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원적산 원적사 패랭이를 쓴 나한들

2020. 9. 11. 18:53국내 명산과 사찰

 

원적사는 이천 원적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의 비구니 절로 알려져 있다.

원적산의 동쪽 편에 있는 영원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인 용주사의 말사임을 고려한다면

원적사도 같은 교구의 말사가 아닌가 사료된다.

 

원적사가 있는 원적산은 이천시 신둔면과 백사면에 걸쳐있는

해발 634m(주봉은 천덕봉)로 이천시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는 데,

고려 말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원적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창건했다는

이천의 고찰로 알려진 영원사 가는 길의 서쪽에 있는 사찰로

이 절이 있는 마을 어귀는 산수유가 피는 계절이면

전국의 사진 마니아들과 상춘객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천 원적산 원적사는 사력(寺歷)도 짧고,

특별한 당우도, 문화재급 보물도 없는 작은 사찰이지만

법당 앞 언덕에 조성된 겨울에는 털모자를,

여름에는 패랭이를 씌운 석상들로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호기심과 색다른 관심을 끌고 있는 사찰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코로나가 극성인 8월이라 산수유는 볼 수 없었고,

법당 앞 석상(나한과 보살들)은 패랭이를 쓰고 있었다.

 

 

 

 

대웅전

 

 

5층석탑

 

수각

 

포대화상

 

 

산신각

 

#패랭이를  쓴 나한상들

패랭이는 더위를 피한다는 의미로 평량자(平凉子), 평량립(平凉笠),

폐양립(蔽陽笠), 차양자(遮陽子)라고도 한다.

가늘게 오린 댓개비로 성기게 얽어 만든 것으로,

모자집과 테의 구분이 분명하며 모정(帽頂)은 둥글다.

대나무 껍질을 이용해 가늘게 쪼개서 위를 둥그렇게 만들었는데

같은 대나무 가지로 만들기는 해도 실같이 가늘게 해서 만든 죽사립과는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대부층에서도 함께 썼으나

고급관모인 흑립이 나오자 신분이 낮은 보부상·역졸 등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역졸은 흑칠한 것을 썼고, 보부상들은 패랭이 위에 목화송이나

가화를 꽂고 끈을 매달아 머리에 고정시켰다.

불교 수행자들이 언제부터 패랭이를 사용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불교에서 삭발(削髮)은 출가 정신의 상징이다.

머리카락을 잘라서 과거를 단절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한 것이다.

삭발은 다른 말로 체발(剃髮) 또는 낙발(落髮)이라고도 한다.

낙발은 세속적 번뇌의 소산인 일체의 장식(裝飾)을 떨쳐 버린다는 의미에서

낙식(落飾)이라고도 한다.

이는 곧 세속적 번뇌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출가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세속적인 번뇌와 얽매임을 단절하려는 결단의 상징으로

머리를 깎게 한 것은 출가인이 머리 모양에 연연하는 것은

출가(出家)의 의지를 흐리게 하고 무명(無明)을 증장(增長)시킨다 하여

머리털을 무명초(無明草)라고까지 했는데

삭발은 곧 무명(無明)을 자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나 보살상은 물론 나한상들까지도

머리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더운 지역인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처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부터

환경적 변화에 따른 추위와 더위를 그리고 비바람을 피하고자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삿갓이나

패랭이 벙거지 같은 모자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으로는 미륵보살인 경우 천개를 씌우는 것도,

중국 소림사에서 보듯

삿갓을 등에 메고 있는 형상이 있지만,

패랭이나 털모자 등을 쓴 것은 지극히 예외적이라 생각된다.

 

소림사의 달마상

 

 

 

 

역사는 그렇다 치고 석상이라 하지만

추운 겨울철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털모자를,

더운 여름철에는 햇빛을 가려주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시원한 패랭이를 씌워주는 것은 비록

생명이 없는 돌맹이에 불과 하지만

心佛如衆生(심불여중생)의 도리를 일깨워 주고자 하는

원적사 스님의 깊은 자비심의 발로가 아닐까.

산문을 나서면서 아둔패기의 알름알이를 굴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