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7. 23:10ㆍ사찰에 관한 상식
(시바)
원이삼점(圓伊三點)과 실담(悉曇)
금강경을 보면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형상을 쫓다 보면 본질을 놓친다는 이야기인데,
사찰 탐방을 하다 보면 전각(殿閣)과 불상(佛像),
그리고 신중탱 등 불화(佛畫)는 유심히 보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그중 하나가 바로 전각의 두 지붕 사이, 즉 합곡된 부분에 그려진 원형 안에
3개의 점이 놓인 그림을 무심히 보고 넘기기 일쑤다.
둥근 원아래 3점이 그려진 이것은 그림이 아니고 실담(悉曇)이라는
고대 인도의 언어인데 우리는 이를 그림으로 그냥 쉽게 간과하고 지내온 것이다.
둥근 원 안에 그려진 이 삼점을 「원이삼점(圓伊三點)』이라고 하며,
또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고도 말한다.
실담(悉曇)이란 " 완성 된 것"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梵語)의 싯담(siddham)의 음사어로,
칠담(七曇), 실담(悉談), 칠단(七旦), 실담(肆曇), 실단(悉壇) 등 갖가지로 표기되지만,
일반적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이 실담(悉曇)이다.
당(唐)나라때 스님인 지광(智廣)의 "실담자기(悉曇字記)에 보면
"실담은 천축의 문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광스님은 중국의 고승전에도 다만 선림사지광(禪林寺智廣)으로 나올 뿐 별도 기록이 없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천축국(天竺國)의 발생은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8년) 때
신독국(身毒國)의 후예(後裔)로서 한(後漢: 25~220년) 나라 때 천축국(天竺國)이 생겨났다.
천축국(天竺國)에서 불경이 들어오니까
수(隋:581~619년)나라 때 이를 싯담(siddha)이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오늘날 사용하는 실담은 산스크리트의 문자로, 자음(字音)과 자의(字意) 등
일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산스크리트를 표기하는 문자의 서체,
서법, 산스크리트 문법 등 모두를 포함한 광범위한 말이 되었다.(출처: 위키백과)
실담(悉曇)이란 말은 기원후 6~9세기경에 걸쳐 북인도를 중심으로 유행,
발달한 서체로 정확히는 실담자모형(SiddhamaatRkaa-type)을 가리키는 말인데,
실담 또는 싯담어로 불리는 이 언어는 천축국의 음운학자 파니니(Pāini)에 의해서
최초로 문자로 만들어졌는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범어(梵語)라는 말이 이에 비롯된다.
연대로 치면 한(漢: 기원전 206~220년)나라 이전이므로 약 2300여 년 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온 범어는
약 2300년 전 북인도 천축국에서 만들어진 언어로 이 언어가 바로 실담(悉曇)이다.
실담(悉曇)의 이자(伊字)는 3점으로 이루어지고,
이들 3점이 세로줄도 가로줄도 아닌 형태이므로,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등 옛적 고대신앙에서부터 삼보(三寶)로 상징되어 인용되어 왔다.
(드루이드 교단의 삼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알려진 다신교인 드루이드 교단은
영원불멸을 신봉하여 종교적인 제의(祭儀)를 행사할 때
오래전부터 3개의 동심원으로 된 나선형의 원들의 상징을 사용해 왔다고 한다.
또한, 고대 교회의 예배를 집도하는 주교복에도 삼보 상징이 새겨져 있었으며,
로마 교황청 바티칸을 호위하는 호위병들이 입는 망토에도 삼보 상징이 그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서 십자군을 파견했을 당시에도
십자군이 사용한 방패와 탬플기사단(성전기사단)의 기사들이 입은 망토에도 삼보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의 삼보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
(천주교 삼보)
불교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상징인 문장으로
원이삼점(圓伊三點) 즉 삼보륜(三寶輪)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3점이 선정(禪定)과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일원상 안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상징하는 심불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원이삼점(圓伊三點)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먼저 원이삼점을 둘러싸고 있는 큰 원은 '우주 법계'를 나타낸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명으로는 큰 원은 '원융(圓融)'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원융(圓融)이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모든 것에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뜻한다.
(건봉사 석주)
안에 있는 세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다.
