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 신륵사(神勒寺)

2020. 10. 7. 20:38국내 명산과 사찰

 

월악산 신륵사는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 소속이다.

1960년에 법당인 극락전을 중수하면서 쓰인

「월악산신륵사중수기(月岳山神勒寺重修記)」에 의하면

신륵사는 582년(신라 진평왕 4)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고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원효대사에 의해서 중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에

사명대사 등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나

이를 증명할 만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찰 내에서 출토되는 기와 조각과

삼층 석탑의 존재로 볼 때 고려 초로 추정된다.

또한, 신륵사 극락전은 조선 선조 때 사명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극락전의 초석에 쓰인 석탑 옥개석과 전용된 기단 석재들을 보아도

신륵사 초창 당시의 건물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의 건물은 6·25 전쟁 이후 퇴락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현재 사찰에 남아 있는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을 통해 볼 때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고려 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걸친 내력은 전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몇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60년에 6·25 전쟁으로

퇴락한 제천 신륵사 극락전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1981년에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보수하였고,

2001년에 산신각(山神閣)과 함께 요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찰의 경내에는 제천 신륵사 극락전을 중심으로 산신각,

국사당 그리고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296호인 삼층석탑과

충북 유형 문화재 제132호와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301호인 극락전과

벽화 및 단청이 있고, 높이 110㎝의 괘불대가 극락전 앞에 있다.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6호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2단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이 완전한 전형적인 석탑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탑의 상륜부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렇게 석탑의 상륜부가 잘 남아 있는 예는 드문 편으로

각 부재를 만든 솜씨도 정교하고 세련미가 돋보인다.

참고로 현재 상륜부가 남아 있는 석탑은

국보 제10호인 실상사 백장암의 삼층석탑,

국보 제44호인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보물 제37호인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등이다.

 

제천 월악산 신륵사 삼층석탑은 여러 장의 판석을 쌓아 지대석을 조성하였고,

그 위에 상층·하층의 기단부를 두었다.

 

상륜부는 끝부분인 수연과 용차가 파손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981년에 해체, 복원되었으며

1999년 6월 23일에 보물 제1296호로 지정되었다.

삼층석탑을 1981년 3월에 해체, 복원하던 중

석탑의 기단부에서 108개의 소형토탑(小形土塔)과

사리함편(舍利函片) 2개가 출토되었다.

소형토탑은 높이 3.5∼5㎝의 방형다층탑(方形多層塔) 양식을 보이며,

흙을 빚고 선을 그어서 탑층을 표현한 것이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층은 4매의 면석으로 이루어졌다.

각 모서리와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으나

서쪽 면석에는 탱주를 모각하지 않았다.

갑석은 3매로 이루어졌고, 윗면에는 2단의 괴임대를 만들어 놓았다.

상층 기단의 갑석은 3매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탑신부의 경우,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각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게 받침은 4단이며 윗면에는 1단씩의 탑신 괴임을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1층에서 2층으로 가면서 비례가 급격히 줄어들고

옥개석의 낙수 면은 전각에서 약간 반전되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륜, 보개, 찰주 등이 남아 있다.

상륜부까지 남은 석탑의 예는 매우 드문 편이고 단아한 기풍을 띤다.

석탑의 높이는 약 4m로, 본래 탑 전체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1981년에 탑을 해체, 복원하였다.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은  나말여초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천 신륵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판단되고,

신륵사의 창건 시기와 역사를 대변해 주는 유적으로 평가되나,

석탑 자체의 정확한 건립 경위는 알 수 없다.

조성 시기로는 이중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갑석에 부연이 없는 점 때문에 그동안 고려 전기의 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제천 신륵사 극락전은 1960년 재건한 것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주초석은 자연석과 석탑의 옥개석을 이용하였고

기둥은 민흘림 원기둥으로 세웠다.

