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호거산 운문사(제1부)
2020. 11. 23. 21:28ㆍ국내 명산과 사찰
운문사의 사리암을 순례하고 본사인 운문사로 내려오니 이미 오후 4시가 넘었다.
동지가 가까워서 그런지 낮이 짧아져 땅거미가 스멀스멀 내려앉기 시작한다.
갈 길 먼 귀경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기대했던 운문사 5대 암자 순례와 단풍 감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경내의 몇 전각만 둘러 볼 보는 것도 시간이 촉박하여
주마간산 격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이라 했던가.
그러나 어찌하랴.
이 먼 길을 다시 오긴 힘들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
눈팔매 짓을 서두를 수 밖에...
운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진흥왕 21) 한 신승(神僧)이 이곳 북대암 앞 금수동에
대작갑사를 중앙에 두고,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라는 오갑사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인 대작갑사(大鵲岬寺)가 현 운문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고,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귀산(貴山)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고려 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하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 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雲門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조선 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청도 호거산 운문사는 공주 동학사, 울주 석남사 견성암, 산청 대원사,
김천 청암사, 예산 수덕사와 더불어
한국불교 조계종 최대 비구니 도량으로 꼽히는 가람 중 하나로
현재 이 절에는 1958년 불교정회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도 유명하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비로전(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 미륵전, 작압전(鵲鴨殿), 금당,
강당, 관음전, 명부전, 오백나한전 등 조선 시대의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운문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을 비롯하여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 운문사 동호(보물 제208호),
운문사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317호),
운문사 석조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보물 제678호),
비로전에 봉안된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 삼신 불회도」(보물 제1613호),
비로전의 달마*관음도벽화(보물 제1817호) 등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호거산 운문사>라는 편액이 걸린 2층 누각형태의 이 건물이
운문사의 일주문인 셈이다. 뒤편에 <범종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범종루 좌측에 3기의 비각이 있는데
그 중 가운데 비각이 보물 제316호 지정된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雲門寺圓鷹國師碑)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雲門寺圓鷹國師碑)
보물 제316호. 높이 2.3m, 너비 1.8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탑비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1085년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을 배워 귀국했다.
1106년 중대사, 1109년 선사가 되었고,
1144년(인종 22)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했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훼손된 것을 수리·보존한 것이다.
현재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며, 3쪽으로 잘린 비 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원응국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이 파손되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 해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비 몸 앞면 상단에는
“圓應國師碑銘”(원응국사비명)이라는 제액(題額)이 새겨져 있다.
처진 소나무 천년기념물 제180호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수고(樹高)가 6m이며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다. 수령 500년에 이르는 이 소나무는
어느 선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 막걸리 12말을 희석하여 영양제로 부어준다고 한다.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와 함께
운문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솔나무다.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진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서
모습이 다른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운문사의 이 소나무와 같이 가지가 아래로 길게 뻗어서
마치 삿갓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른 하나는 키가 크고 가지가 짧으면서 밑으로 늘어진
버들 형태의 모습을 지닌 수양버들 모양의 소나무(柳松)다.
대표적인 이런 유송은 청도 매전면 동산리의 천연기념물 295호로 지정된
처진소나무로 키 14m, 줄기둘레가 한 아름 반 정도에 이른다.
명부전
명부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하여 좌우에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하는 관음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서 작압전 옆에 있다.
1105년 원응국사가 중창한 것이라고 전하나,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씩인 정사각형 공간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으며
사방의 기둥에 각각 2개씩의 주련을 걸었는데,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두 가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건물 안팎에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벽화로 표현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 즐거움을 주겠노라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으로, 운문사 관음전에는
1816년에 제작한 수월관음도가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작압(鵲鴨)
운문사의 전신(前身)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나말여초의 보양국사가 작압(鵲鴨)이라는 전탑 형식으로 초창(初創)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작압(鵲: 까치 작, 鴨:오리 압)이라는 말은
보양스님이 까치 떼가 땅을 쪼고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작각사(운문사의 전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전각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318호인 석조사천왕석주가 봉안되어 있다.
(본방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석주 참조)
청도 운문사 동서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은
운문사 비로전(구 대웅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높이는 5.4m이며,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인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東西 쌍탑은 거의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원래 기단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八部衆) 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중석(中石)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 각 면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2주씩이 있다.
운문사의 이 동서 삼층석탑은 1980년 9월 16일
보물 제678호로 지정되었다.
