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

2020. 10. 16. 15:38문화재

 

춘향전과 판소리의 고장 전라북도 남원,

그 남원에 고려 때 창건된 거찰(巨刹) 만복사의 절터가 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있는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만복사의 옛 절터로 1991년 3월 3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복사의 창건은 일설로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를 보면,

“기린산 아래에 있는데, 동쪽에 오층전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이 있으며,

전 내에는 동불이 있는데, 길이가 35척(약 10.6m)이다.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숙종 때에 간행된 『용성지(龍城誌)』에는

“만복사 내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육전, 영산전, 보응전, 종각,

천불전, 나한전, 명부전 등의 불전이 있었으나

정유재란(1597)의 병화(兵禍)에 불타 잿더미가 된 뒤

사찰을 갖추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례 걸친 발굴조사결과

만복사지는 창건 후 몇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쪽, 서, 북쪽에 각각 금당지가 있는

1탑 3금당 식의 가람 배치양식의 사찰로 북 금당지 북쪽에 강당지가,

목탑지 남쪽에 중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고려 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유구가 남아 있어 고려 시대의 가람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만복사지는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 시 소실된 후

1679년 (숙종 4년) 남원 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 소설을 남겨 한문 소설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당시 만복사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발굴조사 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석조대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및

석인상(石人像) 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

 

만복사지 석인상은 본래 만복사지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00c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 위험이 큰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의 형태는 사각형의 돌기둥에 3개의 면만을 이용하여

사람 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편평하게 다듬었다.

 

다듬은 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확인되었는데,

위쪽 구멍은 머리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22cm,

두 번째 구멍은 318cm 내려온 곳에 있다.

석인상의 머리부는 정상부가 둥글고 볼록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안구(眼球)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몸통부는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半裸體)이며,

오른손은 완전히 구부려 주먹에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물건을 쥐고 있다.

군의(裙衣)는 허리 부분에서 묶어 상단부 옷자락이

밖으로 뒤집혀 늘어뜨렸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게 돌출시켰다.

하반신은 수직으로 늘어뜨린 옷 주름에 가려졌고

다리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다리의 아래쪽은 대좌(臺座)를 사용하지 않고

사각형의 돌기둥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5cm이다.

 

@남원 만복사지 석인상의 특징은

일반 석인상과는 달리 육계가 있다는 것이다.

만복사지 석인상은 만복사지에 남아 있는 다른 석상들과 함께

당간지주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복사지 당간지주 앞에 있는 석인상은

고려 시대 사찰의 가람 배치를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만복사지 당간지주

문화재지정 :보물 제32호

조성시기: 고려 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원래 지주 사이에는 돌, 혹은 철, 나무로 된 긴 당간을 세워

그 위에 깃발을 매달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만복사지에는 당간은 남아 있지 않고 지주만이 남아 있다.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건립 연대와 경위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아마도 만복사지가 창건된 시기에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지주는 만복사지 입구에 동,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양쪽 지주 모두 표면은 다듬지 않아서 매우 투박하면서도 거칠어 보이며

별다른 장식은 없는데,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모를 깎아 다듬었다. 지주의 안쪽 면 상단에는

직사각형의 구멍[杆溝]이 있고, 1m쯤 내려와서 당간을 고정하는

원형의 간공(杆孔)이 있으며, 여기에서 2m쯤 내려와서 하부 간공이 있는데,

역시 원형으로 중앙의 간공과 같은 형태이다.

 

현재 흙과 모래의 퇴적이 심하여 하반부와 기단(基壇)이 매몰되어 있어

하부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원래는 당간을 세웠던 받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두 지주만 남아 있어 원래의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투박하면서도 소박하며 생략화된 기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 만복사가 창건될 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서,

고려 전기 당간지주의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유물이라 생각된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30호

문화재지정: 보물 제30호

조성시기 : 고려시대(11세기)

 

만복사지는 고려 전기 문종 때에 창건된 사찰로서

원래 절의 중앙에는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오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단층 기단을 갖춘

방형 평면의 일반형 석탑으로, 현재는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으나

본래는 오층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탑 양식과 발굴조사를 통해 11세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1매의 돌로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오층의 지붕돌[옥개석]과 탑신을 쌓았다.

탑신석과 지붕돌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1층 탑신은 다른 층에 비교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며,

매 층 탑신석에는 탱주는 없고 우주(隅柱)가 얇게 부조되어 있다.

 

3층 탑신의 하부 중앙에는 포탄형의 감실(龕室)을 두었다.

지붕돌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아래에는 낮은 2단의 턱을 만들어 지붕 받침을 대신하고 있고,

상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 위에 탑신 괴임이 두껍게 층마다 삽입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폭에 비하여 높이의 안정감이 있으며,

지붕돌 역시 1층 지붕돌처럼 낮고 넓으며 체감률도 매우 낮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지만, 길이가 짧고 두껍게 조성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었다.

현재는 오층 탑신석과 지붕돌 및 상륜부는 상실되었다.

 

이 석탑은 만복사지 일대에 오랫동안 토사가 쌓여 있어 기단부가 묻혀 있었는데,

1968년 12월에 매몰되어 있던 기단부를 드러내 단층 기단임이 확인되었다.

