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석불 산청 내원사 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좌상
2020. 9. 26. 15:44ㆍ문화재
이번 산청 지역의 사찰 탐방의 주목적은 산청 내원사의
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을 친견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불을 친견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를 통한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나는 비로자나불의 수인을 지권인(智拳印)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오른손이 왼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우권인(右拳印)인 데 반하여
국보 제26호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이나,
보물 제542호인 홍천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좌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상도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인데
대개 비로자나불은 길상좌(吉祥坐)을 하고 있는 데 반하여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항마좌를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불로 알려진
석남암사지석조보로자불좌상을 통해
그 호기심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에 벼루고 벼루다가
오늘이야 겨우 산청 내원사를 찾게 된 것이다.
산청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 소속으로 되어 있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신라 태종 무열왕(武烈王) 4년(65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으며, 진성여왕 2년(888년)
동방의 대보살로 불리는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년)가 상주하면서
정진처로 삼아 사세를 확장한 후 1000여 년을 면면히 이어오다가
조선 조 광해군 1년(1609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절터는 마을 주민들의 전답(田畓)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1959년 원경(圓鏡) 스님에 이를 매입하여
옛 덕산사 입지(立地)에 재건하여 사명(寺名)도 내원사(內院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원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원효대사는 익히 알려진 고승이지만,
동방의 대보살로 칭한 무염(無染) 국사는 보령성주사지 성주사,
계룡산 갑사, 영동 반야사 등 여러 사찰의 창건 기록에 나오는
통일신라말 고승으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파의 개조로 알려진 선승이다.
속성은 김씨, 법명은 낭혜(朗慧), 법호는 무염(無染)
휘호는 백월보광(百月寶光)이다.
(1)보령성주사지 성주사 창건을 보면.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聖住寺)로 바꾸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고,
그에게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리려 한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무염국사는 신라말 선문구산 중 성주산문파 개조로
현재 보령성주사지의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에 의하면
무염국사의 생몰연대는 801년~ 888년이 된다. (본방 보령성주사지 참조)
(2)계룡산 갑사의 창건 기록을 보면,
계룡산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보광명전, 대광명전 등을 중건하여
사찰로서 명목을 갖춘 화엄종 10대 사찰로
통일신라 시대 진성여왕 원년(887)에
무염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3)영동 반야사의 창건 기록을 보면
반야사의 창건주에 대해서는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의 여러 가지 창건설화가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800~888)가
황간 심묘사에 계실 때 사미승 순인을 이곳에 보내
못의 악룡(惡龍)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세운 절이라고 전해진다.
내원사의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심우당(尋牛堂), 비로전(毘盧殿),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나 건물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삼성각에는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보물로는 비로전에 봉안된 국보 제233-1호인 산청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원사 삼층석탑이 있다.
또한,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된 국보 제233-2호인 사리호가 있는 데
이는 이 석불의 대좌 중대석에서 발견된 된 것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 석불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석조 비로자나불로는
최고(最古)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불이 처음 발견된 것은
지리산 자락에 속하는 산청 지역의 한 산봉우리쯤에 있는
거대한 바위 위 절터에 있었다고 한다.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山淸內院寺三層石塔)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보물 제1113호
건립 시기: 통일신라 시대
높이 4.8m. 현재 대웅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석탑의 북쪽에는 법당 터가 있고,
주변에는 석등의 부재(部材)와 석탑의 상륜부(相輪部) 석재,
여러 석조물의 조각 등이 놓여 있다. 따라서 절은 남향한 1탑 가람 배치를 하였고,
석탑의 위치는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자리로 보인다.
석탑은 2층 받침돌(기단부) 위에 3층의 몸돌(탑신)과
지붕돌(옥개석)을 올리고서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장식한 모습이지만,
원래의 상륜부는 하나도 남지 않아 보완된 것이라고 한다.
무너져 있던 것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며,
기단부(받침돌) 일부와 1층 탑신(몸돌),
상륜부(지붕돌)의 전각 부분에 약간의 훼손이 있으나
원형은 대체로 잘 남아 있는 상태이다.
