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慶州掘佛寺址石造四面佛像)

2020. 12. 3. 21:19문화재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많은 석불과 마애불

그리고 석탑은 조성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사면석불은 드물고

더욱이 현재 남아 있는 사면석불의 예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최초 사면불이라 불리는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보물 제794호)는

형체는 남아 있지만, 마모가 심한 데 비하여,

경주 칠불암의 사면불은 그런대로 완연한 형체가 남아 있어

국보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둘의 사면불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사면불로 꼽히는 것이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이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재위 742∼765년)이 백률사(柏栗寺)에 행차하여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掘佛寺)라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굴석사라 한다.” 이 상이 바로 굴불사의 불상이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慶州掘佛寺址石造四面佛像)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121호

크기: 높이 3.5m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굴불사지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은

경주 동천동 굴불사지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사면불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1호 굴불사지석불상(掘佛寺址石佛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높이 약 3.5m의 커다란 바위 사면(四面)에

불상이 조각된 굴불사지사면석조사면불의

서쪽 면의 양협시 보살은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본존은 머리 부분만 따로 조성하여 바위 면에 조각된 몸 위에 얹어 놓았다.

몇몇 상들의 두부가 파손되었으며,

북쪽 면의 향 좌측 상은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고,

상 자체는 결실된 상태이다.

동쪽 면의 불상은 보주를 들고 있으며,

북쪽 면의 우측 상은 그 도상을 명확하게 볼 수 없으나

다면다비(多面多臂)의 보살상이 얕게 선각 되어 있으며,

그 옆은 존명을 확인할 수 없는 불입상이 위치한다.

남쪽 면은 불입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보살상이 있었던 삼존불로 추정되나

우측 보살상이 결실되어 있다.

현재는 두부가 모두 파손된 여래입상 한 구와 보살입상 한 구가 위치한다.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한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로 보인다.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므로,

이 불상의 경우 어느 특정 경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모시던 불상들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면불상

(西面)

1981년 실시된 발굴조사로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불상들의 대좌와

주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사면석불의 상들은 크기가 다양한데

서면의 아미타삼존불이 가장 크다.

본존상은 고부조로 새겼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올렸다.

양협시 보살상은 다른 돌에 환조해 세웠는데,

왼쪽 보살상의 보관에 화불이 있고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서면의 조상 형태를 보면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두부가 파손되었지만,

왼쪽의 보살입상 보관에서 화불(化佛)이 확인되고 있어

서방(西方) 극락세계(極樂世界)를 관장하는 아미타삼존불로 여겨진다.

중앙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다른 불상들보다 크며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는 별개의 돌로 조각하여 얹었으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걸쳤고,

앞에는 U자형의 주름이 계단식으로 조각되었는데,

표현이 조금 딱딱하게 되어 있다.

 

 

우협시불의 뒷면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둘 다 독립된 돌에 둥글게 조각하였다.

오른쪽 보살의 윗부분은 파괴되었고,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유행하며,

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나타내고,

균형이 잡힌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삼곡 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 시대의 불상에서 시작하는데,

그 양식이 중국의 수(隋)와 당(唐)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보살의 몸에는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한 달개장식이 있으며,

천의(天衣)나 치마의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고,

본존인 아미타불상보다 더욱 세련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국보 제81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상이나

국보 제312호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비교하여 옷 주름이 더 자연스럽고,

손동작이나 삼곡의 자세가 더 유연하게 나타나고 있어

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경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
경주 칠불암 사면석불(국보 제312호)

1981년 가을에 이 사면석불의 주위를 발굴하였는데,

이때 서쪽 면과 남쪽 면의 불상대좌가 노출되었다.

서쪽 면의 대좌는 팔각의 내림연꽃받침이 있고,

남면 대좌는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가 팔각의 중대(中臺)로 연결된다.

윗부분은 앙련(仰蓮)에 홑꽃잎이고,

밑부분은 복련(覆蓮)에 겹꽃잎의 받침으로

서쪽 면의 불상보다는 복잡하고 장식적이었다.

 

남면불상

(南面)

남쪽 면의 불상은 석가삼존불로 추정된다.

남면에는 원래 삼존불이 부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른쪽의 보살상은 흔적뿐이고

현재는 머리가 없는 본존불입상과 보살입상만이 있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남쪽 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 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 갔다고 한다.」라고 한다.

이는 떼 난 자리에 징으로 쫓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듯 보인다.

 

 

남쪽 면에 현재 남아 있는 보살상과 불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형태의 균형도 잘 잡혀 있고 주름이나 몸체의 굴곡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세련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불상이 모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는데

머리 부분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보살상은 오른손 부분이 없어졌다.