기단부는 화강석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5~6단으로 쌓았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4점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본존불인 목조 아미타불좌상은 높이 140㎝이며,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불

 

우협시인 목조 관음보살좌상은 높이 110㎝로 역시 조선 시대 작품이다.

좌협시로 봉안된 지장보살은 최근에 조성된 듯하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극락전의 아미타불은 대개 본존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협시로는 관세음보살을, 우협시로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사찰에 따라서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월악산 신륵사의 극락전은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 위치를 바꾸어

좌협시로 모신 것이 특이하다.

혹자는 신륵사 극락전의 이 관세음보살을 대세지보살로 보기도 하는데

비록 관세음보살의 보관에 아미타 상이 없지만,

수인(手印)이 관음보살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미타 삼존불의 협시로 대세지보살이라면

좌협시인 관음보살의 수인과 반대로 오른손이 올라가고

왼손이 내려온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 상례인데

대세지보살을 지장보살로 봉안하면서 위치를

좌협시에서 우협시로 바뀌어 놓은 것으로 사료된다.

 

 

아미타불좌상 뒤편에는 문수와 보현보살을 위주로 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그 옆에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건물 내·외벽의 벽화와 단청은 조금 바라기는 하였으나

아직 그 원형과 색감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내부와 외부에 19세기에 조성된 벽화 136점과

단청 150점 등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 데

이번 산행의 하산 길에 들린 탓에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귀경 시간 때문에 서둘렀고,

또 신륵사 벽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지 못해 무심히 지나치게 되었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은 1982년 12월 17일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산신각

산신각(山神閣)은 2001년에 요사채와 함께 지었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전각으로 전각 안에는

칠성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되어 있다.

전각 좌측의 바위 풍경이 볼만하다.

석질은 단양 등에서 볼 수 있는 청색을 띤 화강암이다.

 

 

칠성탱
독성

 

 

 

석부재
이 석부재는 옥개석으로 보인다
석등 받침이나 석주바침돌로 보인다.

 

 

@국사당(局師堂)

경내로 들어가는 일주문과 요사채 사이에 있는 작은 건물이 국사당(局師堂)이다.

대개 국사당이라 하면 국사당(國師堂) 내지 국사당(國祠堂)인데

신륵사 국사당은 국사당(局師堂)이라 되어 있다.

대개 국사당(國師堂)이란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정에 국사를 모셔 놓고

지역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을 의미하는 데

국사당(局師堂)은 조금 생소하다.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마을 신당이 있는데

그 신당이 국사당(局司堂)이다.  사<(師)> 자 대신 <사(司)>를 쓴 것이 다르긴 한데,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국사당은 서낭당, 장군당, 영신당 등의 신당보다 한 단계 높은 신당으로

상당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월악산 신륵사 국사당은 제천시 유형 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의 자료에 의하면,

국사당은 원래 제천시 하수면 송계리의 월악산 수경대(水鏡臺)에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부터 월악신사(月岳神祀)를 설치하여 제천(祭天) 하던 곳이며,

1256년(고종 43)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나 임진왜란 때

부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난을 피하였다고 한다.

이 월악산 신사는 국가적 기도처에서 뒤에

마을의 수호신격으로 성격이 달라졌는데,

월악산 신사가 퇴락한 후 마을에 흉년이 들고 대홍수가 났으나

그 이유를 아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신륵사에 있던 승려가

그 까닭이 월악신사의 폐허에 있음을 느끼고

신륵사 경내에 국사당을 지어 월악산에 상주하는

신령님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중앙의 신령, 좌우에 동남동녀가 시립하고

있는 탱화 한 폭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2001년 조성된 것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신륵사에서 영봉 가는 길 2km 지점 우측 숲속에도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이곳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산신국사를 모신 곳’ 이란 안내판이 벽에 붙어 있고,

문은 자물쇠로 닫혀 있었다. 신륵사 경내의 국사당(局師堂)과

어떤 연관 관계인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