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중앙탑공원과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

2020. 6. 4. 20:15문화재

국보 제6호인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은 충주 중앙탑공원 안에 있다.

이 탑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부른다.

중앙탑공원은 남한강을 끼고 중앙탑 주변에 조성한 조각공원으로

넓은 잔디밭에 “문화재와 호반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국내 조각가들의 작품 26점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탑공원은 충북 최초의 야외 조각 공원이라고

충주시가 자랑하고 있는 중앙탑사적 조각공원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문화재 지정: 국보 제6호

건립시기: 통일신라시대

크기: 높이 14.5m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우리나라 중앙에 건립된

통일신라의 불탑인 이 탑은 국보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화강암 석재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충주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은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서 주변 경작지에서는 가끔 기왓장이 출토되고,

또한 석탑 앞에는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신라시대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寺刹名)은 알 수 없다.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면에 있는 지명 중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반내[半川]라고 하는 것은 남북 끝에서 반이되는 내라고 해서 반내라고 했으며

본래는 ‘한반내’였으며 이는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6년도의 조사에 의하면, 기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어 점차 기울어지고 있으며,

심할 경우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다음해에

이 석탑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해체 도중 탑신부와 기단부에서 유물이 발견되어 현장에서 수습되었다.

 

탑신부의 제6층 탑신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편(書類片)과 동경(銅鏡) 2점,

목제칠합(木製漆盒),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 있는 합[靑銅製有蓋盒] 등이 나왔다.

그리고 탑신부에서 발견된 은제사리합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舍利甁)이 있고,

그 주변에 몇 개의 사리가 흩어져 있었으며

사리병 안에도 몇 개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상의 유물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출현된 것이나

그 조성연대에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경 2점은 고려시대의 조성품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 석탑은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재차 사리장치의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탑은 탑평리의 한강 중류 연안 폐사지의 높은 대지에 잘 보존되어 있다.

높이 14.5m인 이 석탑의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한 방형중층의 일반형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층·하층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이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기단부

하층기단 면석은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받침기둥) 3주가 정연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쪽 우주와 탱주 2주가 모각(模刻)되었으며,

상층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되어

신라식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갑석 위에는 별개의 돌로 마련된 2단의 각형 받침대가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도 하층부에서는 수매의 석재로 구성하였고

상층부에 이르면서 1매의 석재로 건조하였다.

각 층의 탑신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는데

초층은 우주가 별석으로 조성되었고 면석도 별석이며, 2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우주가 모각된 4매의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조립하였거나

혹은 앞뒤 양면에만 양쪽 우주를 모각한 판석을 세우고

그 양쪽(좌우)에는 단순한 판석을 끼워서 면석을 삼았는데,

상층부인 6층과 7층의 탑신석은 1석으로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초층이 낙수면부와 처마 밑의 옥개받침부가 도합 8석으로 조립되어 있는데,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낙수면부와 옥개받침부가

1석으로 되어 전체가 2석으로 조립되었으며,

6층과 7층에 이르러서는 1석으로 되었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씩이고 옥개석 상면에는

각형 2단의 받침대를 만들어 그 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어

신라석탑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추녀가 수평이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反轉)도 잘 표현되어서

대규모의 석탑으로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에 장엄도 잘 갖추었던 당대의 유수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서 특이한 것은

노반석(露盤石: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을 이중으로 놓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구성한 점이다.

복발 측면에 한 줄의 띠를 돌리고 앙련(仰蓮)을 조각한 앙화석을 얹은 것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상륜양식이라 하겠으나,

노반석 2석을 겹친 것은 아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특수한 형식이라 하겠다.

이 노반석은 일반형과 같이 상단이 갑석형으로 되고 그 밑에 1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나

그것이 신라시대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단면수직단층을 이루지 못하고 안으로 굽었는데,

이러한 점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보수(補修)가 아닐까 짐작된다.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하여 너비의 비례가 적어서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감을 주며 안정감이 적어 보인다.

 

석탑 앞에는 석등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는 8각연화대석(八角蓮花臺石)이 있어

이 일대를 사지(寺址)로 추정하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단언하기는 어렵다.

석탑의 건조연대는 기단부에서의 탱주의 배치, 탑신 굄대,

탑신부 탑신과 옥개석 등의 짜임 등 각 부 양식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공원이나 강변에 설치된 원형의 이 석조물은 달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