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용담사와 보물 제42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2020. 11. 1. 10:56문화재

 

남원 용담사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로,

남원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주천면 용담리에 위치한다.

백제 26대 성왕(재위: 523~554년) 때 세운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전설이나 유물로 보아 신라 말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절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부근의 용담천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면서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을 살상할 뿐 아니라,

처녀들을 놀라게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에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절을 짓고

용담사라 한 뒤부터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에 억불정책으로 폐허가 되었고, 1914년에 옛터에 중창되었고,

1989년에는 수해로 무너진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996년에는 칠성각을 헐고 북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새로 지었다.

현재 이 절터에는 보물 제42호로 지정된 용담사지 석불입상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용담사 칠층석탑과 석등 등이 있다.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 거불(巨佛)상 계통을 따르고 있는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로 평가되며,

높이 10m에 이르는 홀쭉하고 긴 모양의 용담사 칠층석탑은

용담사 창건 당시의 유물로 여겨진다.

 

 

 

남원 용담사지 7층 석탑

남원 용담사지 칠층석탑(南原 龍潭寺址 七層石塔)은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탑은 1층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얹었는데,

너무 길쭉하고 홀쭉한 데다가 지붕돌이 몸돌보다 두터워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위로 오를수록 받침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탑의 높이 9.95m이며, 높이 0.63m의 방형기대석(方形基臺石) 위에

1단의 굄을 새겨 초층탑신(初層塔身)을 받치고 있는데,

기단은 이 1석만으로 대치하고 있다.

 

제1 옥신(屋身)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모각(模刻)한 판석을 좌우에 맞세우고,

그 두께를 우주로 삼아 전후에 면석(面石)을 끼우는 통상수법을 사용하였는데,

좌우 면의 너비도 전·후면에 비교하여 약 7㎝가 좁고,

좌우 면석의 두께도 동면석은 29㎝, 서면석은 26㎝로 불규칙하며 조잡하다.

 

옥개석(屋蓋石)은 하면에 6단의 받침이 추녀 끝까지 새겨져 있으며,

낙수면(落水面) 경사도 완만하여 반전(反轉)도 거의 없다.

옥개 윗면에는 굄을 따로 각출(刻出)하지 않고 제2 탑신을 받고 있다.

제2 탑신부터는 너비와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1석으로 우주를 새겼다.

 

제2 옥개석은 너비 1.77m, 높이 0.58m로 하면에 6단의 받침을 새겼으나

받침의 높이가 중후한 데다가 옥신이 급격한 소형이므로 매우 불안정한 감을 준다.

제3 옥신은 하층보다 약간 줄었으나 높이는 거의 같다.

우주를 얕게 전각하였고, 옥개석은 역시 6단의 받침을 가공하였다.

 

제4층 옥개석은 5단 받침을 새겼고, 제5층은 4단 받침,

제6·7층은 3단 받침으로,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받침의 단수를 감소시켜가는 수법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옥신도 위로 올라가면서 차차 체감되고 우주를 모각했으며,

제5옥신부에서는 2매의 면석을 좌우로 세워서 옥신을 받고 있는데,

이 부위가 취약하여 탑신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측된다.

탑신의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이 불안정한 부분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남원용담사 석등

남원 용담사 석등(南原 龍潭寺 石燈)은 2019년 12월 20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용담사의 이 석등은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호) 및

용담사 칠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과 함께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의 상대석은 신라 시대는 일반적으로 8각형을 취하고,

고려 시대는 드물지만, 화천 구운리석등과 같이 6각형도 있지만,

대개 4각형인데 반하여 이 석등은 통일신라 팔각 간주석 석등의

전형적 양식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전체적인 원형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고

고려 시대 석조 미술의 장중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용담사 미륵전에 보물 제 42호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남원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2호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은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매우 양감 있게 표현된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6m에 이르는 석조여래입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2호

용담사지석불입상(龍潭寺址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 <남원용담사지석조여래입상>으로 변경되었다.

 

 

광배는 일종의 거신광배(擧身光背) 형태로,

광배 바깥쪽 주위는 불꽃무늬를 돌렸는데 많은 부분이 결실되었다.

양팔 옆 광배 오른쪽에는 원형, 왼쪽으로는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목조가구(木造架構)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타원형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발밑의 촉을 끼워서 신체와 연결하고 있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하나의 돌에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거구의 석조여래입상으로 높이가 6m에 이른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높고 큼직하며,

얼굴이나 귀도 긴 편이나 안면 마멸이 심하여 상호는 분명치 않다.

눈·코·입 등은 거의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크고 긴 귀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당당한 어깨는 장대하고 강건하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나타났던 괴체화(塊體化)가 아닌

매우 당당하고 양감이 풍부한 불상이다.

 

 

몸의 굴곡도 역시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전면은 의문(衣紋)이 마멸되어 측면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측면에 남아 있는 옷 주름을 보면 굵고 간략한 음각선으로 새겼고,

발목 부분은 세로줄의 옷자락 무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복부 근처에 대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다.

 

 

두부의 광배는 불상과 일상으로 된 거신광으로서 상부 결실이 심하고,

외연을 따라 불꽃무늬가 있는 것 같지만 마멸되었다.

일부분만 남은 두부 후면의 원형 후광도 굵은 수법이나

세부 문양이 분명치 않다. 이 불상은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를 조각한 거구 장신이며 광배, 대좌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 위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창건하여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절 안의 대웅전은 북쪽을 향하여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다.

 

 

용담사는 고려 시대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불상은 중창할 때 본존불로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장신의 체구로 간략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의습에서나 광배·대좌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고려 초기 제작으로 추정하게 한다. 이러한 거구의 불상으로는

파주 광탄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예산 삽교읍 석조 보살입상(보물 제509호),

증평 광덕사 석조여래입상과 미암리 석조관음보살입상 등이 있으며,

이 시기 거구 불상들의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라 하겠다.

 

광덕사 석조여래입상

 

미암리석조관음보살입상
삽교읍 석조보살입상

 

용담사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