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興法寺址眞空大師塔─石棺)

2021. 9. 1. 19:47문화재

 

일전에 원주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탐사하면서

귀경 시간 때문에 포기했던 흥법사지를 다시 찾으면서

문득 옛적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시장에서 본

진공대사탑과 석관이 기억이 나 묻어 두었던

사진첩에서 찾아 흥법사지를 포스팅하기 전에 올려본다.

 

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옛 흥법사(興法寺)의 절터로서 창건 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현재 흥법사지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을 뿐이며,

사찰 터 주변 일대는 양파밭으로 변해있다.

 

흥법사에 대한 기록은

남북극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839~857년)6년에 조성된

국보 제104호인 <전(傳) 흥법사지염거화상탑>에 흥법사가 나오는 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또 고려사 세가 태조 23년 조에

'추7월왕사충담사 수탑우원주영봉산 흥법사왕친제비문

(秋七月王師 忠湛死 樹塔于 原州靈鳳山興法寺 王親製碑文)'이라는 기록에도

흥법사가 기록되어 있다. 충담은

진공대사(眞空大師: 869~940)의 속명(俗名)으로

신라 시대 사람인데 당나라에 가서 정원대사(淨圓大師)에 수학하고 돌아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왕사가 되신 분이다.

대사의 비문에서는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친찬하였다고 하였으니,

고려 초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 흥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기록을 알 수 없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나

1693년(숙종 19년)에 도천서원(陶川書院)이

이곳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 폐사되었다.

원주 흥법사지는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1984.06.02. 지정).

* 흥법사지의 유물과 유적 *

흥법사지에는 국보 제104호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 진공대사탑 및 보물 부석관,

보물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이 중에서 傳 흥법사 염거화상탑, 진공대사탑 및 보물 부석관은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으며, 2005. 10. 28. 용산 국립중앙 박물관이 개소되면서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興法寺址眞空大師塔─石棺)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보물 제365호

건립 시기: 940년경

크기: 승탑 높이 2.91m, 석관 높이 0.48m

소재지: 국립중앙박물관

 

진공대사(眞空大師, 869∼940)는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법안종의 선승이다.

신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계율을 배우다 입당하여

정원대사(淨圓大師)의 법을 수학하고 

귀국 후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943)으로부터

왕사의 예우를 받고 흥법사에 주석하였다가 입적(入寂)하였다.

 

석관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동했던

진공대사 충담(忠湛)의 유골을 모신 승탑과 관련 유물을 담았던 석관이다.

탑비가 건립된 940년(태조 23) 무렵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지에 있었다.

1931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 원당형(圓堂形)으로 장식이 풍부하다.

여러 장의 판돌을 조합하여 네모난 바닥돌(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승탑을 세웠다.

 

하대석은 평면이 팔각형인데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받치기 위해 같은 팔각형으로

2단의 몰딩(molding)을 두어 자리를 마련하였다.

하대석의 아랫단에는 책상다리 문양의 안상을 새기고

그 틈새마다 다양한 모습의 연잎을 새겼는데,

마치 승탑이 연못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잎 표현은 조선 시대의 민화와도 통하고,

경복궁 아미산 굴뚝의 연잎 표현과도 유사하여

양식의 기원이 고려 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하대석 윗단은 2개의 볼록한 면을 가진

복판 형식의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좌의 형태인데,

팔각대좌 각 면의 중앙에 하나씩,

그리고 모퉁이마다 하나씩 잎이 표현되어 모두 16개의 연잎이 돌려져 있다.

모퉁이에 있는 잎의 끝단은 ‘귀꽃’이라고 하는

화려하게 말려 들어가는 장식이 솟아오른 형태로 마감되어 있다.

이를 통해 아래로 향한 복련좌의 안정감과

위로 솟구치는 역동적인 두 힘의 조화를 보여준다.

그 위로는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팔각형의 받침이 솟아있다.

 

 

 

중대석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화염보주를 감싸고 돌며

웅비하는 모습을 앞뒤 대칭으로 표현하였는데,

깊이 있는 양각 기법으로 역동적이다.

포효하는 용의 얼굴이나 몸에 난 비늘,

움켜쥔 발톱 등은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상대석은 연꽃잎이 위를 향한 앙련좌인데 크기가 하대석보다 약간 작아

전반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표면에는 복판의 꽃잎이 두 겹으로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하대석처럼 16개의 잎을 새겼으나 귀꽃은 만들지 않았다.

그 위로 팔각의 평평한 낮은 단을 마련하고

탑신에 해당하는 팔각원당형의 목조건축형 부재를 올려놓았다.

 

 

 

 

팔각 탑신부에는 서로 대칭되는 두 면에만 문비가 조각되어 있는데

자물쇠가 걸려있는 모습이다.

팔각의 모퉁이마다 낙양(落陽: 기둥과 문지방을 장식하는 구름 모양의 부재)이

부조되어 있고, 모퉁이 중간 부분에는 화려한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탑신부에서 특이한 것은 탑신의 모서리를 장식한 이 꽃문양인데

이런 양식은 거돈사지의 원공국사 승탑 탑신에서도 볼 수 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승탑 탑신면의 문양

 

 

지붕돌은 팔각평면형으로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밑면에는 3단의 괴임대를 두어 마치 목조건축의 공포부를 대신한 듯하고,

그 위로 2중의 서까래를 새겨 목조 건물의 겹처마를 묘사하였다.

특히 처마 서까래를 둥글게 처리하고 겹처마의 서까래는 네모나게 조각하여

실제 목조건축의 처마를 연상케 한다.

완만한 경사면을 지닌 지붕은 모서리마다 내림마루를 높게 표현하였다.

추녀에서는 경쾌한 반전을 주어 위로 솟구치는 느낌을 들게 하였는데,

끝에는 높은 귀꽃을 달아 상승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또한, 지붕의 면마다 기왓골을 표현하였고,

추녀 끝도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를 얹은 것처럼 조각해 사실성을 더하고 있다.

상륜부는 보개(寶蓋)만 남아 있었는데 위 보주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면서 보안한 모양이다.

 

 

석관

별도의 지대석 위에 놓인 석관은

진공대사의 유품을 경문(經文) 등과 함께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혹은 승탑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대사의 유골을 가매장했을 때 사용했던 석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직사각형의 복두형 덮개돌은 단순한 형태이며,

석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하단부에는

이 석관을 받치는 듯한 책상다리 모양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비록 일부 깨진 부분도 있지만, 현재 전하는 승탑에 딸린 석관 가운데

원래의 모습을 거의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흥법사터 진공대사탑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