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제2부

2020. 6. 19. 17:46문화재

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제2부

 

충주 청룡사지보각국사탑 제2부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일대에 있는 사지(寺址)로,

창건 연대와 창건주는 미상이다. 다만 그동안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 사지에서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어

고려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를 거처 조선이 건국되면서 시작된 숭유억불정책은

사찰 폐사는 물론 스님들의 부도나 탑을 세우는 것까지

제한을 받았던 시대 상황 속에서 청룡사에 보각국사(普覺國師)의 부도를 비롯하여

탑비·석등 등을 세웠다는 것은 왕실의 보호는 물론

당시 사찰의 위상도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청룡사가 어떤 이유로 소실(燒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민담으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진다.

「명성황후인 민비를 등에 업고 민씨들이 득세하던 조선조 말기에

당시 판서인 민대룡(閔大龍)은 명당으로 알려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 청룡사 윗자리에 소실의 묘를 지었다.

풍수설에 따르면 명당 부근에는 절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설이 있어

민대룡은 청룡사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오량리에는 허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허씨들은 세력이 커서 청룡사의 운영권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분 없이 절을 일방적으로 없애는 일이 쉽지 않자

민 판사는 몰래 청룡사의 승려를 돈으로 유혹하여 절에 불을 지르도록 사주했다.

절은 화재로 소실되고 불을 지른 그 승려는 도망치다가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마침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청룡사가 불길에 휩싸이자 지붕에서 살던 큰 뱀이 불을 지른 사람 앞으로 떨어져

이에 놀라 한 사람은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급사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에도 민씨네 산소에 벌초하러 오는 사람은 빈번히 죽거나

큰 해를 입었기 때문에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각국사>

보각국사(普覺國師)는 고려 충숙왕 7년(1320년)에 태어나

조선 태조 1년(1392년)에 입적한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승려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보각국사의 보각(普覺)은 그의 시호이다.

보각국사는 주로 고려 말기에 활약한 고승으로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고,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로부터도 상당한 공경을 받았던 분이다.

보각국사가 입멸하자 태조는 또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호(塔號)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내리고,

1392년 12월 청룡사 북봉(北峰)에 부도를 세워 유골을 안치하였다.

이처럼 보각국사는 여러 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고,

국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후원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는데

청룡사지 북서쪽으로 형성된 능선 위에 탑비·석등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보각국사탑은 처음에는 <청룡사보각국정혜원륭탑>이라 하였던 것을

2010년 11월 01일로 제정된 문화재 명칭 부여방식에 따라

<청룡사보각국사탑>으로이 바뀐 것이다.

새롭게 정비된 문화재(부도) 명칭 부여방식은 소재 지역명(충주) 사찰명(청룡사)

그리고 부도의 주인 시호(보각국사)만 사용하며

탑 이름(정혜원륭)은 제외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청룡사지보각국사탑은 청룡사 위전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석종형승탑이 나오고

그 축대 위에 쌍사자석등과 탑 그리고 탑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문화재 지정: 국보 제197호

건립 시기: 1394년

크기: 높이 263㎝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오량리)

국보 제197호로 지정된 보각국사탑은

청룡사지 북서쪽으로 형성된 능선 위에 탑비·석등과 함께 세워져 있다.

부도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에게 세워졌던

사후(死後) 기념적인 조형물이었다.

보각국사는 고려 말기에 활약한 고승으로 공민왕과 우왕을 거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로부터도 상당한 공경을 받은 고승이다.

 

보각국사 혼수는 1392년 7월 태조 이성계의 즉위에 축하를 표하고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아 충주 청룡사로 하산하였다.

1392년 9월 18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세수 73세, 법랍 60세)하였는데,

이에 문도들이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보각국사의 부음을 듣고 내신(內臣)을 보내서 조문하고

부도 건립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태조는 또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호(塔號)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내리고,

1392년 12월 청룡사 북봉(北峰)에 부도를 세워 유골을 안치하였다.

이처럼 보각국사는 여러 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고,

국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후원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다.

 

보각국사탑은 높이 263cm로 팔각원당형을 따르면서 새로운 양식이 도입된 부도이다.

보각국사탑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부도는 크게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지표에 높은 8각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이는데,

하대석에는 8각의 높은 굄 위에

복판(複瓣) 단엽(單葉) 16판(瓣)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었다.

