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석주

2020. 11. 20. 20:14국내 명산과 사찰

 

운문사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석주는

운문사에서 제일 작은 건물 작압(鵲鴨) 안에 있다.

사찰의 전각은 그 용도에 따라 전(殿), 당(堂), 각(閣), 루(樓) 등의 명칭이 따라 붙는데

작압은 그런 표시가 없다. 운문사의 홈피에서는 작압전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전면과 측면이 모두 한 칸인 맞배지붕의 건물로

한 사람이 들어가 예불하기도 비좁은 전각이지만

운문사의 창건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운문사의 홈피의 설명을 보면:

 

 

『작압(鵲鴨)·작압전』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인 작압전은

전면 측면이 모두 한 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 신승(神僧)이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비로운 새 떼가 날아오른 것을 본 자리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수행하여 큰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새를 보고 이른 터에는

무너진 석탑이 있어서, 무너져 있는 석조물로 다시 탑을 쌓으니

파편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것을 보고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남쪽에 천문갑사·서쪽에 대비갑사·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다섯 사찰을 두고 오갑사(五鴨寺)라고 하였다.

작압전은 신승이 발견한 석탑터에 지어진 전각으로,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전탑형식으로 초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목탑형식으로 재건되었다.

내부에는 보물 제 317호 석조여래좌상과 318호 사천왕 석주를 봉안하고 있다.

 

@운문사석조여래좌상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고려

문화재 지정: 보물 제317호

건립시기: 통일신라 말기, 고려 초기

크기: 전체 높이 1.33m, 불상 높이 63㎝, 광배 높이 92㎝, 대좌 높이 41㎝

 

 

보물 제317호.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이다.

전체 높이는 1.33m로, 이 중 불상은 63㎝이며, 광배 92㎝, 대좌 41㎝이다.

불상은 광배(光背)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데,

광배의 가장자리 일부분과 대좌 하대(下臺)가 약간 부서져 있다.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운문사 작압전에 보물 제318호인

석조사천왕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착용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한 불좌상이다.

언제 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호분(胡粉)이 두껍게 발라져 있어서

원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이마 선에서 턱 선까지 상당히 긴 모습이다.

머리와 높다란 육계에는 나발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섬세하지 않고 조그마하게 처리되어 있다.

목부분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짧은 편이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주름선이 형식적이고,

밋밋한 가슴 위로는 승각기가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나

불신에 비해 손이 작고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해 투박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는 적당한 크기의 둥근 육계(肉髻)와 나발(螺髮)의 머리카락,

약간 역삼각형의 불두(佛頭), 가늘게 뜬 눈, 삼각형의 코,

다문 입, 살찐 양 볼과 턱, 그다지 크지 않은 귀 등에서

근엄한 불상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묻어 나온다.

상체는 넓고 짧은 편으로, 어깨는 살짝 처져 있으며,

가슴은 편평하다. 하체는 낮고 펼쳐진 모습이다.

법의의 주름이 신체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처리된 듯하나,

호분이 두꺼워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광배는 두 줄의 돌기로 구획된

원형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표현된 연잎 형태이다.

두광 중앙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나,

그 바깥에는 마모가 심하여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연잎 형태의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깊이가 얕아 역동적인 느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신광에는 대개 화불(化佛)이 부조되어 있는데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는 보이지 않는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상대(上臺)와 중대, 하대를 갖추고 있다.

대좌는 특이한 육각형으로 상대석에는 타원형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와 하대석은 1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하대석에는 복련이 돌아가면서 표현되어 있다.

 

 

앙련(仰蓮) 형식의 상대는 14엽(葉)의 연화문으로 이루어진 원형으로서,

연꽃잎 중앙이 화려한 꽃무늬로 장엄되었으며,

연잎 사이에는 또 다른 연잎이 새겨져 있다.

