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거돈사지(居頓寺址)

2021. 8. 26. 23:33문화재

 

사적 제168호(1968.12.19. 지정)인 원주 거돈사지(居頓寺址)는

강원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정산리(鼎山里)에 있는 거돈사의 옛 절터이다.

거돈사(居頓寺)의 창건과 폐사된 시기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출토된 유물로 보아 거돈사는 신라 말기에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사찰로 여겨진다.

고려 초기에는 당시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法眼宗)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에 천태종(天台宗) 사찰로 흡수되었다.

중심인물인 원공국사(圓空國師)는 광종의 비호를 받으며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친 인물이었으나

광종의 사망으로 인해 법안종 세력도 위축되었고

원공국사도 89세인 1018년(현종 9년)에 거돈사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그는 입적 후 우공국사로 추증되었고, 거돈사에 탑비와 함께 탑이 건립되었다.

지금 거돈사지에는 고려 1025년(현종 16년)에 조성된 원공국사탑비만 남아 있다.

원공국사탑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을

1948년 경복궁 경내로 옮긴 이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으로 옮겨져 있다.

거돈사지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절터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탑식(一塔式) 가람으로 주목되는 곳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신라 후기인 9세기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고,

절터에서는 중문지,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다.

중문지 북쪽에는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식을 갖춘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있고, 이 석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가 있다.

 

이 절터는 현재 남아 있는 삼층석탑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사가 있는 곳에 석축을 높이 쌓아 조성한 평지에 중문지를 만들고,

일탑(一塔) 일금당식(一金堂式) 가람 배치를 중심으로

동남 축으로 가람을 전개하여 금당 후면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지가 둘러싸여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중문지를 지나면 삼층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지가 있다.

중심 건물인 금당지는 초석의 배열 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평면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불상 대좌(臺座)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積心石: 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을 먼저 조성한 후 금당이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금당지 뒤로 낮은 석축이 있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강당지로 추정된다. 금당지를 중심으로 하는 남북측 오른편에 많은 건물이 있다.

절터 뒤편 나지마한 언덕에는 원래 원공국사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로 옮겨져 있다.

왼쪽 회랑지 끝에는 이 절터 발굴조사에서 나온 석재들이 있다.

 

* 거돈사지의 문화재 *

사적 제168호로 지정된 거돈사지에는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

거돈사 3층석탑(보물 제750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원공국사 부도인 승묘탑(보물 제190호)은 일본 강점기 때

서울로 옮겨져 일본인 집에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가

2005.10.28.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소되면서

경내로 옮겨져 현존하고 있다.

거돈사 3층 석탑은 금당터 앞에 있으며,

탑 옆에 있던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크기는 135cm ×85cm이며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꽃무늬가 부조되어 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居頓寺址圓空國師塔碑)

시대: 고려 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78호

건립 시기 : 1025년(현종 16)

크기: 비신 높이 252cm, 비신 폭 124.5cm

 

문화재청은 이 탑비를 <원주거돈사지원공국사탑비> 명명했는데

탑비 제액에는

<시호 원공국사승묘지탑(贈諡 圓空國師勝妙之塔 碑銘)>으로 되어 있다.

원주 거돈사지의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1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탑비의 주인공인 원공국사 지종(智宗)은 930년(태조 13)에 출생하여

1018년(현종 9) 88세로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이다.

그는 고려 제4대 왕 광종(재위:949~975년) 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법안종의 승려로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법안종(法眼宗)의 개조는 중국 오대(五代)에 활약했던

청량 문익(文益:885~958)이다. 천태 덕소가 계승하고,

그 제자 영명 연수(延壽:904~975)가 종풍을 크게 떨쳤는데

고려 태조인 왕건의 셋째아들이자 4대 왕인 고려 광종이

법안종 3대 조사인 영명연수 스님을 사모하여

학승 36명을 중국에 유학시켰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원공국사 지종(智宗)이다.

원공(圓空)은 그의 시호(諡號)이며, 이름은 지종(智宗), 자는 신측(神則)이다.

원공국사 지종은 영명연수로부터 법을 받아 고려에 전한 분이다.

중국에서는 법안종이 쇠퇴하여 임제종에 흡수되었으나,

고려에서는 크게 발달한다.

 

지종은 8세 때 개경의 사나사에서 삭발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953년(광종 4)에 봉암사로 갔으며

이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러 있었다. 30세가 되는 해인 959년(광종 10)에

고달원의 증진대사 찬유가 꿈에 나타나 중국 유학을 권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을 갔다. 41세가 되는 해에 다시 찬유가 꿈에 나타나

귀국을 종용하니 고려로 돌아왔다. 970년(광종 21) 귀국한 지종은

광종으로부터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고 금광선원에 거주하였다.

이후 지종은 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 대까지 왕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지종은 대선사를 거쳐 84세인 1013년(현종 4)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87세인 1016년(현종 7)에는 질병을 얻어 하산을 권유받았다.

당시 지종은 수도인 개경에 머무는 것은

‘자리(自利) 때문이 아니라 타리(他利)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2년 후인 1018년(현종 9) 4월 왕에게 하직하고 거돈사로 하산하였다.

4월 17일 8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4월 22일 장례를 치렀다.

입적 후 원공국사로 추증되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居頓寺址圓空國師塔)

시대: 고려 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190호

건립 시기: 1018(현종 9)

소재지: 국립중앙박물관

 

원공국사탑의 원래 위치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

거돈사지 사역의 북쪽 경계 부근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반출되어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봉안되어 있다.

