건물은 다른 건축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7량 구조를 취하였고,

귀공포 안쪽에는 추녀와 직각 방향으로 귀첨차를 사용하였다.

또한, 팔작집임에도 불구하고 우미량을 사용하였으며

종보와 우미량 사이에는 계량을 결구하였다. 외목도리의 단면 형태도 특이하다.

#우미량(牛尾樑)은 도리와 도리 사이를 연결하는 보로서

팔작이나 우진각집에서는 볼 수 없고 주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맞배지붕 형태의 건물에서 볼 수 있다.

 

고산사 대웅전은 주심포계 건축물로서

다포계 건축물의 수법도 일부 반영하고 있는 등

구조와 양식이 특이한 불전이다. 건축수법을 볼 때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나, 우미량을 사용한 것과

첨차 하부의 연화두형(蓮花頭形: 일명 쌍S자형 곡선) 초각,

굽받침이 있는 소로 등에서는 고려 시대의 건축수법도 나타나고 있다.

<자료출처: 한국 민족 대백과 대사전>

 

 

홍성 고산사 아미타불좌상

홍성 고산사 아미타불좌상(洪城高山寺阿彌陀佛坐像)

시대: 조선 전기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크기: 높이 135㎝, 무릎 폭 107.7㎝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형에 변형 통견식 대의를 입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결한 설법인 수인이 특징으로,

고려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불상이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광보전이 1450년에서 1485년 사이에 중창된 점과

불상의 양식적 특징에서 조선 전기 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고산사 아미타불좌상은 소조상으로

비교적 알맞은 신체 비례를 하고 있다.

육계가 높고 나발의 표현이 뚜렷하며,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과

부드럽게 이완된 얼굴 등이 특징이다.

둥근 어깨에 허리는 길게 표현되었으며,

무릎은 넓고 낮게 표현되었다.

 

 

불상의 착의는

변형 편단우견식인데 착의 방법은

고려 후기의 불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만,

왼쪽 어깨에 접힌 옷 주름이나 각이 진 옷 주름 등에서

조선 전기 불상의 특징이 나타난다.

 

 

수인은 섬세하지만,

유난히 크게 표현되었는데, 오른손은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보이며 엄지와 중지를 결하였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 손바닥을 위로하여 중지와 엄지를 결하였다.

 

(사진: 문화재청에서 펌)

고산사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은 제작 시기와 작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착의법과 앞으로 숙인 자세에 부드러운 얼굴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의 불상 특징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 사례가 많지 않은 조선 전기 소조불이라는 점,

높이 1m가 넘는 큰 규모,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변화되는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불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보관에는 아미타상을, 손에는 정병(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

법의는 통견으로 가사 아래 승각기와 띠매듭이 보인다.

 

 

 

지장보살은 육환장을 들고 있고 몸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실타래가 얹혀 있다.

 

아미타불상 옆에 또다른 소조아미타상을 봉안해 놓았다.

옛 것이 아닌 것같고 근래에 새로 조성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천수천안관음불 탱화, 손마다 다른 지물을 보지하고 있다.

 

신중탱, 위태천을 중심으로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홍성 고산사 석조여래입상(洪城高山寺石造如來立像)

조선 시대: 고려전기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크기: 높이 220.9㎝, 최대 폭 113.5㎝

 

원통형의 돌을 다듬어 만든 2m가 넘는 거대한 불상이다.

둥글게 솟은 육계에 갸름한 얼굴,

반복하여 흘러내린 U자형 옷 주름 등은

통일신라 시대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길쭉한 불신에 굴곡이 없는 평면적이고

밋밋한 표현들은 고려전기의 특징이다.

즉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반영한 고려전기의 석조여래입상이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 편으로 목 부분과

어깨, 오른손 부분 등에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

머리는 소발에 둥글게 솟은 육계가 있고, 얼굴은 갸름한 타원형인데,

약간의 마모는 있지만, 눈은 작고 길며

큰 코에 작은 입의 윤곽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온화한 인상을 준다.

둥글고 당당한 어깨에 불신은 긴 편이다.

 

 

착의는 신체를 덮은 통견의로, 목 밑에서부터 U자형의 옷 주름이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내린다.

이 옷 주름은 큰 변화 없이 다리까지 이어지지만,

측면에서 보면 옷 주름 사이를 약간씩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양감을 표현하고자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상의 측면에도 옷 주름을 새겨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두 손은 불상의 크기에 비해 큰 편으로 약간 어색해 보인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려 몸에 밀착되게 표현하였으며,

왼손은 가슴 높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자세에

중지와 약지를 결하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과

U자형으로 반복되어 흘러내린 옷 주름은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 몸에 부착시킨 오른손의 수법이라든지

원통형으로 구성된 길쭉한 신체 그리고 양감이 적은 평면적이고

밋밋한 불신의 표현은 고려전기 불상의 조형적 요소이다.

 

사면에 2개의 큰 연화문이 부조된 좌대 위에 불상이 세워져 있다.

기단부의 4각 좌대는 새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특징을 계승한 고려전기의 불상이다.

특히 비례가 맞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수인이라든지

굴곡이 없는 밋밋한 신체의 표현 등에서

고려전기의 불상 특징이 잘 반영된 작품으로

고려 시대 석조불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위의 전각은 산신각, 아래는 요사채로 보인다.

고산사 종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