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卍자, 원이삼점, 일원상(一圓相)에 대한 소고(小考)

2021. 4. 11. 23:55사찰에 관한 상식

 

사찰의 전각을 보면 벽이나 지붕에 둥근 원만 있는 것도 있고,

원 안에 卍자를 그려 놓은 것도 있고, 3개의 둥근 점을 그려 놓은 것도 있다.

이 둥근 원을 일원상(一圓相)이라고 하는데

그 원상(圓相) 안에 그려진 卍 나 3개의 작은 원과

일원상은 각각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만자(卍字)

봉선사

卍字는 범어로는 스바스티카(Svastika)라고 하는데,

이는 수카(Sukha, 樂)와 아스티(asti, 있다)의 복합어로서

‘낙이 가득한, 행복이 충만한 곳’으로 풀이된다.

또 이를 Srivatsalksana (수리밧살크사나)나,

Srivatsa(슈리밧사)란 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모발이 말리어 겹치고 합해져 해운(海雲) 같은 모양이란 뜻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万字, 萬字, 卍字 라 한역되지만

그 뜻은 吉祥海雲(길상해운), 吉祥喜旋(길상희선) 이란 의미가 된다.

 

그러나 卍字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교나 절을 나타내는 기호로

또 부처가 지닌 성덕과 길상을 상징하는 표상을 가리키는 불교 기호로 사용되고 있다.

그 모양은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우만자(右卍字)와

왼쪽으로 도는 좌만자(左卍字)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卍자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세워 놓고 볼 때

앞에서 보면 卍 모양이 되지만 뒤쪽에서 보면

右卍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옛 조각에는 右卍자가 많으나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굳이 구별하지는 않는다

 

‘만(卍)’자의 의미도 다양하다. 태양의 상징,

흐르는 물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둥글게 선회하는 모발의 형상이라고도 하며,

신령한 빛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많은 학자는 이 표시가 인도불교에만 있었던 고유한 상징이 아니고,

인도 고대신화 속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 비쉬누(Vishnu)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서 卍자의 이 표지는 유럽·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에서 그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의 유래는 ≪화엄경 華嚴經≫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화엄경≫ 제48권에는 “여래(如來)의 가슴에는

훌륭한 분의 특징인 만자 모양이 있다.

이것을 길상해운(吉祥海雲)이라고 부른다.

조화가 자재한 마니보주(摩尼寶珠)로 장엄되어

온갖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가지가지의 광염을 둥글게 뿜어내면서

온 누리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온 누리를 깨끗하게 하는 묘음(妙音)을 내어서

온통 세계를 진리의 바다처럼 넘실거리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처의 97가지 훌륭한 모습 중 제53번째의 특징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 표지를 인도에서는 슈리밧사(shrivatsa)라 했고,

만자의 다른 변형들을 난디아바타라(Nandyavatara)·

스바스티카(Svastika)라고 불렀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역경승(譯經僧)이나

주석가들은 만(萬)이라고 통일하여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서 이 표지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화엄학의 대가인 혜연(慧苑)이다.

 

그는 ≪화엄경≫의 한역본과 범본(梵本)을 대조한 뒤,

“만자는 덕 있는 사람의 상(相)이요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이며,

한역본에는 17번, 범본에는 28번이 언급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표지는 ≪장아함경 長阿含經≫ 등의 소승불교 경전에서도

몇 회에 걸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었으나,

현재의 동남아시아 남방불교권에서는

사찰이나 불교 용구에 이 표시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대신하여 둥근 법륜(法輪)을

불교의 상징 표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만’자는 중국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권에서만 유행하였던

불교의 상징 표지임을 알 수 있다.

 

 

‘만’자는 그 변형까지를 포함하면 네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길상해운을 뜻하는 일반형으로서의 슈리밧사,

둘째는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머리카락 모양을 한 난디아바타라,

셋째는 행복이 있음을 상징하는 스바스티카,

넷째는 가득 찬 물병 모양을 한 푸르나가 타(Purnaghata)이다.

 

이들 중 마지막 푸르나가타를 제외한 세 가지는 불경 중에

모든 부처의 가슴 또는 머리에 나타난 모발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불상의 미간에 표시되는 백호(白毫)가 털을 의미했던 것과 함께

고대 인도인 또는 서역인이 지녔던 풍토적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네 가지 형태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첫째, 길하고 성스러운 바다의 구름을 뜻하는 슈리밧사를

≪화엄경≫에서는 ‘금강계(金剛界)를 상징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때의 ‘금강’은 번뇌와 미혹을 능히 파괴하는 힘을 가진 부처의 지혜를 뜻하고,

‘계’는 본성을 뜻한다. 지혜를 본성으로 하는 장엄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슈리밧사를 풀이하고 있다. 때로는 ‘용맹을 상징하는 깃발’이라고도 하는데,

그 깃발이 가는 곳에서는 모든 악마의 군사들이 항복하고야 만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만자기를 불교의 깃발로 대신하고 있다.

그 밖에도 슈리밧사는

마음·삼매(三昧)·반야(般若) 등의 뜻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둘째, 난디아바타라는 우선(右旋)·희선(喜旋)으로 번역되는데,

원이나 각의 중심에서 아기자기한 곡선을 그리면서

하나의 통일된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난디는 기쁨이라는 뜻인 만큼,

그것은 도(道)를 이룬 부처의 기쁨에 찬 모습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스바스티카는 유락(有樂)으로 번역되며, 두 가지 형이 있다.

그 하나는 열 ‘십(+)’자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 끝에 장식이 달린 종과 횡 두 개의 기둥이 교차한 형태이다.

