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제1부 - 청룡사와 충주 청룡사 위전비

2020. 6. 17. 00:05문화재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제1부 - 청룡사와 충주 청룡사 위전비

 

충주 기행의 마지막 코스로 국보 제197호인 청룡사지 보각국사승탑(부도)를 찾았다.

승탑은 대개 관련 사찰 경내에 있기에 보각국사승탑도 가는 입구에

청룡사라는 편액을 발견하고 이곳에 보각국사승탑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 청룡사로 향했다.

꼬불꼬불한 일차 편도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청룡사가 나왔다.

그런데 약사전이란 법당과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만 보이고 마치 텅 빈 절간처럼 보였다.

법당에 참배부터 하려고 차에서 내려 법당으로 향하는 데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요란스럽게 짖어대면서 달려들 자세다.

사찰에서 키우는 개는 대개 유순한 데 이 개는 입마개는 물론 목줄까지도 하지 않았다.

무섭게 짖어대며 달려드는 데 이상하게도 안에서는 사람 소리만 날 뿐

사람은 보이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참 특별한 절이라 생각하고 참배하기를 포기하고

잠시 물러나 국사탑이 있을 만한 곳을 찾다가

약사전 옆 산으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있어 이를 따라 올라갔다.

다행히 개는 더는 따라 오지 않았다.

조금 올라가니 허름한 종각과 삼성각이 있을 뿐

오솔길마저 끊어지고 승탑이 있을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청룡사 약사전, 청룡사의 본당인 모양이다.

청룡사의 창건설화를 보면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도승이 이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나무 밑에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러자 용 한 마리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고

여의주는 빛을 내다가 사라지자 용도 사라지고 비도 멎었다.

이를 본 도승이 이곳 산세를 살펴보니

이곳이 비룡이 강림한다는 「비룡토천형(飛龍土天形)」 의 길지임을 깨닫고,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는 말을 따라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고 했다고 한다.

사찰 입구에 서 있는 5층석탑
범종각, 전각이 아닌 법당 뒤 언덕에 네기둥만 세우고 범종이 달을 매달았다. 너무 허술하다.
삼성각이다. 가파른 언덕에 기둥을 세워 전각을 세웠다. 문은 닫혀 있었다.
숲속에 세워진 석조여래(미륵상)도 보인다.

현재의 청룡사는 이 전설에 나오는 그곳인지는 알 수 없었나

나중에 찾은 보각국사승탑지의 관리소 직원의 말에 의하면

청룡사의 주지 스님이 돌아가시고 신도는 물로 일제 왕래가 없는 절이라고 한다.

보각국사탑과는 오늘은 인연이 닿지 않는가 보다 생각하고 포기하고 내려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처음 오던 포장도로를 따라 앞으로 가다 보니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관리소가 나왔다.

관리소 옆으로 바로 청룡사 위전비(位田碑)가 나오고

이어서 석등, 탑, 탑비가 나란히 보였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位田碑)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 중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비로

1692년(숙종 18)에 청룡사 중창 및 경영 등에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는 데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석이다.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을 적고 있어

당시 사찰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비문에는 2~3차례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는 1978년 11월에 보수되었다.

이 위전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2004.09.27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는 귀부와 비신, 지붕[옥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부는 폭이 좁고 높이가 높아 안정된 느낌은 없다.

목은 짧고 두꺼운 편이어서 둔중한 느낌이 든다.

얼굴은 풍화가 심한 편이나 이목구비의 윤곽만 두루뭉술하게 조각하여

섬세한 맛이 떨어지는 조선 후기 조각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목이 짧고 귀갑을 두껍게 표현한 만큼 얼굴이

귀갑에 바짝 붙어 치켜든 모습을 하고 있다.

귀갑은 매우 두껍게 표현되어 있어 발과 꼬리 등은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귀갑무늬를 반복해 귀갑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상부 중앙에 장방형의 홈을 파고 주변을 돋우어 비신을 꽂도록 하였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 형식이다. 처마 끝은 약간 반곡시켰으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용을 새겼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서로 마주 보도록 두 마리의 용을 새겼고,

각 추녀마루 끝에 각 1마리의 용을 새겼다. 지붕 면에는 아래쪽에 구름을 조각했고

위쪽에는 서로 꼬고 있는 용의 몸을 조각했다.

이처럼 지붕에 용을 새긴 것은 비석의 이수를 채용하는 고식(古式)의 기법과

지붕 형식을 채용하는 조선 시대의 기법을 혼합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 비석이 지니는 독창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비신은 장방형의 판석으로 사면에 모두 글을 새겼다.

글은 모두 종서로 새겼으며,

맨 앞에 ‘청룡사위전비기(靑龍寺位田碑記)’라는 비명을 새겼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지붕돌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신에 쓰여 있는 기록은 조선 후기 사원 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 대전