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용화사 구읍리 미륵불상

2021. 1. 24. 14:03문화재

 

포천은 창건 연대가 오래된 고찰이 거의 없다.

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시대의 폐불정책과 6·25 전쟁으로 거의 폐사된 실정이다.

현재 포천 지역에는 90여 개의 사찰이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근래에 지어진 것들뿐이다. 이중 백운산 흥룡사, 왕방산 왕산사,

원통산 원통사가 전통사찰이며 모두

대한 불교 조계종 제25 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그 나머지는 거의 신생 사찰과 사설 암자이며,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포천시민과 인근 의정부나

서울에 거주하는 도시민의 기도처 역할을 하고 있다.

용화사도 그중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

 

코로나 여파로 먼 나들이는 못 하고 집에서 가까운

포천의 사찰 중 미답사한 곳을 찾아 나선 그 첫 코스가 용화사다.

용화사는 외진 밭 가운데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교차로가 있는 구읍리의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우측 샛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알지 못해 네비에만 의존하다 보니

무려 주변에서 한 시간 가까이 맴돌다가

간신히 인근 주민들의 조언을 받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갔지만 법당 앞마당에는 멍멍이만 짖고

보살인 듯 보이는 한 사람이 나왔지만 마당에서 참배만 하고 가라고 한다.

참배객 하나 없는 빈 법당을 바라보면서

멍한 마음으로 돌아서 나오다 생각해 보니

작금의 상황에서 이해는 가지만 한적한 외진 곳의 빈 법당까지도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는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륵보살(사진출처: 펌)

포천 구읍리 미륵불상

문화재 지정: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

조성시기: 고려 시대

크기: 석불 높이 4.44m/ 머리 크기 : 1.15m/ 어깨너비; 1.15m/가슴 너비; 0.75m

 

포천 구읍리 용화사 법당 안에 봉안된 이 석조미륵불상은

1986년 4월 9일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용화사의 이 석불은 부분적으로 석고로 보완된 곳이 있지만

대체로 양호한 석조불상이다.

머리에는 연화문이 조각된 관 모양의 보관을 쓰고,

그 위에 판석과 같은 보개를 얹어 놓았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그 위에 보개(寶蓋)를 한 이런 형태의 불상은

이천 매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에서 보듯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부터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묘각 되어 있고, 승가사와 영락을 한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 역시 고려 초기의 불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중지 약지를 잡았고

검지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왼손은 배 앞에 대고 손바닥을 펴고 위로 향하여

무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 석불은 규모가 거대하고 원형보관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고려전기에 충청도 경기 일대에 유행했던 석조 대불의 유형에 속한다

 

이천 매산리 석불입상

 

구읍리미륵보살(정면)

 

구읍리미륵보살 (측면)

용화사에 봉안된 이 구읍리미륵불상에 얽힌 전설은 묘하게도

보물 제46호로 지정된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에 얽힌 전설과도 비슷하다.

구읍리미륵불상은 신라 시대 어느 날 밤 남녀 미륵불 한 쌍이

옥계천에서 솟아나 쌍계사에 모셨는데

산사태가 일어나 이곳까지 밀려왔다고 한다.

현재는 여 미륵상만 남아 있고

남 미륵상은 다리건넛마을 어딘가 묻혀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명성황후도 이 석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3년간 다녀갔다고 한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의 전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2구의 불상으로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불상은 옥룡천이라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간격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두 상이 만나

일 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 상이라는

풍수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불상이다.

(본방 고도리석조여래입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