바닥돌(하대저석)과 아래층 받침돌(하대갑석)의 면석은
면마다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4장의 널돌을 네모나게 놓았다.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좌우로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에 2개의 가운데 기둥(탱주)이 돋을새김 되었다.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하대갑석)은 4장의 널돌로 짜였으며,
윗면에는 둥글고 각진 2단의 굄을 마련하여
윗받침돌(상대갑석)의 면석을 받치게 하였다.
윗받침돌의 면석(상대면석)도 4장의 널돌로 조립되었는데,
모서리 기둥과 함께 1개의 가운데 기둥(탱주)이 새겨져 있다.
윗받침돌의 덮개돌 또한 4장의 널돌로 구성되었는데,
아랫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있고,
윗면에는 다른 돌로 2단의 각진 굄대(옥신괴임)를 마련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탑신)과
지붕돌(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여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하게 새겨져 있고,
지붕돌 아랫면의 받침은 4단이다.
지붕돌의 추녀는 직선이지만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이 있어서,
평박(平薄)해 보이는 낙수면과 잘 어우러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 석탑은 불에 타서 변색은 되어 있지만,
지붕돌(옥개석) 윗면에 2단의 굄을 두어
몸돌(탑신)을 받치게 한 것과 함께 받침돌의 구성,
세부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에 2개의 가운데 기둥(탱주)을 새긴 것은
지리산 주변 지역에 있는 석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전(毘盧殿)>
전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된 비로전 안에는
국보 제233-1호인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문화재 지정: 국보 제233-1호 (2016년 1월 7일 지정)
시대: 통일신라 766년 (혜공왕 2)
규격(cm) : 불상 높이 102, 어깨너비 52.5, 무릎 높이 15.3,
무릎 너비 85.2, 광배 높이 118, 광배 너비 80, 대좌 높이 7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전체 높이 117㎝, 불상 높이 108㎝로 되어 있다.
불상은 대좌와 광배를 두루 갖춘 석불상(石佛像)이다.
결가부좌(結跏趺座)의 자세로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좌불상이다.
1990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21호
석남암사지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藪石造毘盧舍那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고,
2016년 1월 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33-1호로 승격되었다.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석조 비로자나불상이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머리의 육계(肉髻)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었다.
머리칼은 소발(素髮)이며 머리 윤곽은 둥글고 완만한 편이다.
얼굴은 둥글고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신라 불상의 원만상(圓滿像)을 잘 나타내었다.
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팽창된 뺨의 부피감이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얼굴의 원만상은 8세기 불상 가운데에도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이 불상은 당대의 뛰어난 명장(名匠)의 손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하였다.
불의(佛衣)는 대의(大衣)를 통견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데
두께가 얇아 육체의 굴곡을 드러나게 하였다.
옷 주름 역시 가는 돋을 띠 주름을 촘촘하고
유려하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 옷 주름의 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결가부좌한 하체의 너비는 비교적 넓은 편이나
높이는 낮아서 높은 대좌 위에 앉아야 시각상 안정감을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수인(手印)의 형태를 보면 오른손이 왼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상징인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약간 들어 가슴 부근에 대어 주먹을 쥐었다.
왼손은 무릎과 거의 수평이 되도록 내려 주먹을 쥐었는데,
두지(頭指:검지, 집게손가락)만 곧게 세워 오른손 주먹 속으로 넣었다.
왼손의 집게손가락이 비현실적으로 길고,
두 손이 밑으로 내려진 점 등은 9세기 중엽의
대다수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표현과는 달리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이는 지권인을 처음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데서 오는
초기 단계의 어색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화엄학에서는 오른손은 법계(法界)를 상징하고,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본존불로서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좌권인(左拳印)이 아닌 우권인(右拳印)을 한 것이
화엄경의 도리에도 합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석불의 결가부좌는 길상좌(吉祥坐)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비로자나불상이
우권인이며 길상좌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후에 이와는 달리 조성된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나 결가부좌는
도형상의 과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자들이 비로자나불의 수인에 대하여,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나
홍천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좌권인(左拳印)은
도형상 잘못된 것이라는 학설이 무게가 실린다.
