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삶

2021. 2. 7. 10:22잠언과 수상록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살다 보면 홀연히 늦은 밤에 일어나 내가 누구지? 하는 생각이 나고,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삶이 될까? 하는 이런 생각이

화두처럼 불현듯 뇌리를 스쳐 간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만족한 답이 되어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교회를 찾고, 절을 찾아간다.

종교에 그저 맹종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곳에서 정녕 위안을 얻을까?

그래서 經에서

『信而不解 增長無明(신이불해 증장무명)

解而不信 增長邪見(해이불신 증장사견)』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스님이나 목사님들이 선행 악행의 인과를 말하지만,

그 선행이나 악행, 시시비비는 절이나 교회가 아니더라도

윤리나 도덕관으로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윤리나 도덕은 무엇이 선(善)이며, 무엇이 악(惡)인지 혼돈이 야기된다.

어제까지 옳다는 것이 오늘날에 그릇된 것이 되는 것이 어디 한 둘인가?

어제의 선(善)이 오늘에는 악(惡)으로 평가되는 것은 다반사다.

시대의 흐름이 모든 가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천국이나 지옥, 극락과 같은 말이

과연 삶에서 궁극적 의미가 될까?

짧은 인생 긴 하루에 해탈이란 말이

어디 중생의 삶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까?

현란한 문자 나열 밖에 달리 어떤 감흥이 일어날까?

생각하면 할수록 카오스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

가치관에 대한 마음의 실상이다.

그러나 살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왜 사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세속을 등진 불교의 옛 고승들은 어떻게 이 삶을 말하고 있는가?

 

삶에 대한 옛 선사들의 선시(禪詩)를 보자.

 

心隨萬景轉 轉處實能幽 (심수만경전 전처실능유)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수류인득성 무희역무우)

 

마음이 만 가지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

마음이 머무는 그곳이 실로 그윽하구나

마음 따라 흘러가면서 본성을 깨우치면

기쁨도 없고 또한 슬픔도 없는 것이라네

 

불교는 만법을 유위법과 무위법의 두 가지로 분리하고 있다.

위의 시를 삶과 연관하여 본다면 전구(前句)는 유위(有爲)의 삶을 의미하고,

후구(後句)는 무위(無爲)의 삶을 의미한다.

爲는 조작을 뜻한다. 인연의 조작이 없는 것을 무위(無爲)라 하며,

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四相의 변천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진리의 다른 이름이 무위이다.

 

먼저 유위법의 삶을 보자.

대자연은 경이롭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바다 위에 떠오르는 아침의 붉은 태양을 보면 황홀감과 환희를 느끼지만

어스름한 저녁 초승달을 바라보면 왠지 서글픈 감정이 일어난다.

빈 소리라도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나를 욕하면 기분이 상한다.

보름날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 청춘남녀들이냐 환희감이 들겠지만,

사별한 여인이 한밤에 그 보름달을 보면서 환희감을 느낄까.

같은 달을 보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천양지 차이가 난다. 왜 그럴까?

우리의 마음은 마치 깊은 심연(深淵)과 같고,

시비선악, 호불호, 희비애락은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모든 인식은 인연의 경계를 따라 일어나고,

경계를 따라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비선악(是非善惡), 호불호(好不好) 희비애락(喜悲哀樂)도

시간이 지나면 어제의 시비선악(是非善惡), 호불호(好不好), 허망하게 느껴지고,

희노애악(喜怒哀樂)이 한갓 봄 꿈같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무엇을 분별하는 우리의 인식은 오감(五感)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그 오감은 한정된 기능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오감의 경계 안에 갇혀 있으므로 완전할 수가 없다.

경(經)을 보자.

 

「사람은 언제나 눈에게 속고, 귀에게 속고, 코에게 속고, 입에게 속고,

몸에게 속느니라. 눈은 보기만 하고 듣지는 못하며,

귀는 듣기만 하고 보지는 못하며, 코는 냄새만을 알고 맛을 알지 못하며,

입은 맛을 알기는 하지만 향기와 냄새는 알지 못하며,

몸은 다만 차고 더운 것만 알고 맛은 알지 못하나니,

이 다섯 가지는 모두가 마음에 속하는 것이어서 마음이 근본이 되느니라.」

라고 했다. <불설충심경(佛說忠心經:동진(東晉)>

 

오감의 경계는 인연의 소치(所致)다.

시비선악과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모두 인연의 소치다.

인연, 그것의 시작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

현재의 인연은 과거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과거는 그 이전의 과거에서 비롯된다.

전생의 전생, 또 그 전생의 근원을 추구해 간다면

그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끝없는 질문만 이어질 뿐 그 시원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유위법의 근원이다.

그래서 삶을 마치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모이면 生이요, 흩어지면 死이다.

유위법의 삶은 실체가 없는 허망하다는 의미가 된다.

깊은 바다 위에 바람 따라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그것이 삶이요,

마음이 지어내는 파랑(波浪)이 유위법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위법의 반대는 무엇인가?