 

하대석과 중대석

기단부는 평면 팔각의 지대석과 하대석으로 결구 되었는데,

1976년 복원 당시 지대석 하부에서 석실(石室)이 발견되었다.

즉 보각국사 유체를 화장한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지대석 하부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상면에 단판 16엽의 세련된 연화문을 장식하여 공양의 의미를 더하였다.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형의 별도 화형 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인다.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운룡문(雲龍紋)과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사자상과 용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으며

수호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석과 같은 양식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여 마치 하대석을 뒤집어놓은 것 같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상하로 대칭되도록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상부에 높은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탑신

탑신은 구형(球形)에 가까워 회암사지 부도(檜巖寺址浮屠) 연상하게 하나

그보다는 8각의 형태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각(隅角)마다 반룡(蟠龍: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이

돋을새김 된 원주(圓柱)를 강한 부조로 모각 하였고,

각 면에는 안상 안에 무기를 든 신장상(神將像)을 1구씩 조각하였으며

기둥 위에는 목조 건물의 가구(架構)를 모각하되 옥개석(屋蓋石)의 이면까지 연장되었다.

 

탑신석은 상대석 상면에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삽입·고정되도록 했으며,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둥은 중국에서 원나라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성행한 양식이었다.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옥개석과 상륜부

옥개석은 8각으로 이면에는 탑신에서 연장되는 목조 가구가 모각되고

밖으로 16판의 홑잎 연화가 조각되었으며,

낙수면(落水面)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높은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내려와서

끝에는 용두(龍頭)가 조각되었다.

 

처마 밑은 호선(弧線)을 그려서 추녀가 높이 들렸고,

꼭대기에는 8판 복련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옥개석]은 하부에 넓은 받침과 추녀와 사래가 번안되었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마루부는 높게 돌출시켰는데 아래쪽에 용두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다.

이처럼 마루부에 용두가 새겨진 경우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지붕돌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복발(覆鉢)·앙화(仰花)·화염보주(火焰寶珠)가

차례로 얹혀 완전한 형태를 이루었다.

이 부도는 원위치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고,

상륜부는 지하에 파묻혔던 것을 원위치에 복원하였다.

상륜부는 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원래는 여러 부재가 결구 되어

상당히 고준하고 장엄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대석 밑 지하와 탑신 상면에는 각각 사리공(舍利孔)이 있으나

장엄구들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도난당했다.

보각국사 혼수(混修)의 묘탑인 이 부도는

옆에 있는 탑비에 의하여 1394년(태조 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사지 북서쪽에 형성된 능선의 일정한 공간을 조성하여

장대석으로 기초를 견고하게 한 후 중간에 1단의 석축을 두고,

석등·상석·부도·탑비를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보아

왕릉의 석물 배치법과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보각국사 혼수가 국사를 역임한 승려였으며,

태조 이성계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왕릉의 석물 배치에 따르는 배치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부도는 1976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獅子石燈)

문화재 지정 보물 제656호

건립 시기: 1392년~1393년

크기: 높이 203㎝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진

장명등(長明燈: 능묘 앞에 설치한 석등)으로서,

석등 지대석과 함께 보각국사탑과 탑비(塔碑)가 일렬로 배치된

고려 시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방형등(方形燈)에 속한다.

석등은 크게 기단부·화사석(火舍石)·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아래쪽에 사각형의 받침돌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거북 모양의 사자 1마리가

하대석 대신 놓아 석등을 받치고 있다.

석등에서 기단부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 일부 석등에서 채용된 수법이었다.

 

이 석등은 현재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재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모든 부재가 네모난 데 비하여

하대석(下臺石)이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일명 사자석등이라고도 한다.

정면을 향하여 구부리고 있는 사자의 등에는

초화문(草花文)이 정연하게 조식 되어 있는

말안장 모양의 네모난 장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중대석인 간주석(竿柱石)을 떠받들 수 있도록

1단의 네모꼴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툭 불거진 눈과 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 사자상은

울퉁불퉁한 근육과 함께 내디디고 있는 앞다리·뒷다리가

매우 힘있게 표현되었으며, 옆으로 비낀 꼬리 또한 유려하게 조각되었다.

 

사자상 위에는 사각형 낮은 간주석(竿柱石: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별도의 받침대를 마련하였다.

간주석은 사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을 조식하였다.