대좌는 하대(下臺), 중대(中臺), 상대(上臺)로 이루어졌다.
하대는 8각에 복판(複瓣: 겹잎)의 연꽃무늬를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으로 새겼다.
중대는 8각의 모서리마다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를 새겼고,
상대는 복판 연화문을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으로
두 겹[重葉] 새기고 있어 8세기 대좌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중대 중앙이 관통되어 구멍이 뚫려 있고,
상대 윗면의 뒤쪽이 테두리를 따라
둥글게 등받이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광배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생각된다.
광배는 파손되고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지만,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
상부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깨어져
3분의 1 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두광은 두 겹의 선으로 둥글게 표현되었고,
그 안에 당초문과 중심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신광은 2중 선을 새겨 선과 선 사이에
당초무늬를 나타냈으나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는데, 이 역시 불명확한 편이다.
대좌 중앙의 구멍에 있었던 사리호(舍利壺) 표면에 기록된 글에는
신라 혜공왕 2년(766)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상의 가장 빠른 조성 예로
조각사 편년 및 사상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산청 석남암사지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사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년명(紀年銘)의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 자료가 부족한 고대 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여래형(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 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 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싱이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중대 중앙의 구멍에는 사리 장치가 있었는데,
도난당했다가 환수되어 현재는 부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리호(舍利壺)가 의미 있는 것은 표면에
15행 13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명문은 영태(永泰) 2년, 즉 766년에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石南巖寺)에 봉안한다는 내용으로서,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조성과 조각사 편년 및 사상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어 국보 제233-2호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이미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가
국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233호로 지정된 만큼,
이를 봉안했던 석불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때,
현재의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되어
문화재청이 비로자나불좌상을 국보 제233-1호로, 납
석사리호는 국보 제233-2호 지정한 것이라고 한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山淸 石南巖寺址 石造毘盧遮那佛坐像 蠟石舍利壺 ) 국보 제233-2호 (지정일 : 1986-10-15)
경상남도 지리산 암벽 아래에 있는 암자 터에서
불상이 없는 대좌의 가운데 받침돌 안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항아리로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지름 8㎝이다.
몸통에 비교해 도톰한 턱이 주둥이에 둘려 있고,
밑 부분은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항아리의 아가리 아랫부분과 몸체의 중간,
그리고 조금 아래쪽에 각각 2줄의 가로선을 새겼다.
뚜껑 윗부분에도 2줄로 원을 그리고 안쪽 가운데에는 연꽃을 새겼다.
이 항아리 표면에는 15행으로 돌아가며 비로자나불의 조성 기록과 함께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766)>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새겨진 글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애매한 곳도 있으나,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길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전체적인 제작 기법이나 뚜껑 처리 방식,
글자의 새김 등 미술사적 측면과 비로자나불의 제작 연대,
석불의 법사리 봉안과 조성 등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진 및 자료출처: 문화재청)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2칸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전각으로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칠성각, 천왕전, 산신전)
전면 3칸, 측면 2칸의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이 전각은 삼성각으로
편액은 칠성각, 천왕각, 산신각이란 3개의 편액이 붙어 있다.
일반 사찰에서 독성이 천왕각으로 표기된 것이 특이하다.
삼성의 탱화 외에 지리산 여 산신인 성모할미상를 봉안하고 있고,
각 탱화 앞에는 3기의 석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을 한 미륵보살 외에는 필자로서 판독이 불가한 석상들이다.
지금은 진월교를 통해 내원사를 들어가지만 옛적에는 위에 보이는 반야교를 이용했다.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청 전 구형왕릉 (山淸 傳 仇衡王陵) (0) | 2020.10.03 |
---|---|
산청 대원사(大源寺) (0) | 2020.10.01 |
산청 겁외사와 성철스님 생가 (0) | 2020.09.19 |
예산 삽교읍 석조보살입상 (0) | 2020.08.09 |
증평 광덕사(光德寺) 석조여래입상 (0) | 202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