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사리암(邪離庵)과 나반존자 이야기
2020. 11. 17. 21:00ㆍ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단석산 신선사와 굴불사지를 순례하고 운문사에 도착하니 2시가 넘었다.
서울에서 당일 코스로 움직이다 보니 나름대로 시간 계획을 짰지만,
경주를 빠져나오는데 뜬금없이 정체가 심해 운문사 도착이 늦었다.
늦어도 오후 4시 정도에는 귀경길에 올라야 하므로
시간을 대충 계산해 보니 기껏해야 2~3시간밖에 여유가 없다.
운문사만 들리고 사리암은 포기하려다가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욕심 때문에
운문사는 하산길에 보기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단풍철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요기 단풍을 기대했는데
사리암 오르는 길의 단풍은 별로다.
설상가상으로 등산로가 된비알에다 지루할 정도로 가파른 돌계단이 연속이다.
사리암은 암자라서 전각도 단출하고 보물급 문화재 하나 없는
고봉에 자리한 암자에 불과하다.
사리암(邪離庵)이란 암자명 그대로 속세의 삿됨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가.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회자하는 것은
국내 최대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의 5대 암자 중 하나라는 것과
나반존자의 도량이라는 것이다.
사리암과 같이 국내 나반존자 기도 도량으로 꼽히는 곳은
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직할 사찰인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삼성암(三聖庵)이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사리암
사리암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하다.
간신히 자리 하나 찾아 주차하고 등로를 따라
사리암을 오르는데 참배객들이 상당히 많다.
주차장을 보니 아주 오래전에 주차장은 들린 기억은 나는데
사리암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 탓인가.
운문사에는 5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이 있고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이 있다.
사리암의 안내서를 보면 운문사 사리암은
고려 초의 고승 보량국사가 930년에 초창하였고
1845년(이조 헌종11년)에 정암당 효원대사가 중창하였고
1924년에 증축 1935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당우를 보면 자인당, 관음전, 천태각, 산신각 있는데
외형으로는 관음전이 본당이라 할 수 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사리암이 나반존자를 주존으로 모시는 기도 도량이므로
천태각이 본당인 셈이다.
@자인당과 관음전
자인당은 참배객들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는 것 같고
관음전은 사리암의 본당으로 법당 좌측에 관음불을 모시고
중앙에 사리굴과 천태각을 바라볼 수 있는 유리벽으로 조성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코로나 여파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많은 참배객이 다닥다닥 모여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사리굴
운문사의 사리굴(邪離窟)은 운문사 사굴(四窟) 중의 하나로,
동쪽에 사리굴, 남쪽은 호암굴(虎 巖窟),
서쪽은 화방굴(火防窟), 북쪽은 묵방굴(墨房窟)이 있다
운문사 사리암의 사리굴은 옛날에는 이곳에서 한 사람이 살면
사리굴에서 한 사람의 쌀이 나오고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의 쌀이 나오고
열 사람이 살면 열 사람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공양주가 더 많은 쌀을 나오게 하려고 욕심을 부려
구멍을 넓힌 후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암자다.
@천태각(天台閣)
운문사 사리암의 천태각은 1845년(이조 헌종 11년)에
정암당 효원대사가 중창하였을 때 신파대사가 천태각을 짓고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1924년과 1935년 중창하였고,
현재의 천태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불기 2554년(2010)에 새롭게 복원 불사를 마치고 낙성한 것이라고 한다.
천태각은 유리벽 안에 나반존자상이 모셔져 있고,
이 나반존자상의 후면에는 1851년(이조 철종 2년)에 봉안한 독성탱화와
1965년에 경봉화상이 점안한 산신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나반존자는 일반 사찰의 경우 독성각 또는 삼성각에 봉안되며,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이나 탱화를 단독으로 모시고,
삼성각에는 칠성·산신 등과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이 상례다.
나반존자만 모시는 전각을 천태각(天台閣)이라 불리는 것은
나반존자가 천태산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이에 비롯된 것이다.
@나반존자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하며,
독성탱화는 수독성탱(修獨聖幁) 또는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고 한다.
독성(獨聖)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 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를 섬기는 나반신앙은 현재 남방불교권뿐만 아니라
북방불교인 중국, 티베트, 일본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불교 특유의 신앙형태로 사찰 내에서는
천태각 또는 독성각(獨聖閣)이라는 별도의 전각에 모셔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인도의 대승 절에서 문수를 상좌로 하고,
소승 절에서는 빈두라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고,
중국에서는 동진(東晉)의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빈두라를 신앙하고 송(宋)나라 진초말기(秦初末期:471)에
법현(法顯), 법경(法鏡) 등이
처음으로 그의 형상을 그려 공양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진 나반존자의 탱화의 모습은 사리암의 천태각에서 보듯,
천태산을 배경으로 하여 희고 긴 눈썹을 지닌 늙은 비구가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염주나 불로초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 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하였다.
