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만해 한용운의 생가

2021. 9. 19. 17:33명승지

 

 

<님의 침묵>이란 시로 우리 민족 혼에 심금을 울렸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함께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흑풍』, 『후회』 등을 저술한 승려이며,

시인이고 독립운동가이다.

만해(萬海)는 그의 법호이며 만해(卍海)라고 불린다.

 

출생 : 1879년(고종 16) 8월 29일

사망: 1944년 6월 29일

본관: 청주(淸州)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름있는 무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부친 응준은 종5품의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와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宣略將軍行忠武威副司勇)을 지냈고,

조부 영호(永祜)는 종4품의

선략장군행훈련원첨정(宣略將軍行訓練院僉正)을 지냈으며,

증조 광후(光厚)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을 지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얼마간의 경제적 실력과

유교적 교양을 지닌 농촌 중산층 정도였다.

 

그가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어릴 적 몸은 작았으나 힘이 세고 모험심이 강하였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당찬 아이였다.

6세경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通鑑)』을 해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를 통달하였고,

『대학(大學)』에 있는 정자(程子)의 주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책에 먹칠을 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 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국가 등록문화재 782호)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대법륜륜의 바퀴를 굴린다는 전대법륜이 편액이 걸려 있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써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금문(禁門)은 궁궐의 문이 궐문(闕門)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 사당(祠堂)의 문이라는 의미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 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만해의 영정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시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

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1926)

@服從(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 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후회/한용운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하였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게다가 나의 성격이 냉담하고 더구나 가난에 쫓겨서

병들어 누운 당신에게 도리어 소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신 뒤에 떠난 근심보다 뉘우치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만해 문학체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