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曾坪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과 삼층석탑

2020. 7. 27. 20:19문화재

증평 남하리 사지(曾坪 南下里 寺址)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에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온 사찰 터이다.

2018년 8월 24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증평 남하리 사지는 마애불상군(유형문화재 제197호)과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41호)이 자리한 유적지로

지표조사 결과 제작 시기를 삼국시대까지 소급해 볼 수 있는

당초문 암막새 등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철화백자편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온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남하리 사지는 신라의 북진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삼국시대 중원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터로 학계는 여기고 있다.

찾아가는 길은 민속체험관의 삼존불을 마주 보고

우측 도로를 따라가다 1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 언덕 쪽에 염실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을 들어서면

안쪽 산기슭에 보호각이 보이고 그 앞에 삼층석탑이 있다.

증평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曾坪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하3리

염실마을 뒤편 남하리사지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5구의 마애불이 있는 불상군으로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97호 지정되어 있다.

 

남하리사지는 남대산을 배경으로 동향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절터로,

좁은 계곡의 경사면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향화(香火)를 밝혔던 작은 암자 터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경내에는 삼층석탑과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남아 있다.

이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에 관한 소개는 1966년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한국지명총람』에서 짧게 이루어졌고,

1967년 단국대학교박물관에서 괴산지역의 고적을 조사하면서

처음으로 학술적인 조사보고서를 냈다.

이후 1994년 충청대학박물관에서 남하리사지 지표조사보고서를 내면서

마애불 중 반가사유상을 새로운 자료로 제시하였다.

 

이 마애불상군의 전체 높이는 1.14~2.98㎝로,

마애불상이 조각된 바위는 석영이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부식이 심하여 석질이 좋지 않아

전체적으로 불상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애불상군의 중심에 있는 바위는 높이 352㎝,

너비 470㎝, 두께 320㎝로서, 이 바위의 정동향한 수직단절 면에 마애삼

존불입상이 조각되어 있고, 여기서 직각으로 교차한 북측 면에

독립된 마애불입상 1구가 북향으로 조각되어 있다.

 

 

여래상

또 이 바위의 앞쪽에는 우협시불 앞에서 직각으로 교차하여 돌출한

높이 300㎝, 너비 350㎝, 두께 215㎝ 규모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북쪽 면에 반가사유상 1구가 조각되어 있다.

 

반가사유상을 한 여래

삼존불의 중앙 본존불 아래 바닥에는 사각형의 우물을 파 놓았다.

대좌부분. 본존불 아래는 우물이 만들어져 있다.

 

 암벽 면의 중앙에 본존 입상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양협시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마애삼존불입상은 각기 보주형(寶珠形)으로 주변을 얕게 파내어

윤곽을 만든 내부에 저부조로 조각되었으며

각 방형 대좌에 직립한 모습이다.

단 우협시보살상의 대좌는 미완성인 듯하다.

 

중앙 본존은 대좌에 직립한 불입상으로 높이 298㎝이며,

원형의 두광을 갖추었고, 각 부의 표현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소발(素髮)의 머리 정상에는 위로 뾰족한 보주형의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원만한 상호(相好)에는 눈썹은 표현되지 않았으나

두 눈은 지그시 감아 옆으로 길게 치켜뜬 모습이 확인된다.

 

코는 길게 표현되었으나 각형(角形)으로 높지 않으며 입

에는 미소의 흔적이 보인다. 귀와 삼도(三道)는 조각되지 않았다.

양어깨는 당당한 편이며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양어깨에 걸쳐서 양팔과 복부 아래로 흘러내려 무릎까지 덮었는데,

거의 선각(線刻)에 머물고 있으나

3~4조의 수직선문이 U자형으로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결하고 있다.

발 부분과 대좌 부분은 생략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우협시불

우협시보살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으며

불신의 외곽과 얼굴 부분만 확인이 된다.

얼굴은 본존과 유사하고, 보살의(菩薩衣)는 뚜렷하지 않지만,

양쪽 옆구리에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이

길게 빼 늘어진 옷자락이 보인다.

좌협시불

좌협시불 역시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조각이 불분명하다.

다만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서 있는 모습과

방형의 대좌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여래상

 

여래입상은 하단부가 땅속에 매몰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희미한 상태로, 높이는 253㎝ 정도이다.

얼굴은 삼존불과 유사하고 불의는 우견편단으로

가슴 앞에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진

옷 주름선이 굵게 나타나 있다.

수인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한 듯하나

마멸이 심하여 확인이 어렵다.

 

반가사유상은 정면 삼각형의 암반 북측 면에 선각 되어 있는데

역시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고, 높이는 253㎝ 정도이다.

대좌에 걸터앉아 상체를 오른쪽으로 약간 굽히고

오른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은 윤곽선과

대좌의 복련판 5엽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5구의 마애불상은 모두 원만자비형의 인상과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모두 생략되어 있다. 불상의 전체적인 특징과

남하리사지의 다른 유적으로 보아 이 마애불상군은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 말 내지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증평 남하리사지 삼층석탑

자연암반(4.4m×3.4m, 높이 1.65m)위의 평평한 곳에

대석(臺石)을 올리고 그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탑의 높이는 2.9m이다.

현재 탑이 있는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

혹은 다른 장소에서 옮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반 위에 괴임돌을 몇 개 고이고

정사각형의 높직한 괴임대 1매석을 놓아

탑신부를 받게 하였는데

대석의 윗면이나 옆면은 물론 탑신(搭身)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등의 아무런 조식이 없어 단조로움을 준다.

 

1층과 3층탑신석은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2층 탑신석만이 초청 옥개석과 한 돌로 조성되어 시선을 끈다.

 

각층 옥개석은 받침이 3단씩이고

상면에는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는 괴임단이 없으며

네 귀퉁이 전각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1층 탑신의 한 모서리 위에는 돌을 쪼아낸 흔적이 남아 있고,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별도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만은 1층 옥개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고려 시대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아래 옥개 받침은 모두 3단으로 되어 있으나

각 층의 윗면에는 탑신 받침이 없다.

 

 

상륜부는 정상에 노반석 하나가 놓여 있을 뿐 그 이상의 부재는 없으며

찰주공(擦柱孔, 직경 9.5㎝, 깊이 16㎝)은 노반석을 관통하여

3층 옥개석에까지 뚫려 있다. 각부에 장식 조각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나

낙수면이 평박하고 옥개석 받침이 높게 각출 되어 있어

전각의 반전과 잘 어울려서 안정감과 경쾌한 인상을 아울러 느끼게 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흉년이 드는 경우,

주민들이 노반의 방향을 다르게 놓아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각층 옥개석 추녀의 양쪽 끝이 완곡한 점이라던가

초청 옥개석과 2층 탑신석의 처리 등 각부 양식 수법으로 보아

건립 연대는 고려 후기로 추정되며

당시의 석탑으로서는 뛰어난 불탑이라 하겠다.

 

남하리 삼층석탑은 1994년 충청전문대 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고려 시대 인근 염곡소(念谷所)에서 많은 불을 다루면서

청안 남쪽의 높아지는 화기(火氣)를 눌러,

마을의 화재와 주민들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