먼저 이 세 점은 가로나 세로가 일치하지 않고
삼각의 관계에서 물(物)의 불일불이(不一不異)
또는 비전비후(非前非後)를 나타낸다고도 설명한다.
또는 모든 종류의 삼법(三法)이 삼즉일(三卽一), 일즉삼(一卽三),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전비후(非前非後)임을 비유하는 글자라고도 설명한다.
또는 이 세 점은 각기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상징한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를 삼보륜(三寶輪)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또는 이 세 점은 각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涕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한다고도 설명한다.
그래서 각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중하지도 않으며,
모두 평등하고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부여 무진암 마헤수라(예적금강))
또는 이 세 점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불의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법신 보신 화신이 합하여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신(法身)은 해탈의 법인 진리 자체를 뜻한다.
또 보신(報身)은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공덕이 갖추어진 불신(佛身)을 뜻한다.
또 화신(化身)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투시는 모습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신 보신 화신은 그 어느 것이든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서 단독으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이 원이삼점은 이 세 가지 법이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비밀장(秘密藏)이라고도 한다.
또 이 세 점은 각각 열반의 3 덕인 법신, 해탈, 반야가
서로 상즉(相卽)하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남본열반경』권2 애탄품(哀歎品)에서는,
이것들을 가지고 열반의 내용인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이
상즉(相卽) 불리(不離)의 관계에 있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_홍법원 사전]
(선운사 신중탱 /예적금강이 상위에 있다)
또 관정(灌頂)의 『열반경소(涕槃經疏)』 권 6에는
이(伊)에 신구(新舊) 양자(兩字)가 있다고 말한다.
별교교리의 융력불융(融歷不融)은 구이(舊伊)와 같고,
원교융즉(圓敎融卽)의 이(理)는 신이(新伊)와 같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출처_홍법원사전]
여기서 융(融)은 원융(圓融) 즉,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말한다.
또 역(歷)은 격력(隔歷) 즉, 서로 떨어짐(격(隔)이 있어 따로따로 있는 것을 말한다.
원융(圓融)은 사물 본성의 평등 상에서 무차별 절대를 의미하고,
격력(隔歷)은 사사물물의 차별적 현상에서 차별 상대라고 하는 의미에 가깝다.
(양주 회암사 신중도)
또 『법화현의(法華玄義)』 권5 하 등에는
이것을 삼덕(三德) 삼보리(三菩提) 삼불성(三佛性) 삼관(三觀) 등
제종의 삼법에 배당하여 원이(圓伊) 또는 진이(眞伊)라고도 한다. [출처_홍법원사전]
한편 마혜수라(摩醯首羅, Makeśura) 곧 대자재천(大自在天)은 면상(面像)에 세 눈이 있는데
이 천주(天主)의 세 눈도 정립(鼎立)하여
그 형상(形狀)이 이(伊)자의 삼점과 같다고도 설명된다. [출처_홍법원사전]
이러한 삼점(三點)은 정(正) 삼점과 역(逆)삼점의 형태로 고대로부터 사용되었으며,
불교적 기반 외에도 기독교의 '성상패'에서도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사용됐던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도 조계종 문장(紋章)으로 원이삼점으로 ‘삼보륜(三寶輪)’을 사용하고 있듯이,
이 삼보륜이 상징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선정(禪定)과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일원상 안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상징하는
3개의 점이 찍혀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선암사 신중도)
이처럼 원이삼점이 상징하고 있는 다양한 내용들은 결국,
원이삼점은 세계관과 종교관이 다른 이들에게 소중한 의미를 주는 상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보이는 형상을 간과할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드러나지 않은 본래의 진의(眞意)가 무엇인가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찰 투어의 진면목이며,
또한 금강경에서 말한
『약이새견아(若以色見我)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가 아니겠는가.
'사찰에 관한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 (0) | 2022.12.27 |
---|---|
기독교 십자가 스와스티카와 불교 卍자의 이해 (0) | 2021.12.26 |
불교의 卍자, 원이삼점, 일원상(一圓相)에 대한 소고(小考) (0) | 2021.04.11 |
유희좌, 윤왕좌 등 법좌(法坐)의 유형 (0) | 2021.02.20 |
사천왕의 생령좌(生靈座) (0) | 2020.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