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법천사지

2021. 8. 21. 21:58문화재

 

현재 원주시 관내에는 나말여초에 번창했던 3곳의 사지(寺址)가 있다.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로 남한강 유역에 자리한 사찰들이다.

법천사지(法泉寺址)는 원주시 부론면 오봉산 기슭에 있는 법천사의 옛터이다.

허균의「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에 의하면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광국사현묘탑비문」에 지광국사가

구족계를 받는 999년 이전에 법천사를 방문하였고

국사가 된 후 1067년에는 이곳으로 돌아와

3년 후 열반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전에 창건되어

고려 중기에 크게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한명회, 서거정 등이 이곳에서 수학하였음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어 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89년까지 존속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절터는 마을과 전답으로 변하게 되었다.

법천사지는 1982년 11월 3일 강원도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8월 31일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66호로 지정되었다.

사지(寺址)에는 법당 등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석조물로 고려 선종 2년(1085)에 건립된

높이 5.54m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 1기와

법천사지 당간지주(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

현재 경복궁 경내에 있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4호),

그 밖에 석탑재. 파불 등 일부가 보존되고 있다.

법천사지는 현재까지 발굴 중이다.

 

 

 

 

 

 

 

 

 

 

 

 

금당의 옛기둥을 받친 주춧돌

공식명칭: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국보 제101호

건립 시기: 1070∼1085년

소재지: 국립고궁박물관

(본방 원주법천사지지광국사탑 참조)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法泉寺址智光國師塔碑)

시대: 고려전기

크기: 전체 높이 4.55m, 비신 높이 2.97m, 비신 너비 1.42m

문화재 지정: 국보 제59호

건립 시기: 1085년 고려 13대 宣宗 2년)

비문 지은이: 정유산

비의 글씨: 구양순체로 안민후의 글씨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지광국사현묘탑과 함께

절터의 동쪽 영당(靈堂) 구역에 정면에서 바라보고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탑은 일제강점기에 외부로 반출되었다가 현재 경복궁 내에 옮겨져 있다.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 984년~1070년)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이며 법상종의 고승이다. 해리(海麟)는 그의 휘다.

본관과 성은 원주 원(元)씨, 자는 거룡(巨龍)이다.

현화사를 중심으로 법상종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당시의 문벌귀족인 인주 이 씨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관웅에게 처음 받은 법호는 해린(海麟)이었는데,

관웅이 어느 날 꿈에 바닷가에 가서

손으로 직접 작은 고기를 잡아서 삼키고 꿈을 깨었는데,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어(魚)는 비늘(鱗)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린(麟)을 린(鱗)으로 고쳐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고쳐 지었다.

 

처음 강진호도(講眞弘道)라는 이름을 받은 뒤에,

승계가 올라갈 때마다 각각 명료돈오(明了頓悟),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

탐현도원(探玄道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

구행요성도수(具行了性導首), 융소랑철(融炤朗徹) 등의 법호를

당대의 왕에게 내려받았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국사의 생애를 보면

원주 법천사(法泉寺)에 있던 관웅(寬雄)을 찾아가 유식학을 배웠다.

이때 관웅이 ‘해린’이라는 법호를 지어줬다.

관웅을 따라 상경, 개경 해안사(海安寺) 준광(俊光)의 제자가 되었다.

999년(목종 2)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1001년에 숭교사(崇敎寺)가 만들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된 대선(大選)에 급제, 대덕(大德)이 되었다.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 평양 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덕종 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을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인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

1054년 현화사(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법상종 교단을 이끌었다. 1056년 왕사(王師)가 되고,

1058년 봉은사(奉恩寺)에서 국사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059년 내전(內殿)에서 개최된 백고좌(百高座)의 제일 설주(說主)가 되었으며,

1067년 은퇴하여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 머무르다가,

1070년(문종 24)에 8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승탑은 지광국사 해린이 입적한 1070년경 직후에 조성되었지만,

지광국사탑비는 입적 후 15년이 지난 1085년(문종 24)에 건립되었다.