원어 스바스티카는 ‘낙(樂)이 있다’, ‘잘 있다’, ‘저절로 있다’ 등으로 풀이되며,

이들은 다 불심(佛心)의 공덕, 불심의 만덕(萬德)중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들 의미를 축약하여 ‘성취’로 풀이하기도 한다.

 

넷째, 푸르나가타는 만병(滿甁)으로 번역되며,

비약적인 변형으로서 형태로는 만자와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의미로 볼 때는 동일한 뜻이 있다. 푸르나는 가득하다는 뜻이고

가타는 병이라는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병’, 곧 공덕의 구족(具足)을 뜻한다.

원래 부처의 공덕이나 그 마음을 상징했던 이상의 표시들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와 관련 있는

모든 것에 길상과 원만을 뜻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송림사

2)원이삼점(圓伊三點)

둥근 원 안에 그려진 이 삼 점을 「원이삼점(圓伊三點)』이라고 하며,

또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고도 말한다.

또 마혜수라(摩醯首羅, Makeśura) 곧 대자재천(大自在天)은

면상(面像)에 세 눈이 있는데 이 천주(天主)의 세 눈도 정립(鼎立)하여

그 형상(形狀)이 이(伊)자의 삼 점과 같다고도 설명되기도 한다.

이 원이삼점은 종파나 경전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되지만

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원이삼점(圓伊三點)을

삼보륜(三寶輪)의 의미로 상징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3점은 선정(禪定)과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일원상 안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상징하는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본방 ‘원이삼점(圓伊三點)과 실담(悉曇)’참조)

 

겁외사의 일원상

3)일원상(一圓相)

둥근 원 안에 아무런 그림이나 도식이 없는 원상(圓相)을

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이라 한다.

이는 禪門에서 견성(見性)의 경지 곧 깨달음의 절대 경지로 묘사된 것으로

鑑智僧璨(감지승찬)의 <신심명(信心銘)>에서

「圓同太虛 無欠無餘」라고 한 것과 같이

<圓相>은 至道, 大道, 眞如, 法性 등 절대의 표상을 의미한다.

또한 선(禪) 수행의 공안(公案)으로

전등록5에 「師가 僧이 옴을 보고 원상을 그렸는데

相中에 日字를 썼으나 승이 아무 대답을 못 했다.」라고 하였고,

벽암록 제69칙에 남전 보원(南泉普願), 귀종 지상(歸宗智常),

마곡보철(麻谷寶徹)이 광택사(光宅寺)의 혜충(慧忠)국사를 찾아갈 때

남전이 땅 위에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놓고는

「말해보라, 그러면 가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귀종은 그 동그라미 속에 펄썩 주저 앉아 버렸다.

마곡은 허리를 조금 굽혀 절을 했다.

이 거동들을 본 남전이 「너희가 그렇다면 가지 않겠다」고 하니

귀종은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리랴」 하고 말했다는

<남전일원상(南泉一圓相)>의 공안(公案)이 있다.

 

흔히 一圓相에는 97종의 분류가 있다고 하며

그 원조는 혜충국사(慧忠國師)라 한다.

혜충국사가 그의 법을 제자인 耽源(탐원)에게 전하고

탐원은 仰山(앙산)에게 전했으나

앙산은 한번 보고는 물려받은 그 전서(傳書)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원상은 潙仰宗(위앙종)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원불교가 이를 종지로 삼고 있다.

 

@혜충국사(慧忠國師): 중국 하남성(河南城) 남양(南陽)의 백애산(白崖山)에 살았던

慧忠國師(?~775)는 六祖 혜능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수행이 끝나자 백애산에 암자를 짓고 40여 년간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道行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불려가서

唐의 肅宗, 代宗 2代를 지도하는 국사가 되었다.

대력 10년(775년)에 130세로 죽었다.

일원상은 남양 혜충이 처음 그리고 이를 그의 제자 탐원응진화상에게 전하고

응진화상이 위앙종의 창시자인 앙상혜척에게 전한다.

@탐원응진화상(耽源應眞和尙): 육조 혜능대사의 법을 이은

남양 혜충국사의 제자로 위앙종의 창시자인

앙산혜적에게 비서(祕書)를 전한 선승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는 일원상(一圓相)은

선가에서 수행지침의 하나로 삼고 있는 십우도(十牛圖)에서 비롯된 것인데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며

견성(見性)에 이르는 과정을 열 단계로 간명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이 십우도는 보명(普明) 선사가 그린 목우도(牧牛圖)와

송의 곽암(廓庵) 선사가 그린 십우도(十牛圖)가 있다.

 

일원상은 보문선사의 목우도에서는 10도(圖)에,

곽암선사의 십우도에서는 10도(圖) 중 제8도(圖)에 묘사되어 있다.

이는 보조국사의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진심식망(眞心息妄)에서 보면

다섯 번째의 <泯心愍境(민심민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해설을 보면 「마음과 대상을 없애는 것이다.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에 있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이에 안팎의 마음과 대상이 함께 비었는데

망심이 무엇을 쫓아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관계(觀溪) 스님도

‘시방에 벽이 없고 사면에 문도 없어 발가벗었고 맑디 밝다’ 하였다.

즉 조사들의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은 흘러가니 온 천지가 적적하게 비였구나> 하였다.

또 <사람도 소도 모두 볼 수 없으니 정히 달 밝았을 때로다> 하였다.

이것은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라 하였다.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는 원불교의 일원상은

창건주 소태산이 20년간의 구도 과정에서 도달한 대각의 심경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전에 상징한 것으로

그는 이 일원이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 자리로서 생멸 없는 도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을 두어 기틀[相] 을 지었다고 표현하였다.

 

또 그의 저서 『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일원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이며,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대소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生滅去來)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善惡業報)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現自在) 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