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흥법사지 진공국사탑비와 삼층석탑

2021. 9. 4. 15:28문화재

 

흥법사지는 원주시 지장면에 있는 신라말 고려 초의 옛 흥법사의 절터다.

법천사지와 거돈사지와 더불어 원주 3대 사지(寺址) 중 하나에 속한다.

두 곳은 이미 탐사했지만, 흥법사지는 귀경시간에 쫓겨 포기했다가

오늘에야 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날은 흐리고 비 소식도 있어

다음날로 미룰까 생각도 했지만, 다시 미루기도 그렇고 해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길은 나섰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날은 흐렸다.

 

흥법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사지(寺址)에는 흥법사지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을 뿐이며, 사찰 터 주변 일대는 양파밭으로 변해 있다.

 

흥법사에 대한 기록은 남북극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839~857년)6에 조성된

국보 제104호인 <전(傳) 흥법사지염거화상탑>에 흥법사가 나오는 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또 고려사 세가 태조 23년 조에

'추7월왕사충담잠사 수탑우원주영봉산 흥법사친제비문

(秋七月王師 忠湛死 樹塔于 原州靈鳳山興法寺 王親製碑文)'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흥법사가 고려 초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충담은 진공대사(眞空大師: 869~940)의 속명(俗名)으로

신라 때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정원대사(淨圓大師)에 수학하고 돌아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왕사가 되신 분이다.

대사의 비문에서는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친찬(親撰)하였다고 하였으니,

고려 초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 흥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기록을 알 수 없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향토지에 의하면 1693년(숙종 19년)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이

이곳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원주 흥법사지는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1984.06.02. 지정).

 

* 흥법사지의 유물과 유적 *

흥법사지에는 국보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 진공대사탑 및 석관,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이 중에서 국보 제104호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

진공대사탑(보물 제463호) 및 석관은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으며, 2005. 10. 28. 용산 국립중앙 박물관이 개소되면서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흥법사염거화상탑 앞에 전(傳)자를 더한 것은

흥법사지 출토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 흥법사지에는 옛 절터에서 수거된 기와와

주초석(柱礎石)이 남아 있고, 삼층석탑과 비신이 없는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파손된 진공대사탑의 비신부는 일부가 수거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주 흥법사지진공대사탑비(原州興法寺址眞空大師塔碑)

 

조선 시대:고려 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463호

건립 시기: 고려 태조 941년(태조 24)

크기: 귀부 높이 75㎝, 이수 높이 99㎝

 

흥법사지의 이 탑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법안종의 승려인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귀부(龜趺: 비의 받침돌)와 이수(螭首:머릿돌)만 남아 있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주인공인 진공대사 충담(忠湛, 869~940)은

신라 경명왕 때 활동했던 심희(審希)의 제자이다.

입당(入唐) 유학하고 918년(태조 원년)에 귀국하였는데,

이후 921년(태조 4) 고려 태조로부터 왕사(王師)에 임명되었다.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년(태조 5)에서 924년( 태조 7) 사이의 시기로 여겨진다.

그는 흥법사에 머물면서 원주 지역을 교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충담은 940년(태조 23) 7월에 흥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되었다.

 

진공대사승탑 보물 제365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리고 탑비는 그다음 해인 941년(태조 24)에 조성되었다.

진공대사탑의 원래 위치는 흥법사지 뒤편의 산록이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원주 흥법사지진공대사탑비는 사찰의 중심 조형물에 해당하는 석탑의 뒤편에 있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탑비의 지대석은 방형이며 귀부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귀부는 다섯 개의 굵고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다.

 

 

선이 굵게 조각된 용두(龍頭)는 신체에 비해 다소 크게 만들어졌으며

벌리고 있는 입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코에서는 서기가 뻗어 나와 귀 방향으로 흐른다.

용두의 머리 정상 부분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져 있어

별도의 장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이 조식 되어 있다.