대좌의 중대는 마모가 심하여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복련(覆蓮) 형식의 하대는

18엽의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 두 개의 연잎으로 이루어진 연화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세부적인 표현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은 인간적인 모습의 얼굴,

넓고 평판적인 상체, 넓게 펼쳐진 하체,

대좌 중대의 짧아진 모습 등에서 통일신라 말기

혹은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항마촉지인 불좌상으로서, 도상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조성된

석굴암(石窟庵) 본존을 계승하고 있지만,

형식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시대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불상을 통하여 여전히 통일신라시대 8세기에 유행하던

항마촉지인 불좌상의 영향이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문사 사천왕석주

문화재지정 :보물 제318호

조성시기: 통일신라시대

 

청도 운문사 사천왕 석주는 운문사 작압전 안에

석조 여래 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작압전 중앙의 석조 여래 좌상 좌우에 각기 2구의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오른쪽에 다문천왕과 지국천왕이 자리하고,

왼쪽으로 광목천왕과 증장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운문사 사천왕 석주는

그 예가 드물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탑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조각되었던 것이

파편으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석주 네 기가 각각의 높이가 달라서 정확한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운문사 작압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 석주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이곳에 세워진 전탑의 탑신면이나

혹은 안 벽면에 봉안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 석주는 작압전 내 석조 여래 좌상 좌우에

둘씩 모두 4기의 석주가 배열되어 있다.

각각의 면에는 사천왕상 1구씩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사천왕상들은 모두 두광(頭光)이 부조되어 있고,

악귀 생령 좌상의 입상으로 무인의 복장인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지만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사천왕은 불보살을 외호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을 보호하는 신이다.

특히 부처가 상주하는 정토의 사방을 지키는데,

동쪽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이 있다.

사천왕상들은 그 배치나 각 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에 따라 구분하다.

 

운문사 작압전 내 사천왕 석주는 총 4기이며,

제1 석주는 높이 1.52㎝, 너비 43㎝, 입상 높이 1.14㎝이다.

제2 석주는 높이 1.64㎝, 입상 높이 1.18㎝, 너비 46㎝이다.

제3 석주는 높이 1.63㎝, 너비 54㎝, 입상 높이 1.28㎝이며,

제4 석주는 높이 1.53㎝, 너비 52㎝, 입상 높이 1.22㎝이다.

 

증장천왕

 

제1 석주는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상으로 목에는 영락이 걸려 있고,

오른팔에는 천의가 늘어져 있으며,

발밑의 악귀는 머리와 엉덩이가 눌려 신음하고 있다.

입상의 직립 자세가 아니고 왼쪽으로 향하였으며,

얼굴과 양쪽 다리, 그리고 양쪽 발의 높임 역시 좌향을 하고 있다.

 

다문천왕

 

제2 석주는 탑을 든 다문천왕상으로 몸을 약간 비튼 자세지만

거의 정면을 향한 입상으로 오른손은 내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탑을 받들고

악귀는 양쪽 어깨가 눌려 입이 찢어질 듯 신음하고 있다.

악귀의 두 어깨를 밟고 서 있는 다문천왕상은 양감이 없는

평판적인 신체에 세장하고 섬약한 체구, 온화한 얼굴 등이

다른 사천왕상들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광목천왕

 

제3 석주는 불꽃을 든 광목천왕상으로 무릎을 굽혀

악귀의 두 어깨를 밝고 선 자세로 왼손은 들어 불꽃을 잡았으며,

오른손은 내렸다. 제2 석주의 입상과 유사한 것으로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꽃가지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약간 구부려 오른쪽 다리에 놓고 있다.

 

지국천왕

 

제4 석주는 칼을 든 지국천왕상으로

악귀와 어깨와 엉덩이를 밟고 왼손은 내려 칼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은 들어 칼 중심을 받치고 있다.

노한 얼굴에 눈이 크고 양손에 장검을 받들고 있으며,

왼손은 배꼽 앞에서 검파를 쥐었으며,

오른손은 가슴 높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한 채 장검 중심부를 잡고 있다.

그리고 양팔에 걸친 천의는 좌우로 펼쳐지며 유려하게 흘렀으며,

보관 양쪽으로부터 날리는 관대도 둥근 두광 안에 조식되었다.

 

사천왕 석주는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섬약한 체구,

비교적 부드러운 얼굴 등 양감은 뚜렷하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준다.

591년(신라 진평왕 13)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