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대원사(大源寺)

2020. 10. 1. 11:14문화재

 

이번 산청 지역의 순례는 서울에서 거리도 멀지만,

당일 코스라 한정된 시간 안에 움직여야 하기에

내원사의 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과 대원사의 다층탑

그리고 사찰 조경이 뛰어나다는 수선사만 둘러보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움직이다 보니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과욕이 일어 내원사 가는 길목의 겁외사와

남사예담촌을 덤으로 들리는 바람에 대원사 탐방은 건성이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원사 입구에 도착하니 일요일 등산객들과

참배객들의 차가 많아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시간을 소비했고,

코로나 탓에 법당에 참배객이 있는 전각은

참배가 끝날 때까지를 기다릴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렸다.

또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려 갈 길 먼 나그네 마음이

분망(奔忙)해지고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있는 산청 내원사는

구례 화엄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연기(緣起, 烟氣) 조사가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 9년(548년)에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기대사의 출생지와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의 사경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195호)>의

발문에 따르면 「연기(緣起, 烟氣)는 황룡사의 승려였으며

경덕왕 13년(754) 8월 1일부터 화엄경 사경을 시작하여

이듬해(755) 2월 14일에 완성하였다.」 고 하였으므로

연기조사는 진흥왕 대(540-576)의 인물이 아니고

경덕왕 대(742-765)의 실존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대원사(大源寺)는

연기(緣起)대사가 창건하였을 때의 사찰명은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1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1685년 숙종 11년에

운권(雲捲) 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大源庵)이라 새로 세우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 구봉혜흔선사(九峰慧盺禪師)가 조사영당을 보수하고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하니

전국위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비들의 약탈 방화로 소실된 뒤 8년 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法一) 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의 선원은 석남사(石南寺)·견성암(見性庵)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하여

5전(殿), 2각(閣)· 봉서루와 선방, 요사채를 갖춘 대가람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절 뒤쪽의 사리전(舍利殿)은 다른 지방에서 수도하러 온

여승들이 기거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화재로는 사리전 앞에 보물 제1112호인 다층석탑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1호인 신중도가 있다.

이밖에도 절 입구에는 부도와 방광비(放光碑)가 있고,

절 부근에는 옛날 선비들이 수학하였다는

거연정(居然亭)·군자정(君子亭) 등이 있다.

 

 

 

봉상루(鳳翔樓)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 역할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팔작지붕을 한 정면에서 보면 2층이고,

대웅전에서 보면 1층이다. 정면 편액은 <방장산 대원사>이고,

후면(대웅전 쪽)은 <봉상루>로 되어 있다.

1층은 매점으로, 2층은 다도로 이용되고 있다.

 

 

 

봉상루를 올라 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고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

1950에 지어진 것으로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어칸과 창호가 사군자(梅蘭菊竹)의 문살로 짜여 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본존불 뒤에는 영산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법당 안에 있는 이 신중탱이 문화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무언가 이상하여 검색해 보니 문화재지정 신중도는 따로 있었다.

 

@산청대원사신중도(山淸大源寺神衆圖)

시대:조선 후기

문화재지정;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1호

크기 :세로 144㎝, 가로 123.5㎝

재질; 비단 바탕에 채색

제작 시기 :조선, 1794년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을 그린 불화로서,

조선 후기 1794년(정조 18) 설훈(雪訓), 덕민(德旻), 언보(言輔) 등

3인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현재 대원사 선방에 소장되어 있다.

 

화면의 상단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부중(天部衆),

하단은 위태천(韋駄天)을 중심으로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배치되어 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에는 아래위로 꽉 차게끔 인물들을 그려 넣었는데,

상단의 중앙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꽃을 받쳐 든 채

정면을 향해 상반신을 드러낸 제석천을 두고,

좌우에는 2보살과 일궁천자(日宮天子), 월궁천자(月宮天子),

주악천인(奏樂天人), 동녀(童女) 등을 배치하였다.

이들 뒤에는 병풍이 둘려 있어 마치 실내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만

상단과 하단을 구분 짓는 채운(彩雲)으로 인해

천부중들이 모두 구름 속에 묻혀 천상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름으로 분리된 하단에는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묘사하였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염에 둘러싸여 새 깃 같은 장식으로 장엄한

화려한 투구를 쓰고 두 손에 삼지창을 받들고 있는 위태천이 합장하고 서 있는데,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과 작은 이목구비 등이 제석천의 얼굴과 유사하다.

위태천의 왼쪽에는 용왕과 호계대신(護戒大神) 등이,

오른쪽에는 산신(山神)과 복덕대신(福德大神) 등 호법신들이

각각 무기를 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태천을 옹위하고 있다.

이들은 무표정하고 온화하게 생긴 천부중들과는

달리 눈을 위로 쳐 뜨고 응시하는 모습에서 신장으로서의 용맹함이 잘 드러나 있다.

채색은 적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짙은 갈색과 백색, 황색,

청색, 금색 등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특히 위태천의 투구와 무기,

홀 등에 금색을 칠하여 다소 어두운 화면에 화려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준다.