1매의 돌로 낮게 조성된 간주석의 네 면에는

亞자 모양의 안상(眼象)이 두 겹의 선으로 조식 되어 있으며,

각 안상 내부에는 삼각형을 이루는 3개의 원형 무늬와 함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불꽃무늬[火焰文]가 선각 되어 있다.

 

상대석은 8엽의 앙련문(仰蓮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돋을새김이 높아 우수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상대석 상부에는 별도의 갑석형(甲石形) 받침을 사각형으로 마련하였다.

 

다른 부재와 마찬가지로 1매의 돌로써 만들어진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네 모서리에

둥근기둥모양[圓柱形]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불을 넣는 화창(火窓)은 앞뒤로 사각형의 화창(火窓) 2개만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석등에 보이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화창의 형태가 다른 석등에서와는 다르게 방형으로서

화창의 전후좌우로 관통시켰으며, 네 기중에는 원형의 기둥주를 묘사했고,

화창의 밑부분에 창벽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옥개석은 하부에 낮은 받침과 추녀를 새겼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옥개석(屋蓋石) 역시 한 매의 네모난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밑부분에는 1단의 각형 받침과 함께

네 개의 서까래 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지붕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로 볼록한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

추녀 끝이 조금 치켜 올라간 처마의 곡선은 약간 반전하고 있으며,

합각의 용마루는 둔하고

두꺼운 고려 시대 승탑(僧塔)의 옥개석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옥개석 상부에는 보주(寶珠)를 설치하였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결실된 홈이 시공되어 있다.

승탑·탑비와 더불어 일렬로 배치된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의 배치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은 부도와 상석(床石)이 있는 석축단 바로 아래에 있다.

사후 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묘탑 앞에 석등을 세웠으며,

한 단 낮은 곳에 석등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왕릉의 석물 배치법과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부도와 석등을 세운 장인은

중앙 정부에 소속된 우수한 석공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석등은 탑비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인 1392년(태조 1)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 사이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으로서 가치가 높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

문화재 지정: 보물 제658호

건립 시기: 1394년

크기: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길 147 (오량리)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직사각형의 비좌 윗면에는 2단 굄이 있으며

중앙에 있는 직사각형의 홈 안에 비신이 꽂혀 있다.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단 좌우 모서리가 접힌 평두규상이며,

아랫부분과 여러 부분이 마멸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다.

비문의 앞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보각국사의 이름은 혼수이며

속성은 조 씨고, 자는 무작, 호는 환암이고

풍양현 사람으로, 1383년(우왕 9)에 국사가 되었고,

73세에 입적하자 왕명으로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뒷면에는 200여 명의 문도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끝부분에 있는 "甲戌三月日門人禪師希進立石鐫字門人禪室□□"에 의해

이 탑비가 1394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우고,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1394년(태조 3)에 건립되었다.

 

청룡사지 석종형승탑(靑龍寺址石鐘形僧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승탑(僧塔)은 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한 석조물이다.

승탑을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그리고 승탑의 명칭은

대부분 선사의 시호(諡號)를 따른다.

그러나 이 부도는 주인을 알 수 없어 누구의 부도인지 미상이다.

우리나라 최초 부도로 불리는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을 보면

8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상대석(上臺石)·중대석(中臺石)·하대석(下臺石) 등의

기단부는 물론이고 그 위에 놓이는 탑신 굄 대·

탑신부(塔身部)·옥개석(屋蓋石)·상륜부(相輪部)까지

모두 8각으로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인 평면이 8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부도를 이른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 일컫고 있으며,

이후 신라 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모두 이러한 형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 이후에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59호)과 같이

평면이 4각으로 변하여 일반 석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범종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나타나

8각원당형과 함께 발전되었다.

청룡사지의 이 석종형부도는 위의 보각국사탑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 탑 아래에 있는 이 부도는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석종형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覆鉢)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 부분을 조성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 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할 수 없다.

혹자는 ‘적설당사리탑(寂雪堂舍利塔)’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고운당사리탑(孤雲堂舍利塔)'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석종형부도 앞에 또 다른 미상(未詳)의 부도 1기가 있다.

상륜부는 없고 탑신부의 옥개석과 기단부의 상대석과 하대석만 남아 있는데

그 옆에 반원형으로 된 석부재가 있다.

옥개석 상대석, 하대석이 모두 육각형의 원당형(圓堂形)이므로

보각국사의 탑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