(본방 원주거돈사지 원공국사승탑 보물 제190호 참조)

 

지종이 입적한 직후 원공국사승묘탑이 조성되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은 팔각당 형식이며

신라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단정하고 균형 잡힌 형태와 격조 있는 장식을 더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비는 1025년(고려 8대 왕 현종 16)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썼다.

각자는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담당하였는데,

구양순(歐陽詢)·구양통(歐陽通) 부자의 서법이 어우러진 서체이다.

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거대하고 당당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귀부

탑비의 세부를 살펴보면,

수 매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탑비를 조성하였다.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과 ‘만(卍)’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귀갑문 끝부분에는 테두리가 둘려 있으며

그 위에 4엽의 화판을 가진 꽃문양이 시문 되어 있다.

 

 

귀갑 상부에는 방형의 비신 받침이 있다.

비신 받침 측면에는 화려한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안상 중앙에는 꽃봉오리가 솟아나 있다.

꽃봉오리가 중앙에서 솟아난 형태의 장식을 갖춘 안상은

11세기에 주로 유행한 문양 형식이다.

 

 

용두는 뺨의 측면에 지느러미와 유사한 비늘이 있는 어룡형이다.

 

비신

제액(題額)은 보통 이수부(螭首部)에 새기는 데

원공국사탑비는 비신에 부조되어 있다.

비신에 부조된 제액(題額)은

시호 원공국사승묘지탑(贈諡圓空國師勝妙之塔 碑銘)이다.

 

승묘(勝妙)는 탑명이다.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썼다. 각자는 정원(貞元), 계상(契想), 혜명(惠明),

혜보(惠保), 득래(得來) 등이 담당하였는데,

구양순(歐陽詢)·구양통(歐陽通) 부자의 서법이 어우러진 서체이다.

 

중앙에 보주를 두고 좌우로 용 2마리가 구름 속에 있다.

이수(螭首)

비신 위에는 방형의 이수(螭首)가 있다.

이수 하단에는 수직선으로 장식하였으며 수직선 위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하게 조각하였다.

구름 위에는 정면 2마리, 측면 각 1마리, 후면 3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상면에는 보주(寶珠)를 중심으로 2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9마리의 용이 이수에 조각되어 있다.

전면에 용 3마리,  상부에 용 2마리가 부조되어 있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기본적인 외형은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와 유사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두가 입을 다물고 있는 점, 귀갑 위에 새겨진 문양의 형식화가 진행된 점,

이수의 운룡문 조각이 평판적인 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

승탑과 탑비의 건립은 문도들의 주도로

현종과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광종 타계(975) 이후 경종·성종·목종 대에는

승탑을 조영했던 사례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즉 고려 초 승탑과 탑비의 건립 전통이 잠시 단절되었고,

현종 대에 와서 원공국사탑비의 건립을 계기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는데,

원공국사탑비가 인근에 있는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와

조각 기법상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상 대좌(臺座)

금당의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불상 대좌(臺座)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積心石: 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이 있다.

이와 같은 대형 불좌(佛座)는 여주 고달사지석조대좌(보물 제8호)와

남원 만복사지석조대좌(보물 제31호)가 있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8호 높이 1.57m 고려 시대(10세기)

 

@남원만복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31호 높이 1.5m 고려 시대(11세기)

원주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居頓寺址三層石塔)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750호

크기: 높이 5.4m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은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삼층석탑이다.

1983년 12월 27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50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을 세웠으며,

전형적인 신라 3층 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일반형의 다른 석탑과 달리 사각의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3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방단(方壇)을 만든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방단의 남쪽 면에는 돌계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흙을 둔덕지게 쌓아 지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은 4매의 장방형 판석을 엇물리기식으로 결구하였고,

위에 상층기단 하대석 또한 4매의 판석을 동일형식으로 쌓았으나,

지대석과는 방향이 다르다.

 

하층 기단의 구성은 판석 사이에 장방형 판석을 끼워놓고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새겼다.

하대중석(下臺中石) 또한 4매로서 각 면의 중앙부에서 접합시켰다.

그 상부 낙수면 위로는 중석 받침과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상층기단 중대면석(中臺面石)은 남북 쪽에

양 우주가 표현되게 장면(長面)을 대고,

동서 면에 탱주만 새긴 면석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수평한 낙수면을 가진 상대갑석(上臺甲石) 위로는

몰딩과 각형(角形) 탑신 굄을 만들었다.

 

탑신부 층마다 옥신·옥개석을 한 돌로 구성하고,

각 층 옥신에 양 우주를 새겼다.

옥개부의 낙수면은 두꺼우면서도 끝부분을 살짝 반전시켰고,

옥게 받침은 각 5단씩 표현되었다.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굄으로 위층 옥신석을 받쳤고,

옥개석마다 전각부(轉角部)에 풍탁(風鐸 :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 위에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초층탑신이 기단부보다 급격하게 줄어 왜소한 감을 주며,

옥개가 반전하면서도 전각을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마무리한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형식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러나 탑신 자체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옥게 받침이 5단인 점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형식을

충실히 계승한 수작이라 하겠다.

 

@배례석

탑 옆에 있던 배례석(拜禮石)은 135cm ×85cm의 크기에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거돈사지 금당지와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길옆 석축 위에 있는 버티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무려 1000년에 달한다고 한다.

찬란했던 옛 거돈사의 흥망을 한 자리에서 지켜보며

옛 영화를 말하는 듯 위용을 떨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뿌리 쪽의 둥치가 축대의 바위를 감싸고 있어

<돌을 먹는 나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