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율리 저수지

2020. 8. 1. 23:45문화재

증평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을 보러 갔다가

석불의 위치를 몰라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니

율리저수지 둘레길을 산책하게 되었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저수지는 삼기 저수지로도 불리며

증평 좌구산휴양랜드에 속하는 문화관광지구의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저수지 주변에는 생태공원과 습지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고,

저수지의 둘레길은 3km 정도이며,

율리 좌구산을 시작으로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와 연계하여

호반을 따라 목재 데크 길이 조성되어 있다.

둘레길은 <등잔길>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구간 구간에 이 지역 출신으로 조선 시대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과 관련된 조형물과 함께

호반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산책로로

증평군이 자랑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가을산엔 소낙비가 들이친다

저무는 강에 풍랑이니

어부가 급히 뱃머리 돌리네

-김덕신의 오언절구‘용호(龍糊)’의 첫 구절-

 

맑은 새벽길 떠나는 나그네

가도가도 언덕은 길기만 하네

찬 연기는 오랜 절에서 나고

뭇 나무들은 층층 언덕에 서 있네/

바위 아래 샘물 소리 울리고

숲 사이에 달빛이 비치네/

봄을 맞아도 아직 돌아가지 아니함은

이리와 승냥이를 피하기 위함이라네.

~김득신의 시 '밤티골 가는 길에'~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다

-김득신이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서-

 

저수지 전망대

@김덕신(金得臣)

조선 시대의 선비이며 시인으로 1604년 출생하여 1684년에 사망했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백곡(栢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이다.

할아버지는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아버지는 경상 감사(慶尙監司)를 지낸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

어머니는 목첨(睦瞻)의 딸 사천 목씨(泗川睦氏)이다.

장령(掌令)을 지낸 김성발(金聲發)의 딸

경주 김씨(慶州金氏)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고,

다시 이계도(李繼道)의 딸을 계실로 맞아 5남 1녀를 두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안풍군에 봉해졌다.

 

김득신(金得臣)[1604~1684]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아버지 김치가 1601년부터 4년간 괴산의

능촌리 방하현(方下峴)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과

김득신이 어려서 청안 삼성당[현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내성동]에 살면서

부하였다는 문중의 증언으로 미루어

증평이나 괴산 능촌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호인 백곡(栢谷)은 할아버지 김시민 장군의 출생지인

목천현 백전동(栢田洞)[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따온 것이고, 귀석산인(龜石山人)은

청안현(淸安縣) 좌구산(坐龜山) 아래의 귀석산(龜石山)에서 따온 것이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1억 번이나 넘게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다.

저술이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에는 많은 글이 전하고 있다.

 

그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龍湖)」·「구정(龜亭)」·「전가(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거북 형상의 조형물은 율리저수지가 있는 산 이름이 '좌구산(座龜山)'이기 때문이다.

좌구란 ‘거북이가 앉아 있다’는 의미이다. 좌구산은 '구녀산' 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김득신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1684년(숙종 10) 81세가 되던 해 가을 8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득신의 묘소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2004년에 증평군 향토 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문집으로 『백곡집(栢谷集)』이 있고, 시화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와

평론집인 『종남수언(終南粹言)』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체(假傳體) 소설

「환백 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 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국순전』, 『국 선생전』 등 고려 시대에만 한정된 줄 알았던

가전체 계통의 소설이 조선 시대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백곡집』에는 고향인 괴산과

증평을 읊은 시와 청주와 금강, 그리고 당시 청주목에 속했던

할아버지 김시민의 고향인 목천과 병천을 읊은 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김득신은 한국의 한시사(漢詩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曾坪 栗里 石造觀音菩薩立像)

문화재지정;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6호(2002년 3월 15일 지정)

조성 시대 : 고려 시대

주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77

 

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曾坪 栗里 石造觀音菩薩立像)은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고려 시대의 보살상이다.

2002년 3월 15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

'괴산 율리석조관읍보살입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문화재 명칭 지정방침에 따라

「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曾坪 栗里 石造觀音菩薩立像)」으로

변경되었다.

 

증평읍사무소에서 증천교 직전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540번 지방도를 따라 율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삼기(율리)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건너편 산 밑에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 1구가 서 있다.

이 불상은 본래 마을 입구 길가에 있었던 것을

1979년 7월 삼기저수지가 완공돼 수몰되자

10여m 위 언덕으로 옮겼다가 2006년 보수공사와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불상의 높이는 2.3m 정도이고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얼굴과 몸체는 양감이 풍부하고 힘이 넘쳐 보이는 당당한 모습이다.

 

인상은 풍만하나 목에 삼도는 없고,

왼손은 손등을 밖으로 아래로 늘어뜨린 여원인(與願印) 형태이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여 가슴에 얹은

시무외인(施無畏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보관 밑에 굵은 띠가 둘려 있고, 정면에는 둥근 장식이 있으나

띠 안의 문양은 마모돼 잘 보이지 않는다.

마모가 심하여 형상이 분명하지 않으나

흐릿한 유곽이 인접한 미암리 석조관음보살과 같은 것으로 추측하여

관음불로 추측되어 있다.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지만

통통한 모습으로 추측되며,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법의(法衣)는 미암리 석조 관음 보살입상 형태와 동일한 데

양쪽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이 미암리 석조보살입상에 비하여

좁게 부조되어 있으며, 승가사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띠 매듭이 남아있고 군의(裙衣)는 복부에 삼단주름이 부조되어 있다.

양쪽 다리에는 활모양의 옷 주름이 밀착되게 늘어져 있고

그 발목 아래까지 군의가 내려져 있다.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보살상의 앞면은 정성을 들여 표현하고 있는데

얼굴과 불신에 비해 양손이 매우 크게 표현되어 있다.

 

하나의 돌로 부조된 뒷면은 훼손이 심하여 알 수 없지만

옷 주름 등 별도 부조(浮彫)하지 않았다.

이전할 당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숭정후갑신년십월일립(崇幀後甲申年十月日立)'이라 적혀 있어

조선 숙종 30년(1704)에 조성된 것처럼 기록돼 있으나

불상의 조각 양식으로 볼 때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평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은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분별할 수 없지만,

미암리 석조관음보살입상처럼 보관을 쓴 머리 형태에서 보듯이

충북지방에 유행했던 고려 불상의 특징을 볼 수 있으며,

당당한 체구와 양감이 있는 조각 수법이

비교적 수작에 속한 것으로 학계는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