(본방 청도 운문사 동서삼층석탑 참조)
비로전(大雄寶殿·毘盧殿) 보물 제835호
시대: 조선
문화재 지정 : 보물 제835호
건립 시기 : 1718년 (중건)
면적 : 정면 3칸, 측면 3칸
@1105년 (고려 숙종 10년) 원응 국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발견된 상량문에 藏次 順治 十年 癸巳 九月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으로,
기단은 막돌로 쌓고 상단석(上段石)은
긴 댓돌[長臺石]로 된 갑석(甲石)을 놓아 정연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정면 가운데에 잘 다듬질 된 4단 계석(階石)을 놓았다.
주춧돌은 자연석으로 그 위에 민흘림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 맞추어
하부 가구(架構)를 구성하였다. 공포(栱包)는 다포식으로,
주두(柱頭) 위에는 주심포(柱心包)를,
주간(柱間)에는 어간(御間 : 중앙간)에 4구, 옆 칸에 3구씩 공포를 짜 놓았다.
정면 어간(御間: 법당의 중심축이 되는 부분.
주불을 봉안한 법당의 가장 가운데 부분을 일컫는다.
또한,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직선상의 공간을 모두 어간이라고 한다) 에
꽃살문을 새겨 부처님께 시들지 않는 법의 꽃 공양을 올리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비로전은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의 본당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재청 등록 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가 지금은 비로전으로 바뀌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 불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삼장탱화를 봉안하였다.
@비로자나불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3호
비로전의 본존인 소조비로자나불좌상(淸道 雲門寺 塑造毘盧遮那佛坐像)은
불상의 크기(상고)는 181cm이며, 무릎 폭(슬폭)은 150cm로,
2017년 4월 24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03호로 지정되었다.
수미단 위에 안치된 소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양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린 후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우권인)을 취하고 다리는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지권인은 15∼17세기에 조성된 불상에서 나타나며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본 상(像)의 조성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오른발을 왼발의 앞에 놓아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자세는 유희좌(遊戲坐)와도 다른 매우 독특한 자세다.
이와 비슷한 형태는 보물 제1816호로 지정된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벽화에서 볼 수 있다.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상은 복장(腹藏)이나 사찰 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양식적·도상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15세기와
16세기 초의 불보살상에서 나타나는 성격을 계승하고 있으나
장방형의 얼굴과 평면적인 조형은
조선 후기 불상의 선구적인 요소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비로자나불좌상은 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고 180㎝에 달하는
중형의 비로자나불상으로서 희소성을 고려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문화재청은 서술하고 있다.
악착보살과 용가(龍架)
비로전 법당 서쪽 천장에 종을 매단 용가(龍架: 반야용선)가 보인다.
용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말하며,
이는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법당 자체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반야용선과 같다고도 하는데,
운문사 비로전 내에 형상화된 반야용선에는 밧줄이 하나 걸려 있고,
그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동자상있다. 이를 악착보살이라고 한다.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보물 제1613호)
시대: 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보물 제1613호
크기 : 세로 466cm, 가로 522cm.
재질 : 비단 바탕에 채색
제작 시기 : 1755년
비로자나불상 뒤에 봉안된 후불탱화로 1755년 임한(任閑)을 수화사로 하여
19명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 화폭에 비단 바탕에 채색된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을 함께 그린 삼신불회도다.
화면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삼신불, 하단에는 협시보살과 사천왕
그리고 상단에는 설법을 들으려는 십대제자와 성중들이 표현되어 있다.
비로자나 삼신불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 보신불인 노사나불,
화신불(또는 응신불)인 석가불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의 불형(佛形)이고,
왼쪽의 노사나불은 보관을 쓴 채 두 손을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쪽 석가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18세기에는 비로자나와 석가, 노사나를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삼신불화가 유행하였지만,
이 불화에서는 삼신불을 모두 한 폭에 배치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구성은 1650년 갑사 삼신불 괘불도에서처럼 일찍이 나타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유행한 형식이다. 그러나 인물을 겹쳐 그리는
19세기 삼신불회도와는 달리 인물과 인물 사이에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화면 중심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석가불은
좌우 대칭되게 존상을 구성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이 앉아있는 불단 앞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좌우로 6존의 보살이 서 있으며,
그 위로 가섭과 아난을 포함한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를 비롯한 야차,
건달바 등의 팔부중이 자리하고 있다. 노사나불과 석가불 주변에는
협시보살을 그리지 않고 사천왕, 제석천과 범천,
팔금강이 서로 대응되게 배치되었다.