 

철선묘(鐵線描)에 의한 차분한 필선과 꽉 찬 듯한 구도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보살과 신장 등의 형식화된 얼굴 모습과

어두운 적색 위주의 채색과 금색의 사용 등의 화법에서

19세기 불화로 이행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山淸大源寺多層石塔)

 

건립 : 조선 시대 (1784년)

문화재지정:보물 제1112호

 

탑의 높이는 6.6m로 646년(선덕여왕 15) 자장(慈藏) 율사가 세웠다는

이 탑은 돌이 철분을 많이 함유한 탓으로 붉은 물이 스며 나와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나 조각은 소박하다.

현재의 석탑은 각 부재가 어긋나 1989년에 해체하여 복원된 것으로,

당시에 사리 58과와 함께 파손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1784년 정조8년에 이 탑을 처음 개축할 때는 72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는데,

큰 것은 녹두 알 만하였고 작은 것은 기장알 정도의 크기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탑전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내가 경내를 진동시켰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맑은 사람은 곁 연못의 물에 비친 탑의 그림자 속에서

탑 안의 사리를 보았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사리전

석탑 뒤편에 보이는 전각이 사리전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비구니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옛적에 성철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動靜一如의 도리를 깨우쳤다고 하며,

옛적 이름은 다층탑 앞에 있어 <탑전>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사리전>으로 바뀌었다.

 

석탑의 위치는 현재 대원사 사리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전 서쪽에는 널찍한 탑전(塔殿)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석탑이 위치하였다. 바로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으며,

옆면에 ‘석가불사리탑건륭갑진중건(釋迦佛舍利塔乾隆甲辰重建)’이라고 새긴

글자가 있어, 석탑이 1784년(정조 8)에 다시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8층의 몸돌(탑신)과 지붕돌(옥개석)을 올리고

머리 장식인 상륜(相輪)을 놓은 모습이다.

다만 이 석탑을 9층 석탑이나 10층 석탑으로도 부르는데,

그것은 2층 받침돌을 단층 받침돌로 보거나

받침돌을 합하여 층수를 세었기 때문이다.

다만 배례석을 받치고 있는 석재가 탑신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탑신이 맞는다면 9층이 되지만

아마도 해체 복원할 당시 빠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래층 받침돌(하대갑석)의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우주)과

1개의 가운데 기둥(탱주)이 새겨져 있다.

덮개돌은 두툼한 편으로, 평평한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2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위층 받침돌(상대갑석)은 이 석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네 귀퉁이 모서리 기둥(隅柱:우주)에는 머리에 복두를 쓰고

왼손과 오른손을 아래위로 포개어 홀(笏)을 들고 있는

문관상(文官像)이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이 문관상은 중건(重建)할 때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상대 각각 면석에는 천왕상이 부조되어 있다.

덮개돌은 두툼한 1장의 널돌로 이루어졌는데,

밑면에는 얕은 부연(副椽)을 새겼으며,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여 올려놓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2단의 받침(괴임대)이 있고,

윗면에는 위층의 몸돌을 받칠 수 있는 각진 1단의 굄이 있다.

다만 받침과 굄이 낮아서 지붕돌의 전각(轉角)이 두터워 보인다.

옥개석은 둔중하며 제9층의 사우(四隅)에는 작은 종형을 한 풍탁(風鐸) 달았다.

이 풍탁은 해체 후 복원할 때 달은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으로 꾸민 돌을 놓고서

굵직한 찰주(擦柱)를 가운데에 꽂아 두었는데,

찰주 중간에는 원뿔 모습의 보주(寶柱) 하나가 장식되어 있다.

 

 

 

 

석탑의 건립 시기는 각 부분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조선 전기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무너졌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 석탑은 각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석탑으로,

이 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지리산에는 영산을 상징하는 의미로 3기의 탑이 있는 데

서탑(西塔)인 구례 화엄사의 3층 석탑(국보 제35호)과

中塔(중탑)인 법계사의 3층 석탑(보물 제473호)

그리고 東塔으로 대원사의 다보탑이다.

 

원통보전

1950년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주포식 팔작지붕이다.

대원사의 원통보전은 사방이 팔작지붕으로 된 것이 특이하다.

법당 안에는 금동관음불을 봉안하고 뒤편에 천수관음탱을 조성했다.

 

 

 

명부전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법일스님 중창비와 부도

법일 중창비는 대원사의 중창에 대한 법일 스님의 공덕비다.

좌측에 부도가 있는데 서곡당, 사은당 방광비(放光碑)와

효봉당, 석봉장 방광탑(放光塔)이 있다.

방광탑이나 방광비는 전설에 의하면

사찰에 큰 역사나 일이 일어나면 빛을 발한다고 한다.

지리사 쌍계사에도 평운당 방광탑이 있다.

 

 

일주문

일주문의 편액은 「方丈山 大源寺」 으로 되어 있다.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智異山)의 이명이다.

또 다른 이명으로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방장산은 봉래산(蓬萊山:금강산)·영주산(瀛洲山:한라산)과 함께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이들 3산을 삼신산(三神山)·삼선산(三仙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원사의 일주문은 1998년 정천수 목수에 의해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편액의 글은 세로로 되어 있다.

송광사 일주문과 순천 선암사의 일주문에서도

이와 같은 형식의 편액을 볼 수 있는 데 이런 형식은

고려 때 주로 사용된 형식이며 조선 시대에는 쓰지 않는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