조작이 없는, 생주이멸을 벗어난 경계를

불교는 이를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경전의 해설에 따르면

「무위(無爲)는 곧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대승(大乘)은 무위법을 삼종, 육종으로 구별한다.

삼무위 가운데 擇滅無爲와 육무위 가운데 眞如無爲는

바로 聖智로 증득하는 진리이며

涅槃, 法性, 實相, 法界라 함은 모두 무위의 다른 이름이라고 설하고 있다.

조론에서는

<무위는 허무 적멸에서 취한 것, 有爲에서 妙絶된 것이다>」 라고 하였고,

探玄記四에

「緣이 所起하는 법을 유위라 하고,

무성진리를 무위라 한다.」라고 하였다.

 

진부하지만 교학에서 말하는 육무위(六無爲)를 보자.

 

1)虛空無爲

이 법성은 본래의 모든 장애를 여읜 자리여서 나타난 것을 이름한 것

2)擇滅無爲

이 법성은 지혜력에 의하여 번뇌를 떠난 자리를 따라 이름한 것

3)非擇滅無爲

이 법성은 擇力을 따르지 않고 본래 청정

혹은 緣缺 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을 이름한 것

4)不動無爲

이 법성은 제4선천에서 생하여 고락과

麤動(추동)을 여윈 자리에서 나타난 것을 이름한 것

5)想受滅無爲

이 법성을 성자가 非想地에 所攝된 無盡定에 들어가

六識의 心想과 고락 二受를 멸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을 이름한 것

6)진여무위

이 법성은 眞實如常한 상이 있음을 따라 이름한 것.

이 가운데 전오무위는 一法性이 所顯한 자리에 따라 차별한 것으로

육종의 명을 가립한 것이다. 전오자는 법성의 상을 詮한 假名이 되고,

후 일자는 법성의 體를 詮한 가명이다.

이에 따라 논하면 전 오위는 名과 體가 모두 假立이며

진여 무위의 體를 定在 다만 진여의 名만 가립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무위법은 인연의 조작을 여읜 법으로.

삼무위 가운데 택멸무위와 육무위 가운데 진여무위를 곧 열반이라 한다.

열반은 무위법 가운데 가자 수승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승에서 육무위를 세운 것은 다만 六種의 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我法 二執을 斷한 곳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진리,

有. 無, 常, 無常을 모두 이름을 붙일 수 없으나

다만 이 법의 실성이 되므로 법성이라 하며,

이 법성의 所顯을 따라 이름을 緣分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학적인 말들이 정녕 중생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난해한 말을 접어 두고 차라리 선사의 말을 살펴보자.

선어(禪語)에 이른 말이 있다.

 

「無心於事 於事無心」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무심한 마음에는 일을 꾸미지 않고,

일함에는 마음에 지음이 없다는 것이다.

순연(順緣)할 뿐 일을 함에도, 마음을 씀에도 달리 지음은 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위란 <기신론>에서 말하듯 한마음에 앞생각이 없고,

뒷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 막히면 돌아가고,

낮으면 머물고, 경사가 지면 흘러가라는 의미다.

거기에 무슨 선악이 있으며, 시비가 있겠는가.

 

우리의 욕망, 야심, 희로애락, 호불호, 시비선악이

모두 마음에 지음이 있기 때문에 인연 따라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지음이 없으면

그런 것은 마치 봄날 안개처럼 왔다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인연이라고 하지만,

인연이란 궁극적인 도리로 보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체가 없으면 원인을 지을 수 없고,

원인 없다면 어디서 결과가 나오며,

결과가 없다면 어디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가.

꿈속에서 희로애락, 호불호, 시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유위가 없으면 다시 말해 지음이 없으면 그것이 곧 무위이다.

불교는 『四大가 空하고, 五蘊은 주인이 없다.』라고 설한다.

실체가 空하고 행동하는 主人이 없다면 누가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이란 찾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선악, 시비, 호불호, 희비애락이 일어나는 것이다.

찾는 마음, 구하는 마음은 곧 분별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곧 무위법으로 사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信心銘>에 첫 귀가 『至道無難 唯嫌揀擇』 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심 즉 분별심을 꺼리뿐이라는 것이다.

 

삶은 무어라 정의(定意)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의된 것은 유위법의 삶이다.

무위법의 삶이란 정의되지 않은 삶이다.

분별하지 않은 삶 그것이 무위의 삶이다.

선어에서 회자하는 <내려놓아라>라는

「방하착(放下著)」 이란 말도 같은 의미다.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것은 모든 아집(我執)을 비롯하여

일체 분별을 멈추라는 의미다.

분별하지 않으면 원인에 구애될 것이 없고,

결과에 후회할 필요도 없게 된다.

구하지 않은 데 무엇을 바란다는 말인가?

바라지 않는데 무슨 희비애락이 있겠는가.

그래서 혹자는 삶을 유희(儒戲)라고 하지 않든가.

삶은 그저 유희처럼 즐길 뿐 일체 분별을 두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선시에서

「본성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본방: 무위(無爲)와 무소유(無所有)의 삶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