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2021. 8. 19. 20:57문화재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을 만난 것은 아마도 8년 전인가 보다.

경복궁 단풍놀이를 갔다가 일몰과 더불어 은행나무의 노랑 단풍 빛에 취하여

국보로 지정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보고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가

이번 법천사지 탐사를 갔다가 그 탑이 있었던 옛 자취를 보고는 생각이 나서

그때의 어리석음을 탓하면서, 옛 자료를 찾아

부실한 자료는 문화재청의 사진과

한국 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빌어 올려본다.

 

 

공식명칭: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시대: 고려

문화재 지정: 국보 제101호

건립 시기: 1070∼1085년

소재지: 국립고궁박물관

 

원주 법천사지지광국사현묘탑으로 알려진 이 승탑의 공식 명칭은 위와 같다.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 뒤편 탑비전 서쪽에 함께 있었으나,

1912년 해체되어 일본 오사카 후지와라 남작 가문의 묘지로 이전되었다가

1915년 조선총독부의 명으로 반환되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근처로 옮겨졌다.

 

이후 동문 가까이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세워지자 박물관 경내에 있게 되었다.

한국전쟁 시 포탄의 피해로 옥개석이 조각나 흩어져 있는 것을

195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건보수공사를 시행하여

현재 위치로 복원되었으며 이때 탑신 상면에서 방형의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내부는 비어 있었으며 뚜껑은 4, 5쪽으로 파손되어 있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궁내 대부분 석조물도 함께 옮겨졌으나,

이 승탑은 이전 시 파손의 위험으로 인하여 그대로 남게 되었다.

 

허균의「유원주법천사기(遊原州法泉寺記)」에

법천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광국사현묘탑비문」에 지광국사가 구족계를 받는 999년 이전에

법천사를 방문하였고 국사가 된 후 1067년에는 이곳으로 돌아와

3년 후 열반하였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전에 창건되어

고려 중기에 크게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한명회, 서거정 등이 이곳에서 수학하였음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어 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89년까지 존속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절터는 마을과 전답으로 변하게 되었다.

 

한편 당간지주만 남은 절터와는 달리 절터 뒤편 동쪽

산자락 외곽지역 석축 위에 있었던 탑과 탑비는

20세기 초까지도 원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현재 탑은 1912년 이후 일본을 거쳐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고궁박물관) 영역으로 옮겨졌으며

탑비만 원위치에 남아 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2층 기단, 탑신, 옥개석, 상륜부로 안정감 있게 올린

방형 승탑으로, 빈틈없이 각종 조식이 장식되어 있다.

 

상륜은 낮은 받침, 팔메트형 앙화, 복발, 보륜,

옥개석과 유사한 천개 형태의 8각형 보개,

2중의 연화 받침대에 올린 보주 등 완전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상륜부의 잘 보이지 않는 보개 하단에도 연화를 새기는 등

각 부재에 빠짐없이 문양을 장식하였다.

 

가릉빈가
여래상

 

옥개석도 1석으로 전체 모습은 우동마루가 표현된 일반 석탑의 옥개석 형태지만

천개 모습의 처마에는 네 모서리의 가릉빈가를 비롯하여

보주, 불상, 비천 등이 가득 장식되었으며

밑으로 영락이 늘어진 휘장이 장식되어 있다.

상단에는 낮은 괴임을 두어 상륜을 받치고 있다.

가릉빈가와 불상을 묘각 한 것은 연곡사 동승탑(국보 제53호)에서도 볼 수 있다.

 

보물 제53호 연곡사승탑의 가릉빈가상

 

면석에는 3개의 대나무로 표시된 우주를 새기고

남·북면은 문비를, 동·서면은 2구씩의 창을 모각하였는데,

문과 창은 모두 첨형 아치 형태이며 위로 영락이 늘어져 있다.

문비형(門扉形)을 묘각 한 것은 사리를 봉안했다는 의미이다.

 

 

기단은 하층 기단 하대석이 3단으로, 제1단은 4매로 층단과 같은 낮은 면에 하대,

우주와 탱주, 갑석을 모각한 후 각 면에 귀꽃이 솟은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위로 낮은 1단의 괴임이 있어 상층이 올려져 있다.

네 모서리에는 용의 발톱 같은 것으로 덮여

지대석까지 이어지며 탑을 지면에 안착시키는 듯하다.

제2단도 4매로, 측면 중앙에 귀꽃이 솟은 연판을 이중으로 장식하였으며

윗면에는 각, 호의 윤곽을 둘러 윗단을 받고 있다.

제3단은 하층 기단 중대 면석이 함께 도출된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우주와 탱주가 모각된 3단의 면석, 각, 호, 각의 괴임대,

역시 우주와 탱주가 각출 된 하층 기단 중석이 차례로 표현되었다.

3단 면석에는 국화문이, 하층 기단 면석에는 구름과 화염 속의 보주가 조각되었다.

하층 기단 갑석은 1석으로 측면에 장막을 표현하는 2단의 횡선문과

연주문이 있으며 상면에는 3중의 연화가 둘려 있으며

4 귀퉁이에는 사자가 안치되었던 2개의 원공이 있다.

하면에는 낮은 부연을 두고 상층 탑신을 받치는 곳에는 호형의 윤곽이 둘려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1석으로, 탑신석과 같이 높으며

각 면에는 2개의 장방형의 액자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 남쪽 사리봉송장면,

북쪽 산수문, 동서쪽에 운룡문과 신선문을 새겼다.

 

 

 

갑석은 상단, 네 귀퉁이가 살짝 올려져 반전하고 있으며

측면에는 2단의 장막과 연화를 장식하였는데

상단 장막은 횡선과 연주문으로,

하단은 걷어 올려 끈으로 묶어 늘어진 모습이다.

갑석 위로는 1매의 괴임석을 두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통일신라말 조성된 여주 고달사지승탑(국보 제4호)에서 나타나 있듯

선종의 발달과 전래로 9세기부터 중시되어 조성된 우리나라 승려의 묘탑은

주로 8각 원당형이며 실물로 남아 있는 팔각원당형의 시초로는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조성된 국보 제104호인

전(傳) 원주 홍법사지염거화상탑으로 보고 있다.

 

국보 제 4호 여주고달사지승탑
국보 제104호  염거화상승탑

원당형 승탑은 그 후 고려 초까지 이어져 왔고

조선 시대 태조 3년(1394)에 조성된

국보 제197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에서 보듯

그 이후에도 팔각원당형의 승탑은 이어져 있다.

그런데 법상종 승려인 지광국사탑은 유독 이러한 큰 틀을 벗어나

팔각원당형이 아닌 방형(方形)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승탑

그뿐만 아니라 지광국사는 법상종 승려로,

그의 탑은 기존의 선사 중심으로 조성되던 승탑의 조형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탑의 평면을 방형으로 변화시키고,

탑에 장식되지 않던 국화문, 변용된 귀꽃형 연화문,

대나무로 대체한 기둥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 것과 상층기단 면석의 사리봉송도,

산수문, 신선문 그리고 탑신석의 첨형 아치형 문비와

창문 조각은 당시의 동서문화교류, 회화, 사상적 배경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 승탑의 의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