용두 양측의 귀갑문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귀갑의 중앙부에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고

비좌의 측면과 정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하부에는 비신 홈이 있으며

비신 홈 주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용두의 정수리에 방형의 홈이 파여 있고 어제 내린 빗물이 고여 있다.

 

 

 

 

이수의 평면과 정면은 방형의 형태지만

운룡문의 자유로운 묘사로 인해 굴곡이 많다.

이수에는 총 아홉 마리의 용이 율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전면2, 후면1, 사각4, 상부2마리)

 

 

이수 중앙에는 제액을 만들고 ‘진공대사’라 음각하였다.

제액 주변은 깊이 있는 운문으로 조각하였다.

 

 

탑비 뒤편에 놓인 석조물. 석등으로 사료된다.

원주 흥법사지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작성하고

당(唐) 태종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탑비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탑비는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937년(태조 20)부터

적극적으로 승려의 탑비를 건립하였다.

태조의 재위 기간에 비문이 작성되거나 탑비가 건립된 사례는

대략 11건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최언위가 작성하였다.

하지만 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친제(親製)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신라 불교의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것을

태조가 보여주기 위해 진공대사탑비의 비문을 직접 작성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태조 왕건이 진공대사탑비를 친제한 이유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조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도를 갖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진공국사탑비의 글. @진공국사탑비문은 唐太宗의 글씨를 集字하여 세운비라고 한다.

태조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장소에 개태사를 창건하게 하고

940년 낙성법회 때 「개태사화엄법회소」를 직접 작성하였다.

태조가 개태사를 창건하고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세운 이유는

후백제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조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원의 신라 유민들에게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직접 선언하기 위해서 진공대사 탑비의 비문을 친제하고

역동성과 활력이 넘치는 진공대사탑비를 흥법사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논산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제219호

태조 왕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작성한

탑비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명확하기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흥법사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신이 직접 작성한 탑비를 건립하였다.

흥법사는 강원도나 경상도 지역의 옛 신라 유민들이

육로를 통해 개경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병목과 같은 교통의 요지이다. 특히 일반적인 탑비의 위치와 다르게

진공대사탑비가 사찰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이유는

흥법사를 방문하는 모든 행인이

이 탑비를 볼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진공대사탑비는 진공대사 충담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비인 동시에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조형물이다.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原州興法寺址三層石塔)

조성시대: 고려 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464호

탑의 크기: 높이 3.69m

 

흥법사지는 현재 양파밭으로 변해 있는데, 석탑은 밭 가운데에 서 있다.

석탑은 2층의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삼층석탑으로

기단부와 옥개석이 많이 파손되어 있고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보개(?)만 남아 있다.

 

 

 

기단부 하대갑석은 경사가 있고,

상대갑석과 하대갑석은 우주(모서리기둥)와

탱주(가운데 기둥)가 조각되어 있다.

하대면석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고

안상 안에는 꽃무늬가 오목새김으로 되어 있는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장의 널돌로 구성된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너비가 좁은 편인데,

윗면의 경사가 심하여 특이하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 새겨진 얇은 1단의 굄은 간략화 과정을 보여준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널돌로 불규칙하게 구성되었는데,

규모는 매우 큰 편이지만, 너비가 좁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2장의 널돌로 덮은 위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평박(平薄)해 보인다.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에는 경사가 있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3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받침돌에 비해 크기가 급격히 작아져 좋은 비례라고는 할 수 없다.

곧 1층 몸돌의 너비는 반으로 줄었고, 높이도 약 2/3로 줄었으며,

2층 이상의 몸돌 높이는 1층 몸돌보다 2/3로 줄었기 때문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가느다란 우주(모서리 기둥)만 조각되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는 데

1층 탑신면에 흐릿하지만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지붕돌)은 추녀 부분이 많이 손상된 상태인데,

밑면 받침은 층마다 4단이고, 얕은 밑면 받침보다 윗면인 낙수면은

두꺼워 경사가 심하다.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反轉)을 보인다. 각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각진 굄이 있다.

머리 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심하게 손상된 노반과 보개만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석재 구성이나 표면 조각도 기백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