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비상4) 보물 제649호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2021. 5. 12. 18:38문화재

 

우리나라 7대 불비상 중 비암사와 청주박물관에서 3기를 순례하고

청주에서 마지막으로 2기가 소장된 청주 연화사를 찾았다.

공주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된 2기는 다음번 기회로 미루었다.

청주 연화사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부모산로 134 (비하동)에 있는 사찰로,

고려 시대 연월사로 창건됐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사,

그 후 1928년 청암 스님(보안 스님의 부친)에 의해

연화사로 재(再)창건된 사찰이고 한다.

 연화사(蓮華寺)라는 이름은 청암 스님께서 중창 불사를 앞둔 어느 날

절터에 연꽃들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피어 만발한 꿈을 꿔 짓게 됐다고 한다.

절은 지금의 터보다 조금 아래에 있었으나

1964년 2대 주지인 보안 스님이 퇴락한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창해 지금의 위치와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7기뿐인 불비상 중 2개의 보물을 지닌 사찰이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찰로 알았는데

전각은 비로전과 삼성각이 전부였다.

생각해보니 연화사의 위치가 현재 청주시가 사적문화지로 지정해 놓은

부모산에 자리 잡고 있어 건축 제한에 묶여

새로운 중창 불사가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사료된다.

2기의 불비상은 비로전 안에 유리상자 속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번 탐방은 불행히도 불비상 2기가 마모도 심하였지만,

법당이 너무 어두워 사진 촬영에는 실패했다.

다음번 다시 시도하여 포스팅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청주로 내려가기가 힘들 것 같아

문화재청의 사진을 폄한 것으로 대신하였다.

 

불비상명: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世宗市 蓮花寺 戊寅銘佛碑像 및 臺座)

문화재지정: 보물 제649호

시대: 통일신라 시대

소장: 세종시 연화사

지정일: 1978.12.07.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燕岐 蓮花寺 戊寅銘佛碑像 및 臺座)는

세종시 연서면의 연화사에 소장된

두 개의 비상(碑像) 중 하나로 1961년에 발견되었다.

보물 제649호로 지정된 이 불비상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비상으로

측면에 “무인(戊寅)”의 명문이 있는데,

이는 백제가 이미 멸망한 이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1년 연화사 근처 쌍류리(雙流里, 일명 권터굴)의

생천사지(生千寺址)에서 수습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유사한 양식을 지니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제108호)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보물 제367호) 등이

모두 세종특별자치시 이전의 행정명인

연기군 비암사 등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연기비상파(燕岐碑像派)’ 양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납석(蠟石)으로 된 비상의 네 면에 돌아가며 불상을 새겼다.

앞면에는 통견의 가사를 입고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불좌상을 주존으로

양협시보살과 그 사이에 승려 상을 각각 표현하여

오존(五尊) 구성을 보이고 있다. 주존불은 방형의 상현좌(裳懸座)에 앉아 있고,

하체보다 상체가 매우 크게 묘사되었다.

이 위로는 장막과 영락이 드리워져 있으며,

하단에는 물결무늬를 바탕으로 연꽃 줄기,

혹은 기둥이 솟아 올라와 그 위에 화염보주가 얹혀있다.

그 좌우로는 공양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서방극락 정토에 머무는 아미타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뒷면에는 격자문을 배경으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새겼다.

아마도 반측면관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며,

한쪽으로 숙인 고개와 얼굴에 갖다 댄

커다란 오른손의 모습으로 반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좌우에는 중앙의 반가상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각각 향로와 꽃으로 보이는 지물을 들고 있는 보살상이 보이는데,

이렇게 보살의 공양을 받는 반가상은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크다.

그 하단 좌우로 난간 문양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물결무늬로 표현된 연못으로부터 연꽃과 연봉오리가

마치 반가상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솟아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측면은 중앙에

행간(行間)을 만들어 명문을 음각하였다.

그리고 상단에 선정인 불좌상, 하단에 卍자형 난간 문양을 부조하였다.

 

대좌는 양감이 풍부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 2단의 연판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 윗면 앞쪽에는 무엇인가를 꽂았던 원형·방형의 구멍이 남아있다.

비석의 촉과 대좌의 홈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짝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징이 비상에 새겨진 도상이 아미타 오존 상과

미륵 삼존상이 맞는다면, 정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정토로서,

그리고 뒷면은 반가사유상이 미륵 보살상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매우 중요한 불교미술사적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아미타불과 미륵불을 동시에 예배하던

법상종(法相宗) 신앙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어 주목된다.

 

 

연기 지역에서 발견된 비상들은 백제 시대의 옛 양식도 지니고 있지만,

명문 등에 나타난 관직명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백제 멸망 이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방정토를 주제로 한 새로운 도상이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신·구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특히 비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불상이

왜 연기군 지역에서 유행했으며, 이러한 상을 누가 발원했고

어떻게 봉안하고 예불했는가 등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