화면 상단에는 오색구름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서 시방불이 모여드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이 불화에서 주목되는 도상은 노사나불로서,
일반적으로 노사나불은 양손을 든 설법인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연꽃을 든 보살형 여래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연꽃을 든 노사나불의 모습은 수도사 노사나 괘불 도(1704년)와
통도사 노사나 괘불 도(1792년)에서도 볼 수 있는데,
괘불도를 제외하고 후불도로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많은 존상을 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존상들의 시선을 비로자나불에게 향하게 하고,
존격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 전체적으로 구성이 안정되고 통일감이 있다.
비록 습기로 인해 화면이 오염되어 있지만,
적색과 녹색의 색채가 선명하고 두 색의 대비를 적절히 사용하여
많은 색채를 사용하지 않아서도 각 존상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또한, 구도에서는 총 40구에 달하는 많은 인물을 표현하면서도
위로 갈수록 인물을 작게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운문사의 이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삼신불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드문 형식의 삼신불회도로서
안정된 화면 구성과 균형 잡힌 인물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잘 보여준다.
달마 관음도 벽화 보물 제1817호
달마 관음도는 비로전(구 대웅보전) 후불벽에 나란히 앉아있는
관음보살과 달마대사를 그린 벽화로, 보물 제18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달마관음도는 거대한 흙벽 화면에 높고 험준한 바위산으로
화면을 나누어 향우측에 관음보살, 향좌측에 달마대사를 배치하였다.
관음보살은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의 청문을 받는 백의관음의 모습을 담았다.
관음보살의 뒤로는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가 펼쳐져 있고
앞쪽에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묘사하였다.
바다에는 여러 개의 바위산이 솟아 있고
좌우에 역시 바다에서 솟아난 연꽃과 연밥,
꽃받침만 남은 연꽃 줄기 등을 표현하였다.
관음의 오른쪽 아래에는 홍련 위에 녹색 연밥을 딛고 선
작은 선재동자가 두 손을 합장한 채 보살을 향해 있다.
선재동자는 쌍 상투를 틀고 적색 저고리를 입은
앳된 모습에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관음의 오른쪽 옆 바위 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있고,
버들가지 위에는 분홍 몸통에 청색 깃을 지닌
청조 한 마리가 보살을 향해 앉아있다.
정병은 굽이 있는 받침그릇 위에 손잡이가 오른쪽을 향해 놓여 있으며
몸통 세 곳에 황색으로 띠를 두른 뒤 은색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관음의 왼쪽에는 나지막한 암반 언덕이 있고 소나무 등이 울창한 모습이며
그 위로 다시 생략한 암반을 묘사한 뒤 명암으로 원근을 구분한
대나무를 풍성하게 묘사하였다.
화면 향좌측에는 역시 높은 기암괴석 위에
오른쪽으로 약간 방향을 튼 자세로 정면을 향해 결가부좌한
달마대사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달마를 중심으로 좌우와 위쪽 모두 빽빽한 산봉우리를 둘러
달마가 마치 바위굴 속에 앉아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이는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 수행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달마의 주변에는 4인의 인물과 여러 동물이 묘사되어 있다.
먼저 정면 아래의 승려는 2조 혜가(慧可)를 나타낸 것이다.
혜가는 달마에게 법(法)을 구하며
자신의 자른 팔을 파초 잎에 담아 바치며 서 있는 모습이다.
달마의 머리 뒤쪽에는 한 쌍씩 짝을 이룬
호랑이·사슴·여우와 4마리의 학이
산속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또 달마의 오른쪽 암굴 바깥에는 3인의 인물이
세로로 지그재그의 배치를 이루며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6조 혜능(慧能)과 제16조 라후라다존자를 그린 것이다.
후불벽 뒷벽에 관음보살도가 있는 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여수 흥국사 대웅전, 순천 동화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
10여 점이 알려져 있으나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한 벽면에 나란히 표현된 것은
운문사가 유일하다. 이 벽화는 비록 벽화의 제작 시기는 전하지 않지만,
운문사의 대웅전이 중창되는 1653년에서 1718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삼장탱화
삼장탱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탱화이다.
이 삼장보살의 명칭이나 도상이 어디에서 유래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장보살의 신앙이 더 심화하고 확대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숭천 신앙(崇天信仰)과 지지 신앙(地祗信仰),
망인낙지천도 신앙(亡人樂地薦度信仰)을 수용하여
소박한 삼계 우주관(三界宇宙觀)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장 중 천장보살은 상계 교주(上界敎主)이고 지지보살은 음부교주(陰府 敎主)이다.
그리고 지장보살은 유명계 교주(幽冥界敎主)로서
천상과 지상과 지하의 삼계 교주로 신앙이 되고 있다.
삼장탱화는 중앙에 천장보살이 앉아있고
좌측에 지지보살, 우측에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고,
권속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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