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석조여래입상과 선광사
2020. 9. 5. 04:01ㆍ국내 명산과 사찰
포천 석조여래입상은 경기도 포천시 왕방산 남쪽 중턱에 있는 고려 시대의 불상으로,
1995년 8월 7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불은 발굴 당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현재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하나의 돌로 된 주형광배(舟形光背)와
불신만 남아 있고, 발 부분과 대좌의 형태는 알 수 없다.
얼굴 부분이 파손이 있고, 광배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가 없다.
보호각에 봉안된 불신은 약간 기울어진 형상인데
그 옆에 대좌로 보이는 돌이 있지만, 파손이 심해 대좌인지는 불분명하다.
조각 수법은 대체로 고부조(高浮彫: 높은 돋을새김)이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263㎝, 광배 너비 120㎝,
광배 두께 11㎝, 불상 높이 230㎝, 머리 높이 64㎝,
어깨너비 79㎝, 가슴 너비 28㎝이다.
포천 어룡리석조여래입상으로 불렸던 포천 석조여래입상은 포천 왕방산 중턱에 있다.
왕방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지만
선광사 쪽으로 오르는 길이 가장 편리하고 가깝다.
선광사에서 석조여래입상까지는 대략 700m 정도이다.
선광사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왕방산 등산로 안내판이 나오고,
안내판 좌측을 따라 계속 오르면 된다.
중간 중간에 <포천석조여래입상>이란 표시판이 있어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선광사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이정표가 나온다.
선광사 전각이다. 오늘 탐방은 석조여래입상임으로 하산하면서 선광사를 둘러 본다.
선광사 전각이 있는 쪽에서 왼쪽에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왕방산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이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좌측길이 석조여래입상 가는 길이다.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중간중간마다 나무에 안내판이 붙어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왕방산 오르는 길은 너들 바위길이고 숲은 욱어져 있다.
장마가 개인 첫날이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왕방산 오르는 등산객도 하나 없는 호젓한 길이다.
보호각이 보인다. 보호각은 정면1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보호각 앞에는 2기의 돌탑이 쌓여 있다.
@보호각 안에 있는 포천 석조 여래 입상은 좌대가 아닌 맨바닥에 세워져 있는데,
주형 거신 광배(舟形巨身光背)와 신체가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광배는 마모로 판독이 불가하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둥글고 큼직하게 솟아 있다.
상호는 역삼각형이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넓적한 얼굴에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얼굴에 비교해 큰 편이고,
눈은 가는 음각선으로 처리하였다.
전체적인 상호는 양 뺨의 살이 빠져 광대뼈가 나오고
주걱턱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귀는 귓불이 길게 늘어져 양어깨에 닿을 듯하다.
목에는 긁은 삼도(三道)가 표시되어 있다.
@불신(佛身)은 얼굴에 비교하여 짧고 왜소한 편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배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다. 양손은 비교적 크다.
왼손은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향하여 드리운 모양)처럼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시무외인과 같은 형상으로 팔을 들어 어깨에 대고 있는데
손등이 밖으로 향해 있다. 군위 대율사의 석조여래입상(보물제988호)과
동일 수인을 취하고 있지만, 다만 대율사의 석조여래입상은
왼손이 시무외인을, 오른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옷 주름은
양팔에서 계단식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가슴 아래에서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줄의 U자형 옷 주름을 그리고 있다.
이런 양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한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U자형 옷 주름 양식에서 벗어나
도식화된 느낌을 주고 있다.
원통형의 불신 위에 걸쳐진 불의는 두께가 두꺼워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현지안내판에서는
이 석불은 석가모니불로 조성 시기는 고려 시대 중기로 나와 있다.
그렇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포천 석조 여래 입상은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보아 얼굴에 살이 빠지고
양손의 길이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었으며,
의문(衣紋)의 처리가 소략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설명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신체 비례, 도식적인 옷주름,
몸에 거의 붙은 듯이 표현된 어색한 손, 지방색이 강한 투박한 얼굴,
평판적인 신체 표현 등의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석불입상은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설명에는 포천석조여래입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 중기로 평가하고 있다.
현지안내판의 설명을 제외하고는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인지,
미륵불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경기북부 지역에 미륵불상이 많이 발굴되는 점도 있지만,
석가모니불보다는 법의나 수인을 고려하면 미륵불에 가깝고,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또한, 이 석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중 포천 지역에 전하는
불교 조각품 중 조각 양식이 가장 우수하여
후일 심도 있는 연구가 따를 것이라 생각된다.
<경기문화포털>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인용하여
포천석조여래입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비록 어깨와 양팔에 형성된 계단식 옷 주름이 도식적이기는 하나,
얼굴 모습과 배를 내민 자세에서 통일신라 시대 불상의 양식적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되며,
특이한 손 모양으로 보아 미륵불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해룡제벽동에는
6,600㎢ 규모의 절터가 남아 있는데, 조선 시대 기록들을 참고하면
해룡사(海龍寺) 터로 생각된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은
해룡사의 암자에서 신봉되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룡사에 관계된 유물이 없고,
경기도 내에 연대가 이른 석불입상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불상의 사료적 가치가 크다.』
보호각에서 바라본 포천 시내
<선광사>
포천 석조여래입상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이라는 것 외에 사력(寺歷)에 대한 일체 기록은 드러난 것이 없다.
본당으로 보이는 전각은 단청이 퇴락하였지만 고색창연함이 고찰의 위상이 느껴진다.
현재 불사를 계획 중인지 가건물에 대법당을 조성해 놓았다.
본당으로 보이는 옛 전각은 닫혀있고,
그 앞은 장맛비에 물이 고여 발이 푹푹 빠지는 늪이 되어 있어 참배할 수도 없었다.
어떤 불상을 모셨는지 궁금하여 가건물인 대웅전을 둘러 보았다.
대웅전이지만 본존불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에 관음보살을 탱화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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