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물걸리사지 삼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020. 6. 24. 23:34문화재

홍천 물걸리사지 삼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작년 5월 설악산 울산바위를 산행하고 돌아오는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보러 갔지만,

불행히도 보호각이 누수로 인하여 보수 중이라서

석불들을 모두 비닐로 덮어 씌어놓아 보지 못하고

그 앞 삼층석탑만 보고 돌아왔던 아쉬움 때문에 다시 찾았다.

한번 다녀온 길이긴 하지만 다시 찾아가려니

들머리 찾기가 마을 안에 있어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 안에 있는 전각(보호각)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보호각은 자물쇠만 걸려 있고 닫혀 있지 않았다.

보호각 안에는 4개의 보물급 석불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보호각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물걸리사지는 찾는 이가 없는지 한산해 보였다.

홍천 물걸리사지 안내판에 의하면 옛 홍양사가 있던 절터라고 되어 있다.

통일신라 시대 홍양사지(洪陽寺址)라고 전해오고 있으나,

어떤 문헌이나 기록에서도 사찰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창건 시기와 폐사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절터에는 삼층석탑(보물 제545호)을 비롯하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불대좌(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 하대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석불이 있는 마을 언덕 바로 뒤쪽에 대승사라는 절이 있지만,

이 절의 창건 기록으로 보아 옛적 홍양사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홍천군지(1989)>에 의하면

『내촌면은 밀림지대로 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홍천 현 관할로 되었으며, 명종 때 이, 최, 김, 3성의 불교 신자가

물걸리(東倉)에 절을 짓고 입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라는 기록에서

고려 명종 이전에 사찰 이름은 모르나,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걸리사지는 탑둔지, 동창리라 불렸으며,

지금도 행정명과 관련 없는 동창마을로 불린다.

1)홍천물걸리 삼층석탑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보물 제545호

건립 시기: 9세기 후반

크기: 높이 4.01m

 

물걸리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다.

절터에 남아 있는 많은 유물로 보아 이전에는

이곳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보물 제5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4.01m이다.

석탑은 현재 보호각 앞에 서 있는데,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보인다.

1975년에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을 보수하였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리고,

꼭대기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세운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모서리 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탑이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 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삼층석탑에 대해서는

본방 “보물 제545호 홍천 물걸리삼층석탑과 대승사”참조

 

보물 제542호 홍천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洪川物傑里石造毘盧遮那佛坐像)

문화재 지정: 보물 제542호

불상 높이: 172cm

건립 시기: 통일신라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불상의 어깨가 넓고 당당하여 육중한 느낌을 주나,

불신보다 대좌의 높이가 낮은 편이어서

신체 비례가 적당하지 않고 광배도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석조 비로자나불상 외에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등

보물 4점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특히 석불상 2구에 대해서는 1942년에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화강암재 좌상으로 연화좌가 있고 높이는 1구가 5척 7촌으로 완전하며,

다른 1구는 3척 7촌으로 목이 부러져 있으나 조각은 모두 정교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은 나발(螺髮)이 표현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놓여 있으나, 얼굴은 코가 깨지고 마멸되어

세부 표정을 알아볼 수 없다. 다만, 눈, 코, 입의 크기가 작고

이마도 좁게 표현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두 볼이 통통하면서 살이 있어 보인다.

목은 짧은 편으로 어깨와 거의 붙은 듯 위축되어 있고

가슴 또한 넓지만, 양감이 줄어든 모습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양쪽 소매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는

일률적으로 표현된 평행의 굵은 옷 주름선이 보인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감싸고 있어

일반적인 지권인 형태와는 다르게 손의 좌우가 바뀌어 있다.

지권인은 주로 비로자나불상이 취하는 손 모양이다.

홍천 물걸리비로자나불좌상은 2가지 면에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상과 다른 점이 있다.

첫 번째는 수인이다.

홍천 물걸리 비로자나불상과 같이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형태를

좌권인(左拳印)이라 한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은

우리나라에서 최고(最古) 석불로 부리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국보 제233-1호)이나,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좌나불좌상(국보제63호)를 비롯하여

보림사 철불 비로자나불(국보 제117호)등에서 보듯이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고 있는 우권인(右拳印)이 가장 보편적인 데 반하여

홍천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좌권인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의 비로자나불상 중에

이처럼 좌권인을 한 다수의 예가 알려져 있다.

참고로 지금까지 알려진 비로자나불 좌권인 불상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국보제26호)

2)밀양 천왕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1213호). 항마좌(降魔座)

3)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좌나불좌상(보물제990호)

4)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제542호), 항마좌(降魔座)

5)당진 영탑사금동비로자불삼존좌상(보물제409호)

6)청주 용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북유형문화재23호),

7)진주 고산암 석조비로자불좌상(경남유형문화재 236호)

8)광주 무등산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 항마좌(降魔座)

9)진주 한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236)

두 번째 특이한 점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비로자나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발바닥을 위로하는 길상좌(吉祥坐) 형태를 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홍천 물걸리비로자나불좌상은 그 반대로

왼쪽 다리가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를 항마좌(降魔座)라고 하는데

이런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상은 3곳이 있는 데

천왕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무등산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더불어

홍천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뿐이다.

항마좌의 비로자나불상은 이처럼 3기에 불과하지만,

모두 좌권인을 하고 있어 손의 위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진 팔각연화좌이며

하대석의 8엽 연화의 꽃잎 끝부분이 살짝 반전된 것은

이 대좌가 신라 하대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하대석

하대는 복판복련(複瓣覆蓮)을 8엽으로 돌렸으며

그 위로 2단의 굄이 중대를 받치고 있다.

8각의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했고

그 사이 각 면에는 향로1개를, 다른 면에는 모두 주악상(奏樂像) 5구와

무릎을 꿇고 있는 공양상(供養像)2구를 새겨넣었다.

단판의 앙련(仰蓮)으로 장식된 상대석은 꽃잎을 중첩시켜

장식적 효과를 높였고, 각 연판문에는 다양한 꽃문양을 장식하여

섬세하면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은 조각솜씨가 정교하지 못해 생동감은 없지만,

신체의 묘사라든가 대좌의 구성 및 비례에서 9세기초의 조형 감각이 보인다.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줄어들었으며

원만한 얼굴이나 약간 위축된 신체표현,

무겁게 처리된 형식화된 옷 주름 표현,

3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 등에서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 석조비로자나불상은 금당의 본존불로

좌우에 석가불(釋迦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阿彌陀佛)을 배치한

삼신불(三身佛)이며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안치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때 하대석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받침대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각 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사자(獅子)가 1구씩 배치되어 있다.

크기나 형태, 특징으로 볼 때

석조비로자나불상 대좌의 하대 받침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할 때

절터 주변에서 소량의 철불 파편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협시, 즉 노사나불은 철불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홍천 물걸리 불상은 우리나라 삼신불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해당하며

석불과 철불이 함께 구성된 삼신불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 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