 

 

불상의 모습은 경주 국보 제82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옷 주름을 하고 있다.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

가는 허리와 도드라진 다리의 윤곽이 더 강조되었고,

주름의 처리가 감산사불상보다는 더욱 간략히 처리되면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실감이 더해지면서

신체와 법의가 밀착되어 조화 있게 표현된 것은

8세기 전반기의 통일신라 조각 양식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보살상 또한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등 팔다리의 윤곽선이 강조되고,

천의는 부드러운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졌는데,

좀 투박하고 도식적인 느낌이 있으나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조각 양식이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珞腋)이 표현되어 있고

천의가 2단으로 감겨 있는 것은 석굴암(742∼765년) 감실 보살상에서 보이며,

목걸이의 표현 등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이 사면석불은 대체로 719·720년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보다는 더욱 진전된 조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경덕왕 대와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부터 조각이 이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각 양식 면에서 보면 경덕왕 대, 즉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남면의 불상들은 법의가 매우 얇게 몸에 밀착되어 있고,

가는 허리와 다리의 육감적인 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게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동면불상

(東面)​

동면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으며,

여래좌상의 얼굴 부분은 고부조로 조각되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저부조로 되어 있다.

이는 바위의 윗부분이 돌출되고 아랫부분이 들어가

정면에서 바라보면 안쪽이 쑥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고 있으나 손은 깨져 있고,

왼손은 약합을 지물로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수인은 칠불암 사방불 동면과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광배 뒷면 상에서도 나타난다.

 

경주 남산 보리사 미륵골석불좌상 배면불(보물 제136호)
경주 칠불암 동면 약사여래불(국보 제312호)

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의 대부분 약사불상은

대부분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오른손을 무릎 위로 올리고 있어서

시무외인을 결한 형식의 약사불상은 초기 형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머리는 독특하게도, 신체와 달리 고부조로 표현되며,

크고 소발이며 둥근 육계가 있고,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두 줄의 음각선으로 구분하였으며

바깥은 화염문으로 장식하였다.

 

 

도상적으로 볼 때 사방불 사상에 따라 동방유리광정토에 군림하는

약사불이 등장한 것이다. 원래 동방에는 아촉불이 오는 것이 상례나

한국에서는 약사불로 대치되는 경향이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이다.

 

 

북면 불상

(北面)

북면에는 두 개의 보살상이 있는데, 좌측 보살은 부조된 보살상이고,

우측의 보살상은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가 어렵다.

<문화재청>의 해설에 의하면

「양쪽 귀 옆으로 보살 2면이 있고, 머리 위에 5면,

그 위에 2면, 맨 위에 1면이 있어, 모두 11면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의 관음보살을 표현하였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상은 돋을새김으로 부조(浮彫)되어 있고,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이

남면의 보살상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굴불사지석조사면불은 균형 있는 신체비례와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여주는데,

대체로 719년 명이 있는 감산사 불상·보살상보다 진전된 조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삼국유사〉에 보이는 경덕왕 대의 연대와 부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불상군보다는 앞선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한데,

굴불사 사방불의 구성은 어느 한 경전에 따랐다기보다는

당시 신라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불상들을 각 면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담바라

굴불사지의 관리인이 북면 불상 쪽에 우담바라가 피였다고 하여

사진에 담아보려 했지만 너무 작아서 사진으로 담기가 어려웠고,

또 현장에서는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넘어갔는데

집에 와서 확대해 보니 꽃이 분명하다.

 

불교의 경전에는 '우담바라'가 3000년에 한번씩 피어나는 꽃으로,

석가여래나 지혜의 왕 전륜성왕(轉輪聖王)과 함께 나타난다고 적고 있고,

인도의 전설에도 여래(如來)가 태어나거나 금륜왕(金輪王)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에는 커다란 복덕의 힘으로 이 꽃이 피어난다고 하며,

불교의 과거칠불(過去七佛) 가운데 다섯째분인

구나함모니불(Kanakamuni-buddha)은 이 나무 밑에서 성불했다고 한다.

우담화가 이처럼 상서로운 조짐으로 인식된 것은

이 꽃이 꽃받침에 싸여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은화식물(隱花植物)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굴불사지의 이 꽃이 우담바라인지는 모르나

너무 작아서 눈으로 분별하기는 사실 어려웠다.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우담바라'라고 불리는 꽃은

'풀잠자리 알'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모양이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조불상에  관한 본 자료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다음 백과를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