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47호 조선의 삼대 누각 중 하나인 밀양 영남루

2021. 8. 13. 20:53명승지

 

밀양 영남루는 이번 순례에 원래 계획이 없었는데

무봉사 가는 길 바로 옆에 영남루가 있었기에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영남루 입구에 있는 공영 유료주차장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규모는 작지만,

무료주차장이 있었다. 승용차 10대 정도 주차할 공간이었다.

여기에 주차하니 무봉사와 영남루가 지척이었다.

공영주차장 쪽을 택했다면 긴 돌계단 올라가야 했을 텐데

그런 수고를 덜한 셈이다. 영남루 가는 입구에

우리나라 대중음악작가로 유명한 박시춘 선생의 생가가 있고

맞은 편에 영남루 관리사무소가 있었다.

날은 흐리고 무더웠다. 관리사무소를 들어서니 넓은 마당에

우측에는 단군 신상을 모신

천진궁(天眞宮)의 일주문인 만덕문(萬德門)이 보이고

좌측에 영남루(嶺南樓)가 눈에 들어온다.

 

 

박시춘(朴是春, 1913년 10월 28일 일제 강점기 때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96년 6월 30일 서울에 별세했다.

대중음악 작곡가 겸 기타 연주자이고 트럼펫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색소폰 연주자,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영화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다.

대표작으로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비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있다.

 

 

 

 

 

 

 

 

@영남루는 조선 시대 밀양 군의 객사인 밀주관(密州館)에 부속 건물로

밀양강을 바라보는 정면 5간 측면 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으로,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여 누각마루를 높여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된 월랑(月廊)으로 연결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凌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는데

건물 전체의 배치에 변화와 특징이 있으며

계단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통하여 양쪽 부속건물 사이를 왕래하게 되어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 사이를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귀한 손님을 접대하여 잔치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촤측 건물은 능파각 우측은 침류각이다. 중앙은 영남루 본누각이다.

문헌에 따르면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고려 현종 때 절은 폐사되고 종각이었던

금벽루(金璧樓)란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이를 재건하면서

옛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불렸는데 1366년 공민왕 14년에

밀양 부사 김주가 중수하여 영남루라 공식 칭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 뒤에 1460년 조선 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하였고 신숙주가 누기를 지었다.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 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에

부사 이인재가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부사 이인재가 중건할 때의 상량문은 추남 이장한이 지었으며,

준공한 뒤에 김홍근이 지은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 남강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영남 밀양강의 영남루(嶺南樓)는

조선 시대 후반기에 속하는 건물로서는 건축미와 규모 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영남루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남루를 바라보면 3개의 편액이 나란히 걸렸다.

중앙의 편액인 <영남루>는 조윤형(曺允亨)이 쓴 것이며,

좌우의 <교남명루>와 <강좌웅부>의 편액은 이유원(李裕元)이 쓴 것이다.

교남명루란 조령 남쪽 즉 영남의 유명한 누각이란 뜻이고,

강좌웅부란 낙동강 좌측의 큰 고을이란 뜻이다.

 

@조윤형(曺允亨1725~1799)은 조선 후기 서사관, 호조참의,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 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제자이다.

그리고 원교 이광사는 白下 尹淳(1680-1741)의 제자이다.

영남루 중앙에 걸이 영남루라는 편액은

송하 조윤형이 1788년(정조 12년)이 쓴 것이며,

정조 임금은 조윤형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전각이나 현판의 글씨를 많이 쓰게 하였다고 한다.

 

편액: 이유원 글씨

 

편액 이유원 글씨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조선 후기 함경도 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

이조판서 이계조(李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 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 부윤·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능파각(凌波閣)

동쪽에 있는 익루(翼樓)로 호수(凝川江水)와 가깝다고 하여

능파당(凌波堂)이라 이름하였고 본루와 낭하(廊下)로 통한다.

편액은 단기 4290년(1957년) 정유추(丁酉秋) 배수환(裵綉煥)

 

 

@누각 안에도 여러 편액이 걸려있다.

<영남제일루>와 <영남루>는 영남루를 재건한 부사 이인재의 아들 이증석과 이현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이증석은 11세, 이현석은 7세였다고 한다.

<영남제일루>는@이인재(李寅在)의 아들 이증석(李憎石)이 1843년

 

@(강쪽편액)영남루는 계묘년 헌종 계묘년초하한 이현석 7세서

영남루라는 동일 편액이 천진궁 쪽에도 걸려 있다.

위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의 글이라고 한다.

성파 하동주는 고종 2년(1865) 거제면 동상리 진양인 하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남의 서예대가로 진주에 나가서 명성을 떨치니 호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3년 세상 을 떠날 때까지 한결 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의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부산의 범어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영남루란 글씨를 남겼다.

 

@湧金樓(용금루)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의미

@顯敞觀(현창관)

현창은 사방이 탁 트여 훤하게 의미로

영남루에 오르니 사방이 확트인 경관을 뜻한다는 의미

 

@江城如畵(강성여화)

응천강과 읍성이 마치 아름다운 그림같다는 의미.

응천강은 현 밀양강을 의미하며 남천강이라고도 불린다.

 

 

@영남루의 익랑(월랑이라고도 한다)은 다른 누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다.

1844년(헌종 10, 甲辰) 이인재가 영남루 복원공사를 하면서

현재와 같은 누각의 모습으로 지은 것이다.

이인재가 복원공사 할 때 옛 제도를 다소 바꾸어

본루의 규모를 크게 하는 한편 능파당과 침류당을

각각 동서의 익루(翼樓)로 삼아 복도와 층층 계단의 낭하를 설치하여

본루와 연결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위사진의  좌측이 枕流閣(침류각)이다.

편액: 단기4290년(1957년) 9월 능파각과 함께 지어진 익랑이다.

 

영남루에서 바라 본 천진궁

 

 

<천진궁>

밀양 영남루의 천진궁(密陽 天眞宮)은 조선 효종 6년(1665년) 창건된 건물로서

단군의 진영을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를 행하고 있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17호 '천진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건물은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최근에 원래의 문틀에 2중의 문을 덧대어 달았는데,

기법이 미숙하여 기둥의 높이를 전통적 비례에 비해 높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천진궁을 관람하는 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요란하더니 곧이어 소낙비가 쏟아진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퍼붓는 형상이다.

오도 가도 못 하고 천진궁 문턱에 앉아 비를 피했다.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이라 했던가.

분망(奔忙)한 마음 쉬어가라는 계시인가.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천진궁에 앉아 쏟아지는 빗속에

영남루를 바라보며 잠시 감성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