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선원사(禪院寺)

2020. 11. 5. 21:04문화재

 

산청 기행을 마치고 귀경하는 길에 남원을 경유하면서

남원의 만복사지와 용담사를 들리고 마지막으로 철조 약사불이 있다는

선원사(禪院寺)를 들렸다. 해는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다.

귀경길이라 포기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신원사는 남원 시내에 위치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을 둘러보는 것은

상경 길에 가능했다. 신원사에 이르니

사찰 방문으로는 조금 늦은 시간대라 그런지 참배객은 없었다.

 

만행산 선원사(萬行山禪院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875년(신라 헌강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유래를 보면,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남원의 지형에서 주산인 만행산(萬行山)의 지세가

객산(客山)인 교룡산에 비교해 너무 허약한 것을 알고,

지세를 돋우고자 만복사(萬福寺)·대복사(大福寺)와 더불어

세운 절이 선원사(禪院寺)라고 한다.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큰 절로서

만복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고 전하는 데 창건 이후의 기록은 없고,

1597년 정유재란으로 만복사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의 선원사는 1755년 김세평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철불을 모신 약사전과 명월당이 중건됨으로써

현재의 가람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남원 지역의 중심 사찰로서 1915년에 남원 천변에

괘불탱을 걸어 기우제를 지냈으며, 1917년에는

주지 수용기선(水龍琪善)이 비로탱·신중탱·지장탱 등 수많은 탱화불사를 하였다.

 

1936년에 주지 정법민(鄭法敏)이 일주문을 비롯한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칠성탱·독성탱·산신탱 등 선원사의 대대적인 불사를 이룩하였다.

1942년에는 1755년 조성된 괘불이 훼손되어 금어 퇴운(退耘)이

괘불을 다시 조성하였다. 1961년에는 주지 일학(一鶴)이

대웅전을 건립하고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1963년에 주지 오일탁(吳一鐸)이 명월당을 헐고

명부전을 지어 완주 위봉사의 시왕상을 봉안하였으며,

1969년에는 약사전 앞의 다보여래 오층석탑과 탑비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1975년 주지 신법타가 약사전의 신중탱을 조성하였고,

1976년에는 대웅전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불상의 개금과 함께

일주문을 단청하였으며, 1978년에 범종각의 범종을 조성하였다.

 

만행산 선원사(萬行山 禪院寺)라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종루가 있고,

5층 석탑과 석조미륵불상이 자리하고 있고,

용화전, 약사전, 대웅전, 칠성각 등 당우들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선원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2호),

선원사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선원사 약사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및

선원사 대웅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5호) 등이 있다.

(자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용화전

 

@약사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선원사는 도선이 창건한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로서

약사전은 창건 이래 선원사의 주불전으로 철조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南原 禪院寺 鐵造如來坐像) 보물 제422호

시대:고려

문화재 지정:보물 제422호

크기: 높이 118㎝

 

선원사 약사전(藥師殿)에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118㎝의 크기로,

광배와 대좌는 없어지고 불상만 남아 있다. 양손도 최근에 만들어 끼운 것이다.

선원사 철조여래좌상과 관련되는 명문이나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을 알 수 없다. 철불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금박이 되어 있다.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南原 禪院寺 鐵造如來坐像)은

하남 하사창동철조여래좌상(일명 춘궁리 철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332호)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고려 시대 철불이다.

 

(하사창동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이마 위쪽에는 만기사 철불(보물 제567호)와 같은

고려 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의 육계(肉髻)을 표현하였다.

신원사의 철불은 자세히 보면 육계가 둘로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만기사철조여래좌상(보물제567호)

문화재청의 자료에 의하면 불상은 이마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미간(眉間)에 있어야 하는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고 했는데 

백호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두 개의 선으로 그린 듯한 눈썹과

부풀어 오른 듯한 눈두덩, 가늘게 뜬 눈, 오뚝한 코, 약간 팽창된 양 볼,

적당한 크기의 입과 귀를 지니고 있다.

백호만 제외하고는 이러한 얼굴 형상은 실상사의 철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과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국보 제63호)을 많이 닮았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보물제41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제63호)

이마와 양 볼, 턱 부분이 상대적으로 나와 있어 입체감을 더해 준다.

턱 아래 목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삼도(三道 : 세 개의 선)가 표현되어 있는데,

굴곡진 모습이 세 개의 링을 쌓아 놓은 듯하다.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法衣 : 불상의 옷)를 착용하고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는 불상이다.

장방형의 머리와 약간 긴 듯한 목, 네모난 상체, 넓게 퍼진 듯한

삼각형의 하체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듯하지만,

신체 곳곳에서 입체감을 나타내려 한 노력이 보인다.

 

불상의 가슴 부위는 밋밋하여 입체감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으며,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는 오른발은 지나칠 정도로 크게 표현되었다.

한편 V자 형식으로 옷깃을 여민 법의(法衣 : 불상의 옷)는

전례가 없는 특이한 모습으로서 옷깃 가장자리를 한복과 같이

다른 천으로 덧댄 모습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와 양쪽 무릎 부분에서 법의 위로 전해지는

불상의 질감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경직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양팔 위와 양다리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법의의 주름을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왼손에는 약함을 들지 않았지만 든 것과 같은 양상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향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해설에 따르면, 지금의 손은 최근에 만들어 붙인 것으로,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이 설명이 많다면 약사여래가 아닌

만기사의 철조아미타여래상(보물 제567호)을 닮은 꼴이 된다.

 

이와같은 예로는 한천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667호)이 있다.

한천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멸실된 두 손을 보완할 때

약사불로 보고 수인을 보완했지만 훗날 보수 과정에서

비로자나불로 판명되어 약사불의 수인을

비로자나불의 수인한 것으로 정정하여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제667호)

선원사의 철조약사불의 특징을 보자면,

통일신라 시대 9세기 이후에 불상의 재료로 사용되던 철로 제작되었다는 것과,

머리카락 형태와 얼굴의 모습이 고려 시대 전기에 보이는

일반적인 철조여래좌상과 유사하지만,

V자 형식으로 법의를 입은 모습은

다른 불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선원사의 철불은 충주의 3대 철불이라 불리는 1m 크기의 철조여래좌상들과 비슷하다.

충주의 3대 철불은 고려 시대 이 지역에 조성된 대표적인 철불로

단호사의 철불(보물 제512호), 배운암의 철불(보물 제1527호),

대원사의 철불(보물 제98호)를 말한다.

선원사의 이 불상이 언제부터 전라북도 남원 선원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래 이곳에서 조성되었다면 고려 시대 전기 철불 조성이

지역적으로 상당히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 1961년 지은 것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고,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60년경 선원사 주지 일학(一鶴)이

신도계의 도움으로 건립하였으며,

이곳에 위봉사 보광명전의 불상을 이운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

 

 

@모과나무

선원사의 천년 고찰임을 말해 주듯 대웅전 앞에 있는 이 모과나무는

옹이가 더덕더덕한 것이 세월의 고태를 머금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모과나무의 수령은 260년, 수고(樹高)는 8m,

지름은 1m인데 옹이를 보면 이보다는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칠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