탑비의 글씨는 당대의 명신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명필 안민후(安民厚)가 해서(楷書)로 써서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이 새겼다.

글씨는 구양순체이며 부드럽고 단아하게 작성되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우리나라 단일 석조 조형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는데,

지광국사탑비 역시 승탑과 마찬가지로 세련미가 강조되어 있다.

지광국사탑비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약 4.55m, 비신(碑身) 높이 2.97m, 너비 1.42m의 대형 탑비이다.

탑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와 귀부는 화강암인데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탑비의 음기에 해린의 제자를 열거하였는데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선후사이몰세자(先後師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 대덕으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거기 실린 인명이 1400명에 이른다.

<이수부(螭首部)>

이수부(螭首部)는 비운문(飛雲紋)의 조각을 하였고,

이수(螭首)의 상면에는 귀꽃 형태의 솟음장식이 달려 있으며

이수 중앙에 탑의 상륜부와 같은 형태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제액(題額)은 이수부에 부조하는 데

지광국사탑비에는 비신에 부조되어 있다.

 

 

 

<비신부(碑身部)>

지광국사탑비는 이수부와 귀부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비신부만은 유독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대리석은 견고한 화강암에 비하여 조각하기가 쉬우므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할 수가 있는 장점이 있다.

대표적인 승탑으로는 경천사지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을 꼽을 수 있다.

비신은 연화문이 조각된 비좌 위에 세워져 있다.

 

 

제액(題額)은 일반적으로 이수부에 조각해 놓는데

지광국사탑비는 비신부에 조각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탑비명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로 하였는데

탑비에는 『지광국사현묘탑비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題額)』로 되어 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지광국사탑비>로 줄여져 있다.

(비신의 제액은 전서체로 쓰여 있는데

이것을 전액(篆額) 또는 두전(頭篆)이라고 한다.)

(비신의 전문은 본방 원주법천사지지광국사현묘탑 한글번역분 참조)

비면(碑面)의 외주(外周)에 보상(寶相) 덩굴무늬를 둘렀고,

양 측면에는 농주(弄珠) 하는 쌍룡을 음각하였다.

개석(蓋石)은 위가 활짝 벌어진 형태로서 통식(通式)을 벗어났으며

네 모퉁이의 전각(轉角)이 우뚝 솟고 귀꽃이 달려 있다.

비신의 양 측면은 화려한 두 마리 용 문양과 보주가 독특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용 문양의 이러한 형태는

고려 시대 법상종계 비석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비문에 의하면

「입적(入寂)하던 전날 밤에 등불만 한 크기의 두 개의 별이 나타났고,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 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라고 한

기록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귀부부(龜趺部)>

귀부(龜趺)는 넓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고

귀수(龜首)의 목은 길게 직립하여 전면을 향하였으며,

머리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고, 몸체는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네발로 받치고 있다.

 

 

 

 

 

지광국사탑비의 용두는 목이 길게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독특한 것은 턱 지지대를 조각해 놓았다.

이는 같은 지역에 있는 흥법사지나 거돈사지 탑비의 용두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 승탑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귀부는 6각형 귀갑문 안에 <王> 자가 부조된 것 또한 이색적이다.

 

 

 

 

<법천사지 고목>

원주 거돈사지에는 수령이 1000년이 넘는다는

거대한 느티나무를 볼 수 있는데

법천사지 또한 이 고목 또한 그렇다.

나무는 나이테가 많아질수록 풍미를 더 한다고 하지만,

전란(戰亂)의 화마(火魔)로 금당(金堂)은 사라지고 폐허가 되었지만

허물어진 옛터 한구석에 <서원>이라 새겨진 석주와 함께

찬란했던 옛 시절을 꿈꾸듯 속은 문드러지고 공동(空洞)이 되었지만,

그래도 썩은 가지 속에서 새잎을 돋우며 올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더없이 느껴져돌아서는 길손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