당시 석탑의 해체 수리가 이루어져

초층 탑신의 윗면에서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되었으며,

사리공에서는 금동편, 소옥, 은제 장신구, 산호편, 향목편 등이 수습되었다.

 

현재 4층 이상이 결실되기는 했지만 두꺼운 탑신 괴임의 삽입이라든가

세부적인 수법에서 고려 시대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고려 전기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석탑은 2층에서 4층에 이르기까지 탑신과 지붕 사이에

별석의 탑신 받침대(괴임)를 갖추고 있는데,

이처럼 탑신 받침으로 별석을 삽입하는 것은

홍제동 오층석탑과 신복사지 삼층석탑 등

고려 시대의 석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석부재는 옥개석으로 추측된다.

 

 

석조여래입상이 봉안된 보호각

 

남원만복사지석조여래입상(南原萬福寺址石造如來立像)

문화재지정: 보물 제43호

조성 시기: 고려 시대

크기: 2m

위치: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

 

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절터 보호각 안에 봉안된 이 석조불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이고,

이 석조여래입상도 창건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尺)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만복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3호

만복사지석불입상(萬福寺址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남원만복사지석조여래입상)으로 변경되었다.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마치 조선의 옛 여인들의

*가체(加髢)를 닮은 둥근 깃과 같은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가체(加髢): 옛 여인들이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로,

흔히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나 표준어는 다리이다.

한자로는 ‘체(髢)’라 하고,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전신으로 걸치고

U자형의 주름이 상체에 유려하게 흐르다가

다시 양쪽 다리로 각각 내려가서 옷 주름을 이루고,

두 다리의 U자형 옷 주름과 함께 목의 옷깃을 한 번 뒤집는

반전수법(反轉手法)을

우드야나(udyana, 優塡王像)식 착의법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이는 신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국보 제82호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여래입상이나,

보물 제427호인 예천 동본리석조여래입상을 들 수 있다.

 

 

만복사지석조여래입상 또한 신라 시대 석조불상의 특징인

우드야나식 통견(通肩)의 대의를 하고 있으며,

양어깨에 걸쳐져 독특한 접힘이 있고,

가슴 부근에 U자형 넓은 옷 주름이 양다리 상하에 긴 타원형으로

반복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를 아우르는 끝단이 U자형으로 마감되었으며,

그 아래로 군의가 보인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조성 시대와 수인의 형태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한 것으로 보아

미륵불이 아닌가 사료된다)

 

 

광배(光背)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으로 이루어졌으며

2조의 굵은 선으로 조각하였다.

윗부분이 훼손된 주형거신(舟形擧身) 광배로

두광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 줄기가 새겨져 있고,

신광에는 연꽃 줄기만 새겼다.

두 신광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조각하였고,

화불(化佛)을 맨 위쪽에 1구, 좌우에 각각 상하로 2구씩 모두 5구를 조각하였다.

 

@대좌는 상대와 지대석으로 되어 있고,

상대는 앙련이 아닌 덩굴무늬(?)로,

지대석은 8각으로 면마다 2기의 안상(眼象)이 부조되어 있다.

 

@이 불상의 광배 뒤편에는 선각(線刻)으로 조성된 불상이 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영락 등 법의(法衣) 등이

섬세하게 부조되어 있다.

손에 정병(淨甁)을 든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된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손과 발을

별도로 제작하여 끼우는 방법을 지니고 있고

법의는 신라 하대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수평적인 어깨, 옷 주름의 간략화 등의 표현 양식으로 보아

초기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원 만복사지석조대좌(南原萬福寺址石造臺座)

시대:고려

문화재 지정: 보물 제31호

크기 : 높이 1.5m

제작시기 : 11세기경

 

 

현재까지 문화재 보물급으로 지정된 석조대좌는 여러 기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주요 석조대좌를 보면, 보물 제543호인 홍천물걸리석조대좌(크기 약 1.10m)는

팔각연화대좌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정교하게 부조되어 있고,

보물 제8호로 지정된 고달사지석불좌는

방형의 대좌에 크기도 1.57m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데

모두 통일 신라 후대의 작품이다.

여기에 비해 만복사지의 석조대좌는 고려 초기 작품으로

1.5m에 달하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대와 중대, 하대를 조각한 것으로

육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남원도호부 「불우조(佛宇條)」에

“만복사는 기린산에 있다. 동쪽에 5층의 불전(佛殿)이 있고

서쪽에 2층의 불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35척(약 10.3m)의 동불(銅佛)이 있다.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석조대좌는 10.3m의 청동 불상을 봉안했던 대좌로 추정된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는 높이 1.5m,

한 변의 길이 1.2m의 거대한 화강암 한 돌로 조각되었는데,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 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조각하였고,

중대보다 넓은 상대에는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연꽃이 새겨졌던 측면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는 35척[약 10.3m]의 청동 불상을 봉안했던 석조대좌로써

화강암의 한 돌로 조각되었는데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8각 3단 대좌에서 벗어난

6각형의 불상 대좌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