이는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건립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에만 나타나고 있으므로
불교의 전래시기에 이를 포섭하여 모신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밭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고 있으므로,
18 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도 보고 있다.
나반존자에게 바치는 예불문을 보면,
그는 삼명(三明)에 통달하고 자리(自利)와 이타행(利他行)을 완성한 결과
마땅히 공양받아야 할 복전(福田)이며,
미륵불이 다스리는 용화세계가 올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구제하는 구세자(救世者)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삼명이란 육신통(六神通) 중 세 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아는 숙명명(宿命明),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사태를 낱낱이 보게 되는 천안명(天眼明),
그리고 번뇌를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누진명(漏盡明)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불교계에서는 말하는 나반존자란
18 나한 중에 빈두로(賓頭盧, Pindola) 존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 빈두로존자는 16 아라한 중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빈두로파라자(賓頭盧頗羅墮, Pindolabharadvaja)의 오해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대아라한나제밀다라소설법주경(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經)』에서
이 빈두로파라자를 묘사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다.
빈두로파라자 존자는 기다란 흰 눈썹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이다.
그는 발차국(跋嗟國)의 구사미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부처님 교단으로 들어가 나한이 되었다.
그는 신통력이 매우 뛰어났는데, 석가모니가 성도한 지 6년 뒤
왕사성에서 외도들에게
그 신통력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런데 그 일로 해서 외도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자,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쓸데없는 신통력을 내보였다고
책망과 꾸지람을 듣고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말세 중생을 제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이러한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석가모니 열반 후
남인도 마리산에서 1천 명의 나한과 더불어 말세 중생을 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간신앙에서는 부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 있으면서 부처 열반 후에
중생을 제도하게 되어 있으므로 주세아라한(住世阿羅漢)이라고 불리며
후세 인도 대승불교에서는 문수보살을 상좌로 하는 데 비하여
소승불교에서는 빈두로를 상좌로 하는 풍습이 생겼다.
여기서 빈두로파라자의 역할을 볼 것 같으면
그는 불멸 후 미륵 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구제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리고 그 임무는 나반존자의 역할과 잘 일치된다.
거기에다가 그 나반존자의 모습을 볼 것 같으면
기다란 휜 눈썹을 지닌 노인의 형상으로
영락없는 빈두로파라자 존자의 모습이다.
신통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두 인물의 유사성도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나반 존자와 빈도라바라타자(賓度羅跋羅囉惰闍, Pindola-bharadvaja) 존자를
동일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경전에서의 빈도라바타자는
부처님의 제자인 십육나한 중 한 분이다.
빈도라바라타자와 나반존자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빈도라바라타자의 내용을 전하는 『십송률』권 37․『청빈두루경』․
『법원주림』권42․ 『잡아함경』권23․
『양고승전』권5「석도안전(釋道安傳)」의 서술과,
나반존자에 대한 설명이 실려있는 우리나라 의식집인『제반문(諸般文)』
「독성재의문(獨聖齋儀文)」과 『작법귀감(作法龜鑑)』
「독성청(獨聖請)」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독성신앙의 발생을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는
1719년(숙종 45)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에서 『제반문』과
『작법귀감』등의 법요의식문을 중간(重刊)할 때
의눌(義訥)이 지은 발문(跋文) 내용을 통해
최소한 이 시기 이전에 이미 독성에 대한 신앙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 오산시에서 제작 시기는 11세기에서 12세기로 추정되는
청동 빈도르좌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나한상의 옆면에 두 개의 안상(眼象) 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고,
대좌 정면에는
‘제일빈도르존자 영통사 ㅁ의 ㅁ승 조성 第一賓度魯尊者 靈通寺 ㅁ依 造成’ 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이로 보아 개경 교외 오관산(五管山)에 있던
거대 사찰 영통사의 승려가 이 상을 만들었다고 추정된다.」라고 되어 있다.
영통사는 고려 현종18년(1027년)에 창건한 절로
대각국사 의천도 1065년에 이 절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이로 보아 나반존자의 신앙은 이미 이전에 성행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본방 영통사 청동 빈도르좌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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