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전 구형왕릉 (山淸 傳 仇衡王陵)

2020. 10. 3. 17:44문화재

 

이번 산청의 기행의 마지막 방문처로 전 구형왕릉을 찾았다.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1971년 2월 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14호

<산청 왕산 전구형왕릉(山淸 王山 仇衡王陵)>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산청  9경 중 제4경인 전구형왕릉은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고

왕릉 아래에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주차장에서 왕릉까지는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新羅太大角干純中壯烈 與武王金庾信射臺碑

(신라태대각순중장령여무왕김유신사대비)>

신라 태대각의 생전 장열함과 더불어 무왕 김유신의 활터 비라는 의미인데.

大角干(대각간)은 신라시대 관등으로 660년(태종무렬왕7년)에 백제를 멸하고

공을 세운 대장군 김유신에게 주었던 17등 위에 부여한 특별 관등이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를 멸한 668년(문무왕8년) 10월에

크게 논공행상을 할 때 김유신을 태대각간으로 삼았다.

이것은 특별한 공로자에게만 주었던 벼슬로

삼국을 통일한 뒤 다시 대각간에 太자를 더붙여 태대각간으로 삼은 것이다.

 

 

유의태 약수터 가는 길이 전구형왕릉 왼쪽 언덕 위에 있다. 이곳의 한천수로 불치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유의태는 허균의 스승으로 알려진 신의 다.

 

 

 

홍살문을 지나면 정문이 있고, 정문 뒤에 왕릉이 있다

 

 

 

 

 

위치; 경남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로

문화재 지정: [산청 전 구형왕릉] 사적 제214호(1971.02.09 지정)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돌무덤은,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능으로도 전하며,

양왕은 신라왕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무덤은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요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헌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는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호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