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독산성(禿山城)과 보적사(寶積寺)

2020. 10. 11. 09:38국내 명산과 사찰

 

 

경기도 오산은 서울과 대전을 잇는 교통축에 해당하는

수도권 주변 도시에 속하지만, 문화재로서는 뚜렷이 드러난 것이 없고

또한 사찰로 순례할 만 가람이 없어 관심을 두지 못했던 곳이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외출은 일요일이라도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지만 갑갑한 마음에

가볍게 하루 나들이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우연히 오산 독산성 세마대(洗馬臺)가 눈에 띄어

호기심이 생겨 검색해 보았더니 보적사라는 절도 있었다.

옛적 남한산성의 순례를 하던 생각이 나기도 해서

세마대가 있는 독산산성을 걸어도 볼 겸

보적사가 어떤 가람인지도 궁금하여 집을 나섰다.

문헌상 기록엔 없지만 전하는 말로는

옛날에는 서해에서 오산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오산(鰲山: 鰲:자라 오)이라 불렸고,

조선 중기에는 오미장(梧美場)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다른 지방보다 까마귀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오산(烏山)으로 불렸다고 하는 오산, 그 오산으로 향했다.

 

 

 

 

 

 

 

@보적사(寶積寺)

오산 보적사(寶積寺)는 현재 독산성(禿山城) 동문 안에 있으며,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시대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가람은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로

옛 약사전을 석가여래불을 모신 대웅전(정면 3칸, 측면 2칸)을 증축 재건함으로써

삼층석탑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적 약사전을 개칭하여 중건한 대웅전이다.

법당 안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특이한 것은 4개의 탱화를 모둔 <殿>으로 표시하였다.

 

'보적사'라는 명칭에는 재미난 유래가 전해지는데

백제 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 두 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 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칠성전
산신전

 

나한전
신중전

오산 보적사 1986년 5월 20일 화성시의 향토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오산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1989년 1월에 해제되었다.

지금은 오산시 전통사찰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 앞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2층 기단부에 탱주가 있고 탑신부에 상륜부까지 조성되어 있는 석조3층석탑이다.

 

 

 

숲속에 있는 세마대

세마대

임진왜란 때에는 권율(權慄) 장군이 서진하는 왜적을 쳐 진로를 막은 곳으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권율은 명군(明軍)과 호응, 서울수복을 위해 2만여 명의 군사로

수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곳은 군사기지로는 중요한 위치였지만

물이 없어 주둔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왜장 가토(加藤淸正)는 산상에 물이 없을 것을 짐작하고

이를 탐지하기 위해 첩자를 시켜 물 한 지게를 산상에 올려보냈다.

이를 눈치챈 권율은 성안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열면서

군마를 끌어내어 흰쌀을 말에 끼얹으며 말을 씻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지켜본 왜적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서둘러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서장대를 세마대라 부르게 되었다.

 

 

세마대 앞 풍경
뒤편에도 세마대란 편액이 걸려 있다.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지(洗馬臺址)

독산성(禿山城)이라 불리는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烏山 禿山城과 洗馬臺址)는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성 내부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나 성곽과

세마대지의 최소 면적만이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 보존·관리하고 있어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성 내부까지 모두를 포함한 종합유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018년 7월 12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추가 지정하였다.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선조 25년(1592) 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 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3,24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문확석

 

 

 

 

 

 

#주춧돌이나 석등의 석조부재가 발견된 것은 이곳에 옛적에 사찰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산성으로 향하는 보적사 뒷길 풍경

 

 

보적사와 독산성을 나와 양산봉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